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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간첩 조작 피해' 유가려 "아버지 신변 위협에, 아니다 말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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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요약

서울시 간첩 조작 사건의 피해자인 유가려씨가 8년 만에 입을 열었습니다. 그는 국정원 수사관들의 폭행,폭언에 못이겨 "오빠가 간첩"이라는 허위 자백을 해야 했습니다. 24시간 카메라로 감시받는 독방에서 갇혀지낸 6개월을 생생히 증언했습니다. 간첩 조작 자체도 놀라운 일이지만, 그곳에서의 6개월은 철저히 인권이 유린된 세월이었습니다. 아버지 등 가족을 볼모로 삼아 자백을 받아냈습니다. 가혹행위를 한 국정원 수사관에 대한 재판에 나가고 있는 그는 아직 그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2013년 중국 추방 이후 첫 언론 공식 인터뷰
"하루 이틀 잘해주다가 갑자기 두꺼운 서류로 머리 내리쳐"
'화교'라는 한마디 실토받으려 폭행…국정원 이미 아는 사실
우성씨 "동생 심리적으로 제압해 간첩 조작하려는 의도"
북한 보위부와 직접 접촉했다는 가려씨는 기소 안해
"같이 구속되면 변호사 접견 가능하고 진술 조작 어려워"
"오빠, 집 오가며 조사받는다고 들었는데 죄수복에 수갑찬 모습"
"사실대로 말하려고 했지만 가족 신변 걱정돼 말 못해"
"국정원 조사에서 '아버지가 위험해질 수 있다'는 말 들어"
"카메라가 24시간 감시…샤워도 변기 뒤에서 쪼그려서 해"
"국정원 직원들 사과는커녕 나를 죄인처럼 쏘아봐 놀라"
"국정원서 수없이 죽고 싶다는 생각" 우울증·공황장애 시달려

서울시 간첩 조작 사건의 피해자인 유가려씨. 노컷브이 영상 캡처서울시 간첩 조작 사건의 피해자인 유가려씨. 노컷브이 영상 캡처
8년의 시간도 남매의 깊은 상처를 덮기에는 부족했다. 오빠 유우성씨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된 게 2013년 1월이다. 우성씨에 대한 간첩 혐의 수사는 "오빠가 간첩"이라는 동생 가려씨의 자백에서 시작됐다.
 
70, 80년대도 아닌 21세기에 버젓이 자행된 간첩 조작 사건은 이렇게 혈연마저도 짓이기는 잔혹함을 가졌다. 북한에서 찍었다는 사진(포렌식 결과 중국에서 찍은 것으로 확인), 유성씨가 북한을 다녀간 증거라는 출입경기록과 이를 뒷받침하는 출입경기록 발급 사실 확인서, 삼합변방검시창(출입국 사무소) 정황설명서 등 모두가 위조됐다.
 
가려씨는 오빠가 구속된 줄도 모르고 공포와 회유 속에 자백과 번복을 반복하며 중앙합동신문센터(현 북한이탈주민보호센터)에서 6개월을 보냈다. 카메라로 항상 감시를 당하는 독방에서다. 우성씨를 통해 최근 서울시 양천구 목동 CBS 본사에서 어렵사리 남매를 함께 인터뷰했다. 오빠는 2015년 10월 대법원 확정판결로 간첩누명을 완전히 벗었지만 가려씨는 아직도 악몽 같은 '국정원 수사관의 폭행'을 떠올리며 재판에 나가고 있다. 우성씨는 2019년 2월 국정원 수사관들을 고소했다. 추방된 가려씨가 5년 만에 돌아오기 두달 전쯤이다. 검찰은 공소시효 완성을 앞두고 지난해 3월에서야 기소했다. 가려씨는 6개월간 국정원에서 갇혀 지내는 동안 겪었던 고통에 울분을 토했다. 그는 특히 폭행을 가한 국정원 직원들에게 사과 한마디 듣지 못한 점에 대해 매우 분노했다.
 
2012년 11월 국정원 조사가 시작되고 하루 이틀은 가해자 중 한명인 유OO 수사관은 음료수 등을 챙겨주며 잘해줬다. 국정원 수사관들의 폭행은 가려씨로부터 탈북자가 아닌 재북 화교라는 자백을 끌어내기 위해서부터 시작됐다.
 
"처음에는 화교신분 조사가 있으면서 폭행을 당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맞기 시작했다. 어느 날 밥먹고 저녁에 여자 수사관인 유OO가 들어오면서 문건을 던지면서 '야 너 유가려 아니냐'라고 물어봤는데 말투가 안좋았다. 재북화교라고 말하면 안되니까 '저는 유광옥입니다'라고 했다. (유 수사관이) '북한에서 다 봤다는 사람이 있는데 아직도 아니냐'라고 해서 아니라고 하니까 두꺼운 문건으로 머리를 쳤다. 그래서 놀랐다. 유광옥이 맞다고 하니까 '북한에서 본 사람이 있다는데 '싸가지 없는 X년이 질기네' 이러면서 폭행이 시작됐다." <가려>
 
가려씨는 오빠가 이미 탈북자 신분으로 서울시 공무원으로 취업도 한 상태여서 화교신분이라고 밝힐 수가 없었다. 혹여라 어렵게 남한에 정착한 오빠가 불이익을 당하거나 추방당할까봐서다. 유광옥은 오빠가 사전에 알려준 이름이다.
 
수사관들은 간첩혐의를 인정하지 않으면 머리채를 잡고, 머리를 벽에 찧고, 구둣발로 찼다. 기진맥진해서 쓰러져 앉아 있는 그를 전기고문실로 데려가겠다고 겁을 주며 끌고가기도 했다. 박OO 수사관은 가려씨를 심하게 폭행한 후 "너무 때려서 손바닥이 아프다"며 교대를 했다는 게 가려씨의 기억이다. 너무 맞아서 나중에는 머리에서 윙하는 소리가 났다.
 
국가정보원. 윤창원 기자국가정보원. 윤창원 기자
국정원은 '화교'라는 실토를 받아내기 위해 폭행을 자행했지만,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국정원은 2007년부터 오빠 우성씨 주변을 탐문하기 시작했고, 검찰은 2010년 7월 그의 남북협력교류협력법 위반에 대해 불기소 처분했다.
 
"2011년 5월경에 서울시에서 일한지 3개월이 지나서 국정원 대북파트 직원이 접근해서 재북 화교라는 신분을 이용해서 (북한) 자료를 받아달라고 요구했다. (가족이) 동생하고 아빠 밖에 없는데 위험에 처하게 할 수는 없었다."
 
국정원 직원이 이미 그의 신분을 알고 대북 간첩을 제안했다는 것이다. 그는 도와주겠다는 국정원 직원의 말에 동생을 남한으로 데려왔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잘 부탁한다'며 문자를 보내기도 했다.
 
"2007년 인가, 2008년 인가 일 년간 (국정원) 조사를 받았다. 이 부분(화교신분)을 몰라서 (국정원 수사관들이 가려를) 조사를 한 것 같지는 않고 (간첩으로) 조작하는 데 활용한 것 같다. 가려를 (심리적으로) 제압해야 하는데 처음에 기를 꺾고 원하는 진술을 받아내기 위해서 그런 형태로 조사한 것 같다." <우성>
 
수사관들은 폭행.폭언으로 심리적으로 위축된 가려씨에게 필요한 대답을 뽑아냈다. 오빠가 북한을 오간 횟수가 갈수록 줄어 든 것이 대표적인 예다.
 
"처음에는 서른 몇 번 나오다가 자료 가져와서 '이렇게 많이는 아니고 스물 몇 번 갔다 왔다'고 해서 저는 '예 예 예'라고 (대답만 해서) 진술서가 다 바뀌어졌다. 그래서 나중에서는 5,6번으로 줄었다. '이때 간 거 같은 데 아니냐', '이때는 안 간 것 같은 데 맞지 않냐'라고 물어서 ' 네' 그러면 빼고…수사관들이 원하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넣고 뺐다." <가려>
 
오빠에 대한 검찰의 공소장을 보면 가려씨도 간첩 공범이다. 중국 길림성 연길시의 한 PC방에서 메신저로 받은 탈북자 명단 자료를 USB에 담아 북한 보위부에 전달한 것이 가려씨다. 또 가려씨는 북한 보위부로부터 명령을 받고 이를 오빠에게 전달했다. 가려씨도 자백한 부분이기도 하다.
 
그런데 검찰은 유독 우성씨만 기소했다. 왜 그랬을까. 우성씨는 가려씨를 따로 국정원에 구금시켜 진술이 번복되는 걸 막기 위해서라고 봤다.
 
서울시 간첩 조작 사건의 피해자 유가려씨와 오빠 유우성씨. 노컷브이 영상 캡처서울시 간첩 조작 사건의 피해자 유가려씨와 오빠 유우성씨. 노컷브이 영상 캡처
"증거라면 오직 동생 자백 밖에 없었다. 가려씨가 구속되는 경우에는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입맛에 맞는 진술을 얻을 수도 없고, (진술을) 바꿀 수도 없는 것이다. 같이 기소하면 변호사가 양쪽을 다 접견할 수 있고, 대질도 가능해지고 그러면 굳이 기소까지 안가도 진실이 밝혀질 수 있다. 검찰 조사 과정에서도 가려랑 대질을 하자고 첫날부터 요구했지만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우성>

 
가려씨는 2013년 3월 증거보전 재판에서 오빠를 보고 깜짝 놀랐다. 오빠가 자백을 한 후 집을 오가면서 편하게 조사를 받고 있다고 들었는데 죄수복을 입고 수갑을 찬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사실대로 말하고 싶었지만 가족의 신변이 걱정돼 입을 열수가 없었다. "우리(국정원)가 중국에 특파원이 있기 때문에 아빠도 위험할 수 있다는 식"의 수사관 말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때는 너무 황당했다. 근데 그 자리에서 사실 다 아니라고 얘기하고 싶었는데 얘기를 하면 나중에 국정원에서 우리 가족하고 아버님이랑 해칠까봐 무섭고…나중에 국정원에 다시 들어가면 그 사람들이 날 어떻게 만들지, 죽여 버리지 않을지 (무서웠다). 그때는 진짜 육체만 살아있을 뿐이지 너무 무섭고 공포스럽고 하루하루 버텨내기가 힘들어서 그 안에서도 막 죽으려고 자살 시도도 했다." <가려>
 
국정원에서는 간첩을 시인하면 짧은 시간만 복역하고 경제적으로 잘 살게 해주겠다고 회유했다.
 
"교화(소에서) 7, 8년 살아야하는데 진술을 잘하면 짧게 살고 나오게 해주겠다고 그러면서 황장엽, 김현희 얘기하면서 지금은 나라에서 집까지 마련해줘서 잘 살고 있다고 했다." <가려>
 
가려씨는 국정원 독방에서 카메라로 24시간 감시를 받으면서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인터뷰 도중에 그녀는 북받쳐 오르는 감정에 눈물을 머금었다.
 
"제 방에 보면 항상 카메라가 있다. 24시간 지켜보고 있다. 화장실 가거나 움직이면 카메라가 절 따라 움직인다. 쭈욱 쭈욱 따라오는 게 보인다. 한번은 날 감시하는 게 너무 싫어 종이에 물을 묻혀서 붙여 놨다. 나중에 그 유OO 수사관이 들어와서 다시 뗐다. 하루에도 열댓 번 죽고 싶다 이대로 누워 자다가(라는 생각을 했다). 조사가 끝나서 독방에 돌아와서 자는 시간이 제일 행복한 시간이었다. 저한테는. 제일 행복한 시간이었고. 깨어나지 않고 엄마 계신 데로 가서 같이 사는 게…" <가려>
 
죽음의 공포도 느꼈다.
 
"진짜 살아가는 게 의식 없는 송장 같았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고, 그 사람들이 언제 날 어떻게 할지도 모르고."<가려>
 
독방은 화장실 칸막이가 낮은 데다 카메리가 항상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어 마음 놓고 샤워도 못했다. 독방은 안에서 문을 잠글 수도 없었다.
 
"독방에 화장실을 보면 불투명한 비닐 벽지 같은 거로 한둘레 붙여놨는데 서 있게 되면 제 온몸이 다 보인다. 서 있게 되면 카메라로 다 보인다. 변기 뒤에 숨어서 쪼그리고 샤워를 했다. 독방 문은 밖에서 수사관들이 열수 있고 안에서는 열수가 없다. 카드들 대야 자동으로 열린다."<가려>
 
서울시 간첩 조작 사건의 피해자인 유가려씨(오른쪽)와 오빠 유우성씨. 노컷브이 영상 캡처서울시 간첩 조작 사건의 피해자인 유가려씨(오른쪽)와 오빠 유우성씨. 노컷브이 영상 캡처
가려씨는 국정원에서 당한 폭행과 욕설로 공황장애에 시달리고 있다. 밝았던 성격도 어두워졌고 화를 잘 참지 못하게 됐다. 시민단체 '민들레'를 통해 도움을 받고 있지만, 호전되지 않아 병원 치료를 받을 예정이다.
 
"가장 많은 변화가 화가 많아 졌어요. 가만히 있다가 혼자 소리 지르고 '왜 그러냐' 물어보면 갑자기 가슴이 답답하고 화가 나서 그런다고 대답하거든요. <우성>
 
가려씨는 지난 달 18일 재판에서 호흡이 어려워 증언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의료진의 도움을 받았지만 결국 울며 법정을 나서야 했다.
 
"(국정원에서) 조사받던 옛날 기억을 떠올려야 해서 몸이 반응한다. 순간에 심장이 갑갑하고 숨이 안 올라온다. 얘기를 해야겠는데 꾹꾹꾹 막히니까 말이 안 올라오고 몸이 막 강직(경직)이 왔다. 옆에서 새언니가 풀어줬다. 뭔가가 꽉 찔려서 배긴 것을 뽑아 버리고 싶다. 이게 8년 동안 안 되니까 분노조절이 안 되더라. 8년 동안 쌓여서."<가려>
 
오빠와 함께 정착하러 온 지난 8년은 기억에서 없애고 싶은 시간이다. 더욱 가려씨를 분노케 한 것은 재판 중인 수사관들의 태도다.
 
"가장 불공평한 게 뭐냐면 8년 동안 진짜 기나긴 시간이었거든요. 지금까지 재판받으면서 조사관들이 한마디도 '잘못했다', '반성한다'(는 말이 없다.) 하다못해 재판 끝나고 지나가는 데 저를 쏘아봤다. 제가 죄인인 것처럼. 그걸 보고 깜짝 놀랐다. 자기네가 죄를 지어놓고 그러면 미안해하고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게 정상 아닌가요? 그게 더 악이 나게 했다."<가려>
 
서울시 간첩조작 사건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국정원 대공수사국장 등 4명은 처벌을 받았지만 조직적 조작.은폐의 윗선은 제대로 밝히지 못했다, 수사를 담당한 검사 5명은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
 
"간첩조작 사건은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는 없는 것 같다. 간첩조작 사건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까 의문이다. 처벌을 통해 바로 잡아야하는데 그렇지 못하니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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