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할머니 보고 계신가요?' 안창림이 26일 일본 도쿄 지요다구 무도관에서 열린 도쿄올림픽 유도 남자 73kg급 시상식에서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도쿄=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2020 도쿄올림픽 유도 남자 73kg급 경기가 열린 26일 도쿄 일본무도관. 안창림(27·KH그룹 필룩스)이 금메달만큼 값진 동메달을 수확해냈습니다.
동메달 결정전에서 루스탐 오루조프(아제르바이잔)를 경기 종료 7초 전 업어치기 절반으로 눌렀습니다. 2016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 당시 강력한 금메달 후보로 꼽히다 16강에서 탈락한 아쉬움을 털었습니다.
바랐던 금메달은 아니었지만 그 과정이 너무나 힘겨웠기에 충분히 박수를 받을 만합니다. 안창림은 이날 32강전부터 4강전까지 4경기 연속 연장전을 치렀습니다. 정규 시간 4분의 거의 두 배에 이르는 경기를 펼치며 체력이 완전히 바닥이 났습니다.
여기에 16강전에서는 그야말로 혈투를 펼쳤습니다. 키크마틸로크 투라에프(우즈베키스탄)를 공격하다 부딪혀 코피까지 난 겁니다. 경기를 마친 안창림의 얼굴은 그야말로 상처투성이, 영광의 메달이었습니다.
26일 일본 도쿄 지요다구 무도관에서 열린 도쿄올림픽 유도 남자 73kg급 16강전에서 안창림이 키크마틸로크 투라에프(우즈베키스탄)와 경기 중 코피를 흘리고 있다. 연합뉴스경기 후 인터뷰도 멋졌습니다. 안창림은 '일본 귀화 제의를 뿌리친 데 대해 아직도 후회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재일동포 3세인 안창림은 학창 시절 일본 전국 대회를 제패하며 유망주로 주목을 받았고, 소속 대학팀 감독으로부터 귀화 제의를 받았습니다. 안창림은 주저 없이 "후회하지 않는다"고 답했습니다.
안창림은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목숨을 걸고 지킨 국적"이라는 겁니다. "일본에서는 재일교포가 어려운 입장으로 일본에서는 한국 사람으로, 한국에서도 일본 사람으로 부르는 경우가 있는 게 사실"이라며 현실을 털어놓기도 했지만 선택은 언제나 한국이었다는 안창림입니다.
한국 취재진과 인터뷰를 마친 안창림은 뒤이어 일본 기자들의 질문도 받았습니다. 안창림은 유창한 일본어로 "동메달이라는 결과가 납득이 가지 않는다"면서도 "하루하루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는 없다"고 답했습니다. 국내 기자들에게는 우리 말로, 일본 기자들에게는 친절하게 일본어로 답한 겁니다.
안창림의 인터뷰를 마치고 나니 문득 전날 일본 여자 테니스 대표 오사카 나오미(24)의 인터뷰가 떠올랐습니다. 아이티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를 둔 오사카는 일본이 자랑하는 스타입니다. 테니스 메이저 대회에서 4번이나 우승한 세계 랭킹 2위로, 1년 수입 6000만 달러(약 690억 원)로 전 세계 여자 선수 중 최고입니다.
오사카는 25일 여자 단식 1회전에서 낙승을 거뒀습니다. 정싸이싸이(52위·중국)를 1시간 27분 만에 2 대 0(6-1 6-4)으로 완파했습니다. 세계 랭킹 1위 애슐리 바티(호주)가 충격의 1회전 탈락의 쓴잔을 맛본 가운데 강력한 우승 후보임을 입증했습니다.
오사카 나오미가 25일 도쿄올림픽 테니스 여자 단식 1회전을 마친 뒤 취재진과 인터뷰하는 모습. 도쿄=노컷뉴스이어진 인터뷰에는 수십 명의 취재진이 몰렸습니다. 오사카는 올해 메이저 대회인 프랑스오픈 당시 우울증을 호소하며 인터뷰를 거부한 끝에 대회를 기권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이날은 환한 표정으로 "거의 2년 만에 도쿄에서 경기하고 생애 첫 올림픽이라 정말 긴장했다"면서 "하지만 상대가 강했음에도 이길 수 있어 기쁘다"고 소감을 밝혔습니다.
그런데 오사카의 인터뷰에서 조금 이상한 점을 느꼈습니다. 일본 기자들의 일본어 질문에도 오사카는 영어로 답했던 겁니다. 물론 오사카는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미국에서 자랐습니다. 영어가 사실상 모국어인 겁니다.
하지만 오사카는 최근 자신의 SNS 등을 통해 잡지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스윔 수트'에 실린 자신의 수영복 화보를 올리면서 해당 잡지의 수영복 모델로 나선 첫 아이티인이자 일본인 여성이라는 글을 붙였습니다. 일본인 여성이라는 자부심이 엿보이는데 정작 인터뷰에서는 일본어를 하지 못하는 역설적 상황.
오사카는 그동안 인종 차별이나 스포츠계 남녀 차별 등 민감한 사안에 대해 자신의 신념을 확실하게 밝혀 칭찬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비난의 목소리가 더 큰 게 사실입니다. 특히 우울증으로 인터뷰를 거부한다면서 과감한 수영복 사진 촬영을 하는 데 대해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입니다. 미국의 정치 평론가 클레이 트래비스와 유명 앵커 메긴 켈리 등은 오사카의 이중적 태도를 비판했습니다.
자신의 수영복 화보를 올린 오사카 나오미의 트위터. 해당 잡지 커버에 실린 첫 아이티인과 일본 여성이라는 문구도 넣었다. 오사카 트위터 캡처
그 때문인지 오사카의 영어 인터뷰도 이상하게 마음에 걸린 것 같습니다. 오사카는 수입 중의 대부분이 일본 기업의 후원입니다. 일본 최대 항공사 전일본공수(ANA), 라멘 회사 닛신식품 등입니다. 그러나 오사카는 일본어를 잘 하지 못하는 상황이 살짝 어색하게 느껴진 겁니다.
물론 오사카는 일본인 어머니의 피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미국 백인 경찰의 흑인 남성 총격 사건 때 오사카는 "나도 흑인 여성"이라며 대회 보이콧을 선언하기도 했습니다.(지난해 8월 여자프로테니스(WTA) 투어 웨스턴 & 서던 오픈 4강전인데 이후 오사카는 보이콧을 번복하고 출전하기로 했습니다.)
일본인 여성이면서 동시에 흑인 여성. 물론 맞는 말이지만 이해 관계에 따라 내세우는 부분도 다르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특히 모든 선수가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인터뷰는 거부했던 오사카가 수영복 화보는 촬영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또 그걸 자랑스럽게 SNS에 올렸기 때문에 더 그렇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선택적 정의'라는 말이 떠오르는 이윱니다.
그런 점에서 꿋꿋했던 안창림의 인터뷰가 더 빛이 나는 느낌입니다. 조부모께서 목숨을 걸고 지켰던 대한민국 국적을 선택한 데 있어 후회는 전혀 없었다는 답변을 우리 말로 또렷하게 들으니 가슴이 웅장해지더군요. 안창림은 다시 자랑스러운 태극 마크를 달고 혼성 단체전 메달을 위해 나섭니다.
P.S-안창림은 인터뷰 말미에 올림픽 메달에 따른 병역 혜택에 대해서도 확실한 견해를 밝혔습니다. 안창림은 "주위에서 병역 면제를 받기 위해서라도 꼭 메달을 따야 한다고 하더라"면서 "그런데 나는 병역 때문에 메달을 딴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그저 순수하게 메달 그 자체를 원한다는 겁니다. 안창림은 "나는 정말 금메달을 바랐기 때문에 운동을 했지 군대에 가지 않겠다는 목적은 없었다"고 강조했습니다. 시원시원한 안창림의 답변, 대한민국 남자 맞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