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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B컷]친족성폭력 피해자가 재판에서 겪은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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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수사보다는 재판을, 법률가들의 자극적인 한 마디 보다 법정 안의 공기를 읽고 싶어 하는 분들에게 드립니다. '법정B컷'은 매일 쏟아지는 'A컷' 기사에 다 담지 못한 법정의 장면을 생생히 전달하는 공간입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지만 중요한 재판, 모두가 주목하지만 누구도 포착하지 못한 재판의 하이라이트들을 충실히 보도하겠습니다.

피해자, 법정서 가해자와 분리 요구 못해
혐의와 무관한 '2차 가해' 증인신문도 견뎌야
오래전 성폭력, 정신적 상해 입증도 어려워



"제가 멘탈이 좀 강해요."
   
친족 성폭력 가해자의 재판을 직접 보러 온 피해자 A씨를 보고, 주변에서 "힘드시지 않냐" 묻자 그가 피식 웃으며 한 말입니다. A씨는 법정 앞 복도에서 무던한 대화를 몇 마디 나누다 곧 법정으로 향했습니다. 꽤나 초연하고 당당해보였습니다.
   
이미 방청석 뒷좌석에는 불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는 가해자와 변호인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A씨는 그들을 한 차례 지긋이 노려보기도 했습니다. 마스크를 써 얼굴의 절반이 가려졌지만, 겁을 먹었거나 수치심 따위는 느껴지지 않는 눈빛이었습니다.
   
그러나 20분이 채 넘지 않은 짧은 재판이 끝나고, A씨는 법정을 나서지 못한 채 끅끅 소리를 내며 울었습니다. A씨의 어머니와 친언니, 연대방청을 온 여성들이 가만히 곁을 지키고 한참이 지나서야 진정이 됐죠.
   
강제추행치상으로 기소된 가해자에게 1심에서 면소·무죄 판결이 선고된 후 지난 9일 서울고법 형사10부(이재희 부장판사)에서 열린 항소심 첫 재판 날의 장면입니다.

오늘 법정B컷은 12년 동안 사촌오빠에게 지속적인 성추행을 당한 A씨가 성인이 돼 고소를 한 후 재판에서 겪은 일들을 소개하려 합니다. 우선 A씨의 어린 시절 어떤 일이 있었는지부터 보겠습니다. 재구성하기보다는 A씨의 말을 직접 들려드리려 합니다.
 

성폭력과 관련한 가장 처음의 기억은 무엇인가요?

"1996년. 제가 6살 때였습니다. 사촌오빠가 자기 성기를 꺼내 보여줬던 게 기억납니다. 저보다 1살 많아요. 그땐 가해자도 어렸지만, 그걸 시작으로 2007년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거의 매해 명절 등 친가 가족 모임이 있을 때마다 저를 추행했습니다."
   

성추행은 주로 어떤 식이었나요?

"늦은 밤이나 새벽 시간대, 주변에 자는 사람이 있는지, 제가 잠을 자고 있는지 확인을 한 후에 기습적으로 이뤄졌습니다. 제 가슴을 만지거나 자신의 성기나 자위하는 모습을 억지로 제가 보게 하는 식이었어요."
 

그 시기를 어떻게 지나왔나요?

"어린 시절 저는 제가 잠이 들었기 때문에 그런 일을 당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스스로를 가장 많이 자책했어요. 졸려도 어떻게든 안자고 버텼지만 저를 수시로 확인하러 오는 사촌오빠는 공포 그 자체였고 커가면서 그가 하는 짓이 뭔지 알게 됐습니다. 그렇게 심각한 불면증이 생겼어요. 결국 고등학교 입학 두 달 후 수면장애와 우울증으로 학교를 자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현재도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PTSD)와 공황장애, 우울장애를 앓고 있습니다."
   
A씨는 1996년부터 성추행이 있었다고 주장했지만, 공소시효가 남은 2005~2007년 사이의 사건만 기소됐습니다. 그것만 해도 10차례입니다. 성인이 된 후 해외로 떠났던 A씨는 2017년 세계적으로 미투(Me Too) 운동이 본격화되면서 소송을 결심하게 됐고, 스스로 경제적인 여력을 갖추게 된 2020년이 돼서야 비로소 가해자를 고소했습니다.
   

고소 전후 상황은 어땠나요?

"처음에 여성단체에 상담부터 하려고 통화를 시도했는데 왜인지 이리저리 전화만 돌며 연결이 잘 되지 않았어요. 한 여름날 카페에 앉아 "제가 사촌오빠에게 성추행을 당했는데요…."라는 말만 최소 15번은 했던 기억이 나요. 제대로 상담받기 까지 4시간이 걸렸죠. 경찰에 소장을 접수할 때도 관할 등의 문제로 여기저기 떠돌아야 했고요. 결국 서울남부지검에 직고소를 해서 간신히 수사가 진행됐고 가해자를 법정에 세울 수 있었습니다."
   

수사 과정에선 문제가 없었나요?

"제 경우엔 다행히 수사 자체에선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수사 중 제가 제출했던 미국 집과 직장 주소, 여권과 출입국 기록, 병원 기록, 대학교 재적증명서 등 민감한 개인정보 일부가 비실명처리 되지 않은 채 가해자 측에 전달됐더라고요. 검찰 열람·복사실에 이 문제를 따지고 드니 "친척이니까 (서로) 다 아는거 아니냐"고 했습니다. 저는 중범죄를 당한 피해자인데, 상식적으로 그 가해자와 친밀하게 주소와 연락처를 알고 지냈겠습니까? 국민신문고에 문제를 접수하고 약 5달이 지나서야 인권감독관에게 사과 전화를 받았습니다. 사과 받으면 뭐하나요. 저는 가해자나 그 가족이 언제든 저를 찾아낼 수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리게 됐습니다."

더 황당한 것은 A씨가 자신의 개인정보가 유출된 걸 알게 된 곳이 바로 법정이었다는 겁니다. A씨에 대한 증인신문 과정에서 가해자의 변호인이 A씨의 신상을 집요하게 캐는 질문들을 한 것이죠.  

▶ 2020.11.9. 피해자 증인신문 당시 A씨가 기억하는 피고인 변호인의 질문
"무슨 대학 무슨 과를 몇 년도에 다녔습니까?"
"미국인과 결혼했는데 성씨는 왜 안바뀐건가요?
"증인 미국에서 영주권 취득했습니까?"
"과거 독일에서 유학했다고 하는데, 출입국명부엔 중국에 머물렀던 걸로 나오는데 어떻게 된건가요?
"현재 ○○ 회사에 근무 중인데, 관련 자격증 있습니까?"

A씨의 신상과 관련한 자료가 법정 내 스크린에 띄워졌고 A씨는 아연실색하며 변호인의 질문을 들었습니다. 신상과 관련한 질문 상당수는 강제추행 피해와 직접 연관이 없는 내용이었습니다.

성범죄 사건에서 피해자에게 '
무고
할 동기'가 있는지는 재판부 판단의 중요 근거 중 하나입니다. 이 사건의 경우 해외에서 잘 살고 있던 피해자가 생계를 접고 한국에 들어와 가족 내에서의 부담까지 지면서 사촌오빠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는 이유를 쉽게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이에 가해자 측이 '피해자 흠집내기'를 통해 무고할 가능성이나 동기를 찾아내려 애쓴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질문은 A씨의 어머니와 친언니에게도 이어졌습니다.  

▶ 2020.12.8. 참고인 증인신문 당시 A씨 가족이 기억하는 피고인 변호인의 질문
-A씨 어머니
"'평상시 남편이 스킨십을 잘 하냐' 물어보더라고요. '신혼 때 단칸방에 산 적이 있냐'고도요. 불쾌한 질문들이었지만 성실히 답변했는데, 지나고 보니 'A의 아빠가 단칸방 시절 자신의 딸을 성추행 한 것을 A가 사촌오빠가 했다고 착각한 것 아니냐'는 의미로 물어본거더라고요. '과거 세탁소 하셨죠? 김밥집 하셨죠?'라고 묻기도 했어요. 가해자 측보다 가난한 저희가 열등감에 고소한 것은 아니냐는 식이죠. 우리가 피해자가 아니라 마치 가해자가 된 것 같았어요."
   
-A씨 친언니
"어머니에게도 '사위 이름 아냐' 물어보고 저에게도 '제부 이름 아냐. 동생과 같이 입국한거 맞냐' 이런 질문을 하더라고요. 어린 시절 일어난 친족 성폭력 사건에는 통상 녹취나 CCTV 같은 증거가 없으니 피해자가 진술로만 입증을 해야 해요. 그 신빙성을 깨기 위해 한 사람의 인생을 거짓덩어리로 만들려 하는거죠. … 이번 재판을 겪으면서 (공소시효 만료로 기소는 안됐지만) 저 역시 같은 가해자에게 성추행을 당한 적이 있다는 게 오히려 감사하게 여겨졌어요. 저라도 증거가 될 수 있으니까요."

피해자 증인신문 중 A씨는 "이게 관련이 있는 질문인가요?"라고 가해자 측에 반문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재판장은 "증인, 웬만한건 다 관련이 있어서 질문하는거니까. 만약 정 관련이 없으면 재판부에서 제지를 하겠습니다"라며 오히려 A씨의 입을 막았습니다.
   
이후로도 무례한 질문들이 계속 됐지만 재판장은 한 차례 "그런 질문은 공소사실과 관련이 있습니까?"라고 변호인을 제지하는 데 그쳤습니다. 검사와 피해자의 국선 변호인도 곧바로 제동을 걸지 않았습니다.

과거와 비교하면 성폭력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 보호에 대한 문제의식이 커졌다고는 하지만, A씨는 4시간이 훌쩍 넘게 이어진 증인신문 과정에서 명백히 2차 가해를 당했다고 호소했습니다.

추후 대응을 위해 곧바로 증인신문 녹취와 속기록 열람·복사를 신청했지만, 이마저도 1심 선고를 며칠 앞두고서야 겨우 제공됐습니다. 형사재판에서 피해자는 재판의 직접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제때 재판자료를 받아보는 것조차 어려운 상황인 겁니다.

▶ 2021.4.15. 서울남부지법 강제추행치상 1심 선고 
"피해자는 수사기관에서부터 이 법정에 이르기까지 피해내용을 그 주요부분에서 일관되고 구체적으로 진술하고 있습니다. 범행의 경위와 수법, 전후 사정 등에 관한 진술 내용이 매우 구체적이고 명확하며, 당시의 상황적 특징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또한 피해자가 미국에서 생활하던 중 이 사건 고소를 위해 가족과 함께 귀국한 점이나 피해자가 피고인을 무고할 만한 뚜렷한 동기나 이유가 드러나지 않는 점, (피해자가) 법원에 증인으로 출석해 보여준 진술 태도 등을 종합해 보면 … 공소사실 중 일부 추행행위가 인정됩니다."

1심 재판부는 가해자의 강제추행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강제추행으로 인해 A씨가 정신적 상해를 입었다는 점까진 인정하기 어렵다며 강제추행치상엔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강제추행치상은 공소시효가 10년, 강제추행은 7년이어서 죄가 인정된 강제추행도 공소시효 만료로 면소(소송절차 종결)가 선고됐습니다. 피해자의 신고가 너무 늦어 처벌 할 수 없다는 겁니다.
   
검찰은 항소심에서 A씨가 고등학교 입학 후부터 지금까지 받아온 정신과 치료 관련 사실 등을 보강해 강제추행으로 인한 상해를 다시 입증할 계획입니다. 이미 A씨는 미국과 국내 대학병원 등에서 받은 진단서를 제출했지만, 1심은 "(피해 이후) 약 10년간 피해자의 행적이나 생활방식, 정서상태 등에 관한 정황자료가 없고, 강제추행이 아닌 다른 원인이 개입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인터뷰 끝에 A씨는 "이런 말은 정말 하기 싫지만 성범죄 재판에 대해 이만큼 적나라하게 알았다면 고소를 안했을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사실상 피해자가 재판을 받는 것처럼 느껴지는데도 공식적으로 피해자는 형사절차에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에 더욱 좌절하게 됐다는 것이죠.

항소심 재판부가 피해자의 상처를 조금이나마 치유해줄 수 있을까요? 피해자의 말을 재판부에 대신 보냅니다.
   
"정말 두 번 다시는, 다음 생에도 가해자를 보고 싶지 않아요. 그래도 재판이 제대로 돌아가는지 보려면 같은 방청석에서 가해자와 마주쳐야 해요. 증인신문을 받을 때가 아니면 차폐막도 요청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그런 배려는 기대도 하지 않아요. 끝내 처벌할 수 없대도 저는 최선을 다할 테니 판사님들도 그래주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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