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처럼 평범한 삶을 살아온 60대 박경민(가명)씨는 한 번도 자신이 경찰의 수사대상이 될 수 있다는 상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굳이 한 가지 특이점을 찾자면 장애가 있는 아들을 한 명 키우는 아빠라는 사실 정도일까. 하지만 그 역시 범죄의 구성요건은 전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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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경찰 수사…"무죄 확신해 변호인 선임도 못해"1일 경찰 등에 따르면, 지난해 말부터 사기 혐의로 수사를 받아온 박씨의 아내 이모씨는 지난 4월 26일 서울경찰청 반부패·공공범죄수사대로부터 '불송치'(혐의없음) 결정서를 받았다. 보험사를 상대로 사기를 쳐 의도적으로 많은 보험액을 타낸 범죄자 취급을 받으며 노심초사했던 시간이 '증거불충분'이라는 한 마디로 정리되는 현실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이들 부부가 처음 수사기관의 연락을 받은 것은 지난해 1월. 서울 종암경찰서는 "보험사와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치료를 너무 많이 받는다'고 조사 의뢰가 들어왔다"며 박씨와 이씨를 참고인으로 불러 조사했다. 자폐성 장애 1급인 아들 지훈(가명)군이 받아온 치료를 위해 보험사에 청구한 금액이 너무 크다는 이유였다. 종암서 소속 경위는 박씨 부부에게 '정말 그 횟수만큼 치료를 받았는지', '치료를 많이 받는 이유는 무엇인지' 등을 물었다.
께름칙했지만 단순한 해프닝일 거라 생각했던 일은 '사건'이 됐다. 약 11달 뒤인 지난해 12월 서울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지수대)는 박씨에게 통화내역과 카드 사용내역, 한의원 진료내역 등 치료 증빙자료를 요구했다. 당시 지수대 수사관은 '보험사가 수사를 의뢰했다'고 했지만 누군가의 고소·고발이 아닌 경찰의 자체 인지로 수사가 시작됐다는 사실을 금세 알게 됐다.
그리고 올 1월 서울청 지수대는 부부를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했다. 박씨는 "'주 교육당사자 1인'만 들어가야 한다고 해서 집사람만 (조사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조사는 이날 오전 11시부터 밤 9시까지 점심시간을 제외하고 꼬박 9시간 동안 이뤄졌다. 박씨는 "상황을 몰라서 변호사 선임도 돼있지 않았다. 집사람은 경찰 측에 (조사 시) 동영상 촬영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얘기했다"고 돌이켰다.
◇의료인 아닌 경찰이 침 효과 판단?…"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치료"
수사기관이 아내가 범죄자라는 확신을 갖고 몰아붙였다고도 토로했다. 이를테면 '엄마의 주관적인 판단으로 이런저런 치료를 너무 많이 받는 것 아니냐', '어떤 효과가 있는지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봐라', '침을 여러 번 맞으면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는 건 생각해 봤느냐', '보험료 편취를 위해 한의원에 다닌 건 아니냐' 등의 질문이 내내 이어졌다는 것이다.
"집사람이 혼자 들어가서 조사를 받으면서 윽박지르는 식의 취조로 너무 힘들었대요. '죄가 없으니까 괜찮겠지' 생각해서 변호사 선임도 하지 않았던 건데…아내가 조사 이후 밥도 잘 못 넘기고 잠도 이루지 못하는 등 너무 힘들어하고 불안해했어요. 이러다간 그냥 범죄인으로 몰리겠구나 싶어 급히 변호사를 선임했죠."
앞서 박씨는 지훈군이 생후 9개월이었던 지난 1999년 D 보험사의 어린이보험에 가입했다. 지인의 권유로 막연히 아들의 장래를 대비한다는 생각이었다. 박씨 부부는 보험료 월 2만 6400원을 10여년간 D사에 납부했다. 추후 치료금액의 청구근거가 된 특약('피보험자가 장신장해 치료를 목적으로 통원 시 1회당 6만원')도 보험설계사의 추천을 받아 들었다고 했다. 당연하게도 아들의 장애를 '예견'하고 든 보험이 아니었다.
이후 지훈군은 성장과정에서 말을 전혀 하지 않고 사람과 눈을 맞추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박씨는 장난감 같은 물건에도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아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보고 2002년 병원에 지훈군을 데려갔다. 의사는 진료 후 '자폐성 발달장애' 판정을 내렸다. 2000년대 초반이었던 당시 자폐 또는 발달장애 관련정보를 얻기는 쉽지 않았다. 박씨 부부는 병원의 권유를 통해 2002년부터 지훈군과 서울대병원의 놀이프로그램을 처음 시작했다. 대기업을 다니던 박씨는 그해 직장도 그만뒀다.
복지관과 국립재활원, 사설 언어치료 등 부부는 발달장애 관련 치료와 교육을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실행했다. 박씨는 온·오프라인을 샅샅이 뒤져 아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을 만한 자료와 정보를 찾고 또 찾았다. "인터넷에서 '발달장애', '자폐'를 검색해 보면 한의원, 센터, 연구소 등의 광고가 잔뜩 떠요. 장애아를 둔 부모 입장에서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좋다는 것에 무조건 매달릴 수밖에 없어요."
2007년 방문한 한의원도 많지 않은 선택지 중 하나였다. '서울 어디에나 집 근처에 하나씩 있을 정도'로 접근성이 좋다는 점과 치료비용이 저렴하다는 점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 어린 시절일수록 외부 자극으로 인한 발달의 효과가 더 크다는 판단도 있었다. 박씨는 "우리 아들은 이제 키 178cm에 스물이 넘었지만 여전히 의사소통이 어렵다. 자신의 어려움이나 힘든 것을 (스스로) 판단하거나 표현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컸다"고 밝혔다. 수사기관의 요구처럼 침 치료 전후의 효과를 '객관적으로' 논증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효과가 없다고 하기도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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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외 학계서는 이미 치료효과 '입증'…실제 증상호전 체감박씨 부부를 대리한 최갑인 변호사는 올 2월 경찰에 제출한 의견서에서 유명 국제학술지 BMC에 게재된 경희대 한방병원 교수진의 논문 등을 들어 한방치료가 발달장애에 미치는 효과가 실재함을 강조했다.
최 변호사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Autism spectrum disorder·ASD) 관련 침 치료에 대한 외국 논문에서는 국내보다 해외에서 침 치료가 더욱 활발히 이뤄지고 있어 자폐 스펙트럼 장애아동의 약 40%가 침 치료를 받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고 보고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같은 해외논문 12편을 분석한 대한한방소아과학회지 기재 논문을 인용해 "재활치료만 받는 그룹보다 침 치료 또는 '침+재활' 복합치료를 받는 그룹이 증상 개선이 뚜렷하게 나타나 재활치료를 받는 아동들에게 침 치료를 병행하는 시도가 도움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고 설명했다.
꾸준히 침 치료를 받은 지훈군 또한 이러한 증상의 호전이 나타났다. 박씨 부부는 △유아기 당시 어떤 소리도 내지 못했던 지훈군이 침 치료를 하면서 소리를 내기 시작한 '발화'가 이뤄진 점 △보행 시 차로를 향해 뛰어드는 등 과격·과잉행동들이 개선된 점 △자해적 행동이 줄어든 점 등을 근거로 들었다. 최 변호사는 한의원들의 소견서를 첨부하며 "장애아동을 키우지 않는 비(非)장애인들에게는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겨질지 모르지만 장애아동을 키우는 부모와 아동 본인의 삶에는 엄청난 변화를 주는 효과였다"고 적었다.
경찰에서 문제 삼은 하루당 치료횟수에 오해가 있다는 점도 짚었다. 최 변호사는 "비장애인들에 대한 침 치료와 달리 발달·자폐 아동들에 대한 침 치료는 한 치료당 5~10분의 짧은 시간에 치료가 이뤄진다"며 "한의원 당 침 시술 부위와 방법들이 상이하기 때문에 장애자녀들을 위해 다양한 치료를 받게 하려 했던 것은 부모로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선택"이라고 변론했다.
대법 판례를 들어 설령 침 치료로 인한 부작용과 위험성이 실제로 존재한다 해도 이에 대한 입증·확인 의무는 환자가 아닌 의사 측에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 특히 박씨 부부의 경우, 지난 2012년 보험사와 이미 1일 치료가능횟수를 '4번'으로 제한하고 그 중 한의원 치료를 '3회'까지 인정하는 합의를 마쳤다는 사실도 강조했다. D사는 자체 실사를 통해 지훈군이 받은 치료에 상당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박씨에게 사과문을 보내기도 했다.
박씨는 "만약 저희가 치료를 안 간 횟수에 대해 (보험금을) 청구했다든지 등 그런 식의 조사가 있었다면 이해를 한다. 그런데 (보험사와) 합의한 대로 9년을 쭉 해왔는데 일체 고려를 안하고 '보험사기'라고 몰아가니 황당했다"고 말했다.
박씨 부부와 같이 입건돼 서울청의 수사를 받은 장애아동 부모들은 약 20명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됐다. 이 중 보험사와 한의원 치료횟수 등을 구체적으로 합의한 부모는 박씨 부부가 유일한 것으로 알려졌다.
◇"보험 도움 부인 안 해…장애아 키우기, 상상 못할 어려움"박씨는 아들을 양육하는 과정에서 받은 보험의 힘이 컸음을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그는 "보험으로 인해 큰 도움을 받은 것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건 굉장히 고마운 일"이라고 말했다.
다만 "주변에 비슷한 유형의 장애를 가진 아이로 인해 보험에 든 부모들이 모두 피의자가 된 것은 아니다"라며 "(경찰이) 일방적으로 수사하며 범인을 다루듯 해놓고 '불송치한다'는 종이 하나 달랑 보내는 걸 보니 선심 쓰는 것도 아니고 분하고 억울하다. 최소한 '본의 아니게 이러한 고초를 겪게 해 죄송하다'는 사과는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지훈군이 지난 2002년부터 지난해까지 받은 각종 치료비는 약 3억 4천만원에 이른다. 나이상 어엿한 성인이지만, 코로나19로 인해 치료나 외부활동은 더 어려워졌고 보험의 도움을 받을 수 없게 된 부모의 어깨는 더 무거워졌다. 박씨는 "대한민국에서 자폐성 장애아를 키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해당 부모가 아니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아이를 국가에서 오래 돌봐줄수록 부모도 살고 아이도 사는 거예요. 우리나라는 나이를 먹을수록 아이가 갈 데가 점점 없어져요. 지금은 무료로 운영되는 강북구 평생교육센터에 격일로 다니는데 이것도 3년 뒤면 끝나요. 그 이후론 집에만 하루종일 있어야 하는 건데 갑갑하죠. 국가가 장애인을 위한 교육 및 치료시설을 확충하고 좀 더 저렴한 비용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었으면 좋겠어요. 그런 시스템이 정말 없어요."
해당 사건을 대리한 최정규 변호사(경기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는 "(불송치는) 너무 당연한 결과인데 부당한 수사로 인해 하루하루 장애아동을 지키려 애쓴 부모들의 마음이 상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며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부모들은 문제제기를 하면 오히려 불이익이 돌아올까 공론화에 선뜻 나서기도 힘들었다"고 말했다. 또 근본적으로 장애자녀를 키우는 가정에 대한 몰이해, 공적 지원시스템의 부재가 총체적으로 반영된 사례라며 "불송치 결정만으로 덮을 수는 없는 사건"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