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고들기]"값도 모른 채 물건 넘겨"…한류, 관행에 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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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사-유료 플랫폼사 '선공급 후계약' 불합리 관행 만연
연말에 그해 공급가 협상…"조건 안 맞아도 계약할 수밖에"
회수금 예측 어려워 투자계획 수립 난항…콘텐츠 질↓ 우려
"공정·합리적인 계약문화 정착, 산업적 성장 위한 중요 과제"

드라마 촬영장 풍경. 자료사진

 

철 지난 관행이 한류 중심축으로 급부상한 영화·드라마·예능 등 이른바 'K콘텐츠' 도약에 제동을 건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값도 모른 채 물건을 넘기는 '선공급 후계약'이 만연한 탓에 콘텐츠 경쟁력을 한껏 끌어올릴 수 없다는 것이다. 시청자 눈높이를 맞추지 못하는 엔터테인먼트 콘텐츠 경쟁력 약화는 결국 악순환을 낳아 플랫폼 영향력 상실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도 인다.

해당 업계에 따르면 지상파·종편·보도채널·일반 방송채널사용사업자(PP)와 같은 콘텐츠 사업자는 IPTV·케이블·위성방송 등 유료방송사업자(플랫폼사)에 자사 콘텐츠를 먼저 공급하고 나중에 관련 계약을 맺는다. 그해 공급한 콘텐츠 가격을 연말에 협상하는 것인데, 거래 당사자 사이 조건을 합의하고 거래를 시작하는 통상적인 계약과는 거리가 멀다.

한 방송사 관계자는 "콘텐츠 투자액을 일부라도 거둬들여야 하는 방송사 입장에서는 가격 조건이 맞지 않더라도 계약을 할 수밖에 없는 후진적인 형태"라며 "이미 상품을 모두 공급한 터라 가격 협상력이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플랫폼사로부터 정당한 프로그램 사용료를 지급 받지 못하는데다 공급계약 중단도 하지 못하는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다"고 토로했다.

◇ 질 좋은 K콘텐츠, 넷플릭스 앞에 줄 서는데…

유료방송업계에 만연한 선공급 후계약 관행은, 넷플릭스로 대표되는 글로벌 OTT사들이 제작사 등에 콘텐츠료를 먼저 지급함으로써 안정적인 후속 사업·투자 환경을 만들어 주는 모습과 극명히 대비된다.

해당 관행이 개선되지 않을 경우 질 좋은 콘텐츠가 막대한 투자로 시장 지배력을 키우는 글로벌 OTT사에 몰리는 현상을 더욱 강화시킬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더욱이 이 관행은 콘텐츠 투자금 회수 규모 예측을 어렵게 만드는 탓에 선제적이고 공격적인 후속 투자 계획을 세우는 데 걸림돌로 작용한다는 비판을 산다. 이는 결국 콘텐츠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실제로 방송통신위원회가 발간한 '2020년 방송산업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2019년 기준으로 전체 매출 가운데 광고·협찬 매출이 지상파는 42%, 일반 PP는 59.3%에 달한다. 반면 유료 플랫폼사에 채널과 프로그램을 공급하고 받는 매출은 지상파 30.2%, 일반 PP 24.6%에 머문다.

드라마의 경우 회당 평균 제작비가 10여 년 전 약 3억원에서 최근 20억원을 훌쩍 넘긴 현실에서, 방송사들이 높아진 제작비를 충당하기 위해 간접광고(PPL)에 매달리는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시청자들 몰입을 방해함으로써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과도한 PPL 논란 이면에 자리한 현실이다.

◇ "갑보다 을이 리스크 떠안는 관행 여전"…기울어진 운동장

제작비를 안정적으로 회수하는 일은 콘텐츠 경쟁력 강화를 위한 후속 투자 계획 수립의 핵심 요소다. 하지만 불합리한 선공급 후계약 관행은 투자 위축, 제작 역량 저하 등을 초래해 콘텐츠 경쟁력을 약화시킬 것이라는 우려가 커진다.


정치권에서도 이를 법으로 금지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정필모 의원은 지난해 12월, 국민의힘 정희용 의원은 올해 4월 각각 선공급 후계약 금지 내용이 담긴 '방송법 일부 개정안'을 발의했다.

정필모 의원은 "플랫폼 사업자의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선공급 후계약의 불공정 관행 또한 지속되고 있다"며 "이로 인해 콘텐츠 사업자는 프로그램 사용료에 대한 수입 규모를 예측할 수 없어 새로운 형식의 콘텐츠에 대한 제작과 투자 계획을 수립하기 어려워 유료방송시장의 생태계 발전이 저해되고, 글로벌 시장 경쟁력 약화가 초래되고 있다"고 법안 제안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합리적인 계약 문화는 당사자 사이 동등한 합의를 이끌어내는 문제 해결 능력치를 대변한다고들 말한다. 이 점에서 한국 문화계 곳곳은 여전히 갑을 관계가 빚어내는 기울어진 운동장에 머무는 셈이다.

이동기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계약은 각자가 상대를 위해 해야 할 의무와 그 대가로 받아야 할 것에 대한 권리를 명확히 하는 일"이라며 "사전에 서로 의무와 권리 관계를 계약으로 명확히 해야만 그에 뒤따르는 거래도 효과적으로 실행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우리 사회 전반에는 이러한 합리적인 계약을 소홀히 하는 문화가 있기 때문에 여전히 공정하지 못한 관행들이 존재한다"며 "엔터테인먼트 산업 특성상 불확실성이 존재한다면 해당 계약서 안에 관련 조항을 넣어서 대비할 일이지, 계약 자체를 뒤로 미루는 행태는 합리적인 계약 관행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이어 "현재 국내 엔터테인먼트 산업 계약 관행을 보면 리스크 문제에 있어서 갑보다는 을이 떠안게 되는 형태인데, 갑과 을이 성과는 물론 리스크까지 공정하게 나눠 갖는 구조가 만들어지면 경쟁력 높은 투자 계획을 수립하는 데도 수월할 것"이라며 "수익성에 허덕이는 곳에서 성장을 위한 투자는 꿈꿀 수 없는 법이다. 해당 산업 성장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공정하고 합리적인 계약 문화 정착이 중요한 과제"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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