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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컷 리뷰]'자산어보' 흑백으로 길어 올린 시대의 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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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자산어보'(감독 이준익)

영화 '자산어보' 스틸컷.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제공

 

※ 스포일러 주의

잊혔던 실학자의 실학서를 흑과 백으로 길어 올렸다. 그렇게 자산어보를 집필한 정약전(1758~1816)과 그를 도왔던 창대라는 인물을 통해 한 시대를 돌아본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대와 개인이 가진 깊은 고민을 던진다. 영화 '자산어보'다.

'자산어보'는 흑산도로 유배된 후 책보다 바다가 궁금해진 학자 정약전(설경구)과 바다를 벗어나 출셋길에 오르고 싶은 청년 어부 창대(변요한)가 자산어보를 집필하며 벗이 되어가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큰 틀은 흑산도로 유배를 간 정약전이 창대를 만나 자산어보를 집필하는 과정이다. 성리학에서 벗어나 실학으로 나아가 백성이 스스로 서고 살 수 있도록 하려는 정약전, 그리고 성리학을 실천하는 것이 사람 사는 길이라 믿는 창대의 사상이 바둑판 위를 번갈아 오가는 흑돌과 백돌처럼 움직인다.

정약전과 창대뿐 아니라 정약전과 정약용, 성리학과 실학, 학문과 현실 등 인물과 인물, 사상과 사상의 차이가 주거니 받거니 자유로이 오간다. 그러나 어느 하나의 옳고 그름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영화 '자산어보' 스틸컷.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제공

 

정약전과 창대는 서로 다른 위치에서 역사의 흐름 속, 시대의 변곡점을 온몸으로 체험한 인물이다. 성리학이라는 위계질서와 신분 계급적 사회질서를 허물고 자산어보처럼 실용적인 사회 질서로 나아가는 과정을 거대한 사건이 아닌, 두 인물을 가까이에서 바라보며 이야기한다. 약전과 창대, 약전과 약용, 시대와 개인 사이를 오가는 이야기를 통해 말이다.

또한 바닷속 생물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본 약전처럼, 감독은 조선이라는 시대를 살았던 약전과 창대, 흑산도 주민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들여다본다. 그들의 관계는 위계와 학문적 성취를 넘어선 관계다. 그것은 정약전이 가고자 하는 길이자, 현재에서 바라봐도 울림을 주는 여정이다.

성리학이 나라의 근간이며 백성을 살리는 길이라 믿었던 창대는 자신의 믿음이 배신당하는 과정에서 진짜 백성의 삶, 그들을 착취하고 외면하는 양반과 관리들의 모습을 본다. 이 역시 우리네 현재를 돌아보게끔 만드는 대목이다. 사라진 건 사상만이 아니었고, 다른 것은 사상의 차이가 아니었다. 중심에 있어야 할 사람이 사라진 탓이다. 혼탁한 조선에서 잊힌 것은 백성이라 불리는 사람이었다.

영화 '자산어보' 스틸컷.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제공

 

책과 흑산도를 벗어나 마주한 현실을 통해 창대도, 관객도 다시금 정약전을 떠올리게 된다. 그가 창대에게 했던 말들, 창대를 통해 자연의 이치를 배우고 담아가던 일들, 창대와 유대 관계를 맺어가던 약전의 자취 그리고 흑산도 주민들의 삶을 거슬러 올라가게끔 만든다.

학문이란 무엇이며, 누굴 위한 것인지 그리고 백성을 위해 학문을 배운다는 것은 무엇이며, 이를 통해 실현하고자 하는 정책이란 누구를 위해 어떤 목적으로 하는 것인지 질문하고 고민하게 된다.

이는 정약전이 창대와 관계를 맺고, 자산어보를 집필하며 내내 이야기하고 부딪혔던 주제이기도 하다. 정치판에서 벗어나 살아 숨 쉬는 세계로 나온 사대부, 삶의 한 가운데서 책과 이상으로만 바라봤던 현실 정치에 발 들인 이의 관계 속에서 돌아봐야 할 이야기는 깊고 다양하다.

이처럼 영화 '자산어보'는 창대를 통해 개인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이 단지 욕망의 실현만이 아님을 웅변한다. 이것이 거대한 세계가 아닌 개개인을 조명하려 했던 이유인지도 모른다.

창대는, 정약전의 말마따나 주희의 성리학은 터득하지 못했어도, 바다와 그 속에 사는 생물들을 차분하게 빈틈없이 꼼꼼하게 살펴 생명의 원리를 터득한 인물이다. 창대뿐만이 아니라 삶을 통해 씨앗이 자라나는 토양의 중요성을 체득한 가거댁, 배우지 않아도 삶을 통해 세상의 이치를 경험한 흑산도 주민들은 세상의 원리를 세상 가까이에서 깊게 체화한 이들이다.

그렇기에 약전은 사서삼경을 통달했다는 이들보다 세상과 현실에 가까웠던 흑산도 주민들을 통해 자산어보의 시작을 봤고, 다시금 자산어보를 통해 스스로 세상을 살아나가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영화 '자산어보' 스틸컷.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제공

 

영화 '자산어보'는 격변의 시대를 살아간 정약전과 창대라는 두 인물을 통해, 이러한 이야기를 흑과 백의 농담(濃淡)을 이용해 그려낸다. 흑과 백이라는, 우리가 잊고 있었던 두 가지 색을 통해 미시적인 세계를 세밀하게, 그러면서도 묵직함만이 아니라 그 사이사이 여백을 주며 관객들이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한다.

컬러로 가득한 시대에 감독은 흑과 백의 가치를 스크린에 되살리고, 먹의 농담이 가진 선명성과 구체성을 통해 미시의 세계를 오롯이 그려냈다. 덕분에 정약전과 창대의 내면은 깊게 드러났고, 정약전이 자산어보에 담아내고자 했던, 흑산도가 알려준 자연의 가치가 유려하게 펼쳐졌다.

정약전과 창대, 가거댁을 연기한 설경구, 변요한, 이정은을 비롯한 차순배, 강기영, 최원영, 조우진 등 배우들의 연기 또한 흑의 농담과 여백의 미를 오가며 '자산어보'라는 작품을 멋들어지게 그려냈다.

126분 상영, 3월 31일 개봉, 12세 관람가.
영화 '자산어보' 포스터.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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