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보로 보는 한국사 ③]양보 거부한 안철수, 보수 대통령 각오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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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3-09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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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팍도사와 청춘콘서트로 차근차근 정치준비
2011년 양보는 대선 후보 되기 위한 판단인 듯
2012년 양보 이후 일주일 두문불출 논란되기도
2017년 대선 패인? 새정치 퇴색 & 정체성 혼란
바른미래당 창당했지만 계파 싸움으로 결국 실패
양보 아닌 정면승부 택한 이번 선거, 어떻게 될까?

■ 방송 : CBS 라디오 <김종대의 뉴스업=""> FM 98.1 (18:25~20:00)
■ 진행 : 김종대 (연세대 객원교수)
■ 대담 : 뉴스빙하 김민하, 뉴스화산 김수민, 차재원 부산가톨릭대 특임교수



◇ 김종대> 4월 보궐선거, 이제 후보 등록 불과 열흘 앞으로 다가왔네요. 각 당 후보들이 속속 결정되고 있죠? 이번 서울시장 선거 특집으로 우리 김종대의 뉴스업에서 특별한 코너 진행하고 있죠? 이름하여 후보로 보는 한국 현대사입니다. 벌써 세 번째 시간이네요. 이 시간 함께하기 위해서 특별히 모셨습니다. 차재원 부산가톨릭대 교수 안녕하세요.

◆ 차재원> 안녕하세요.

◇ 김종대> 그리고 변함없이 뉴스빙하, 뉴스화산 나오셨습니다. 오늘 소개할 주인공을 뉴스빙하가 소개해 주시죠.

◆ 김민하>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에 대해서 소개해 보겠습니다.

◇ 김종대> 알겠습니다. 안철수 후보가 오늘 주인공입니다. 정치 입문은 10년 정도밖에 안 됐지만 정말 이야깃거리가 많죠. 1부에서도 저희가 많이 이야기했어요. 퀵마우스 임경빈 작가가 안철수 후보의 정치 이력서. 먼저 그 전반기를 정리했습니다. 들어보시죠.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가 8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박종민 기자

 



◆ 임경빈> 모두의 이력서는 역사가 된다. 정치인 안철수의 정치약사. 1962년생 전직 의사, 컴퓨터 프로그래머, 벤처기업인, 대학 교수, 국회의원 그리고 대선후보. 거쳐온 직업이 다양한 만큼 얻어온 별명도 많은 정치인. 시작은 상큼한 청춘멘토였습니다. 아직 컴퓨터 바이러스라는 개념조차 생소하던 시절부터 백신을 개발해 무료 배포하면서 명성을 얻었고 이후에 회사가 대표적인 IT기업으로 성장하면서 벤처 성공신화의 대표 격이 됐습니다.

미국 유학과 경영대학원 교수를 거친 뒤 2009년 6월 드디어 화제의 방송 MBC 무릎팍도사에 출연, 겸손하고 소탈한 어찌 보면 좀 엉뚱해 보일 정도로 순수한 매력을 발산, 일약 대중적 스타로 떠올랐습니다. 이후 2011년 여름 시골의사 박경철 씨와 함께 청춘 콘서트로 전국을 돌면서 청춘멘토로 급부상, 이른바 안철수 현상의 시작입니다. 그 여세를 몰아 그해 9월 서울시장 재보궐선거에서 유력한 후보로 거론됐지만 박원순 변호사에게 아름다운 양보를 하면서 그의 당선에 기여했습니다.

두 번째 별명은 간철수입니다. 안풍은 18대 대선이 열린 2012년까지 이어졌는데 안철수의 생각이라는 책을 그의 최고의 베스트셀러로 만들면서 안풍의 힘을 한껏 끌어올린 뒤 대선 출마를 선언. 새누리당 박근혜, 민주통합당 문재인과 함께 3자 구도를 형성. 문재인 후보와 단일화 협상을 이어가다가 협상이 쉽지 않자 전격 대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대선일인 12월 19일에는 돌연 미국으로 떠나버립니다. 이 시기 대선에 출마할지 말지, 단일화를 할지 말지. 문재인 후보 지원 유세를 할지 말지 중요한 고비마다 확고한 입장을 밝히지 않는 캐릭터 때문에 간만 본다, 간철수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습니다.

그다음은 녹색 바람입니다. 2013년 서울 노원구병 재보궐선거에서 당선되면서 드디어 여의도에 입성. 2014년 민주당과 전격 합당을 선언하면서 새정치민주연합의 공동대표에 취임했습니다. 하지만 7.30 재보궐선거에서 참패. 그리고 2015년 연말에는 탈당. 2016년에는 국민의당을 창당하고 호남을 중심으로 돌풍을 일으키면서 38석을 얻어내 명실상부한 제3정당 구축에 성공합니다. 이른바 녹색 바람입니다. 이때까지가 정치인 안철수의 어쩌면 가장 빛나는 시기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 김종대> 굉장히 다이내믹하다, 이런 느낌을 주는 안철수 후보의 정치 이력 전반기 정리해 봤어요. 이때까지, 그러니까 2016년 국민의당 돌풍 때까지 안철수 후보의 이미지는 뭔가. 새로운 인물, 기존 정치를 반대하는 뭔가 새 정치의 이미지 아니었을까요? 어떻게 보십니까?

◆ 김민하> 그랬죠. 앞서 퀵마우스의 간지러운 목소리로 좀 들었는데. 과거에 저도 어렸을 때는 안철수 대표가 만든 V3 백신 프로그램으로 고장난 게임을 많이 고쳤거든요. 하여튼 저도 혜택을 많이 봤는데 그런 이미지가 있고 방금 들으신 무릎팍도사에서 굉장히 바른 생활 이미지와 함께 플러스 좀 엉뚱한 모습 이런 것들이 당시에 이명박 정권이었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이명박 전 대통령의 어떤 사익을 추구하는 모습 이런 것과 대비되면서 굉장히 깨끗하고 올바른 사람, 이런 이미지가 있었고.

그 외에 청춘콘서트 이런 데서도 좋은 얘기를 너무 많이 했기 때문에 제가 그때 공익근무요원을 하고 있었거든요. 제가 늦게 갔습니다, 공익근무요원을. 거의 30살 돼서 갔는데. 공익근무요원들이 보통 정치에 관심이 없잖아요. 그런데 그 당시에 다들 청춘콘서트 영상 같은 거 다운 받아가지고 돌려보고 그러더라고요. 그런 이미지가 그대로 정치권으로 왔기 때문에 그때는 정말 새 정치의 희망처럼 보였습니다.

◇ 김종대> 차 교수님도 비슷한가요?

◆ 차재원> 아까 무릎팍도사에 나왔던 부분을 보니까 본인이 바이러스 개발하다가 군대에 간 걸 가족들한테 알리지도 않고 갔다. 그 이야기가 그 뒤에 고등학교, 금성출판사 발행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상당히 화제가 됐었죠. 그런데 문제는 4년 뒤에 그 부분이 방송심의의 제재에 걸립니다.

◇ 김종대> 그래요?

◆ 차재원> 그게 왜 걸렸냐면 당시 변희재라는 분 있지 않습니까? 이분이 그때 안철수 당시 대표는 자신이 바이러스 한다고 해서 가족들한테 알리지 않고 갔다고 했는데 그 뒤에, 군대 가고 난 뒤에 안철수 대표가 상당히 뜨고 무릎팍도사 나오기 직전에 부인이 인터뷰한 내용에 보면 기차역까지 가서 전송해 줬다는 이야기가 나와요. 그렇기 때문에 이거는 좀 과장이 됐다. 그리고 또 그것 말고도 거짓말을 2개를 더 들고 와서 3개를 가지고 이걸 갖다가 방송심의위에다가 잘못됐다고 이야기를 한 거예요.

그래서 당시 이명박 정부 때네요. 이명박 정부 때 방심위에서 권고, 제재를 했죠. 그때 당시 한창 야당 방심위원들, 추천 방심위원들은 '아니, 예능 프로그램인데 너무 심의가 철저한 거 아니냐' 그럴 정도로 상당히 그러니까 논란이 됐던 그 부분이지만 어쨌든 당시 이 무릎팍도사 안철수 출연 부분이 그때 시청률이 16.6% 나왔어요. 상당히 많이 나왔죠. 그런데 그때...당시 최고 인기 가수인 조성모 씨가 그 앞에 나왔는데 14%밖에 안 됐거든요. 그러니까 상당히 히트를 치면서 아마 안철수라는 사람이 대중들에게 각인되면서 상당히 그때 상당히 새 정치 바람을 만드는 하나의 동력이 됐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차재원 부산가톨릭대 특임교수 (사진=김종대의 뉴스업)

 



◆ 김민하> 그런데 그전에는 아까 말씀드린 그 부분이 V3 프로그램을 만든 사람 그리고 이게 백신 프로그램을 만들었는데 의사도 하고 이런 사람이다라고까지는 알았는데 안철수라는 사람의 속내, 어떤 실체 이런 거는 사람들이 본 적은 없었거든요. 이제 언론 인터뷰라든지 이런 형태로 나오기는 했고 또 방송 프로그램에 사는 모습이 비쳐진 적은 있었습니다, 약간 성공시대 이런 느낌으로. 그런데 실제로 이렇게 자기가 자기 얘기를 하고 이런 것들은 많이 없었는데 무릎팍도사가 워낙 굉장히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기도 했기 때문에, 거기서 사람들이 좀 안철수라는 사람은 이런 이미지구나 많이 각인이 됐던 것 같아요.
청춘콘서트.

 


◇ 김종대> 그렇게 각인이 됐는데 그로부터 불과 2년도 채 안 된 것 같아요. 갑자기 정치로 이렇게 급선회를 한단 말입니다. 이게 무릎팍도사의 그 자산을 정치로 이렇게 급회전하는. 이거 어떻게 봤어야 될까요?

◆ 김수민> 저는 급회전은 아니고 점진적인 과정이었다라는 측면이 분명히 있는 것 같은데.

◇ 김종대> 그래요?

◆ 김수민> 사실 무릎팍도사에 출연한 시기가 좀 특이합니다. 2009년 6월이었거든요. 그 시기가 언제냐. 바로 지난달, 그 전달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망했던 날입니다.

◇ 김종대> 그렇군요.

◆ 김수민> 그런 어떤 정치적 공백 상태랄까요. 또 국민들의 허탈한 그런 상태에서 공교롭게도 그때 출연을 했었고 그리고 정치 선언하기 전에 여러 오마이뉴스라든지 이런 매체들을 통해서 자신의 어떤 정견? 경제민주화와 관련된 그런 얘기들을 했었어요. 삼성동물원, LG동물원이 문제다. 이런 발언들을 하면서 조금씩 정치적으로도 계속 주목을 받아오지 않았을까. 그사이에 아마 대중들 사이에서도 저 사람이 정치를 하면 어떨까, 이런 생각들을 또 했을 것 같습니다.

◇ 김종대> 본인도 그런 생각을 점진적으로 하고 있었던 걸까요?

◆ 김수민> 그거는 뭐 확실하게 밝혀진 바는 없겠지만 어쨌든 그런데 갑자기 비정치적인 인물이 정치적 인물이 되었다. 이렇게 얘기하는 거는 좀 실제하고는 거리는 있는 것 같아요.

◆ 차재원> 그런데 2011년 그때 보선 나오기 직전에 사실은 정치적 행보를 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2006년 6월달은 무릎팍도사에 나왔거든요. 그리고 2009년 그러니까 9월달에 차기 대선 여론조사를 했어요. 그때 당시에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전 대표가 45.9%였는데 안철수가 그때 38.3%였습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문재인 대통령이 정치를 할 생각이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야당에 있어서 일종의 마땅한 대안이 없었던 것이죠. 그러면서 상당히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서울시장 보선 전까지 뭘 하냐면 전국 돌면서 청춘콘서트를 하거든요. 청춘콘서트를 하면서 젊은이들한테 인기를 상당히 얻었죠. 그러니까 각 대학의 강당이 미어터진다는 표현이 진짜 모자랄 정도로 학생들한테 상당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거든요. 그러면서 그때부터 안철수 현상이라는 이야기가 서서히 나오기 시작했고 그때 때마침 서울시장 보궐선거라는 정치 이벤트가 딱 생긴 거예요. 그러니까 안철수라는 사람의 행보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는데 정치 참여할 수 있는 준비는 나름대로 해 놓은 셈이죠.

◆ 김민하> 그때 포인트가, 사람들이 받아들였던 포인트가 안철수 대표가 어쨌든 간에 첫째로 성공한 인물인 거 아니겠습니까. 어쨌든 의사를 하다가 어쨌든 안철수연구소라는 벤처기업을 운영하다가 어쨌든 성공한 인물이다. 성공한 인물로서 능력 있는 사람이다, 이 점과. 두 번째 그 능력을 가지고 어쨌든 좋은 일에 쓴 거잖아요. 저 같은 사람이 어렸을 때 게임을 고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줬기 때문에. 그래서 능력을 좋은 데 쓰는 사람 이게 또 정치에는, 정치에 당시에 요구됐던 리더십 이런 측면도 있어서 사실 지금 교수님 말씀하신 것처럼 이제 저 사람이 정치하면 어떨까 이런 생각도 있었지만 또 한쪽에서는 정치를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여론조사 해 보면.

◇ 김종대> 그렇죠.

◆ 김민하> 안철수 대표가 정치를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가 더 높게 나오기도 하고. 그런 좀 특성이 있는 그런 지지였던 것 같고. 그러다 보니까 그때 이명박 정권이었으니까 이명박 전 대통령이 그 당시에 안철수 대표에게 대권을 물려주지 않겠느냐. 이런 얘기 하는 평론가도 있고 막 이랬어요. 그때 좀 중요한 어떤 직책을 맡기도 하고 그랬거든요. 포스코 이사회라든지 이런 거. 논란이 계속해서 그때도 사실은 잠복돼 있었던 상황인데 워낙 캐릭터가 좋으니까 좀 여러모로 훌륭한 인물로서 많이 조명이 됐죠.

◇ 김종대> 그렇군요. 그런데 혜성처럼 등장한 순간이 언제냐. 그렇게 국민적 호감도 높고 지지율도 높았다가 바로 말씀하신 대로 서울시장 보궐선거입니다. 그런데 이 선거에서 박원순 후보에게 조건 없는 양보를 했습니다. 당시 음성 들어보겠습니다.

[안철수 후보 "그래서 제게 보여주신 기대 역시 온전히 저를 향한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리더십에 대한 변화의 열망이 저를 통해 표현된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저는 박 변호사님이 그동안 우리 사회를 위해서 헌신하면서 시민사회운동의 새로운 꽃을 피운 분으로서 서울시장직을 누구보다 더 잘 수행할 수 있는 아름답고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 김종대> 바로 이를 두고 안철수의 아름다운 양보라는 이름도 붙었죠. 그렇지만 당시 측근이라든가 평론가들 사이에서 여러 가지 해석들이 나왔어요. 어떤 이야기들 있었죠?

◆ 차재원> 일단 안철수 대표가 사실은 청춘콘서트를 통해서 많은 지금 관심도 받고 아마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하는 게 어떨까라고 이야기했지만 앞서 말씀하신 것처럼 주위에서 말리는 분위기도 분명히 있었거든요. 그런 상황에서 안철수 대표가 전격적으로 출마를 하겠다고, 오세훈 시장이 사퇴 선언하고 한 사흘 뒤에 그런 이야기를 했다고 그래요. 그러니까 아마 같이 돕는, 소위 말해서 멘토라는 분들이. 그러니까 윤여준 장관을 비롯한. 정치를 잘 아시는 분들이 말렸대요. 말렸는데 그랬는데도 강행하겠다는 뜻을 갖고 있다가 그러면서 그것이 제가 그때 기억하기로 중앙일보가 제일 먼저 특종을 냈던 것 같은데. 그러면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던 거죠.

그러고 나서 아마 나름대로 생각을 해 봤을 때 그다음에 있는 대선으로 바로 가는 것이 본인이 낫겠다는 판단을 했던 것 같아요. 그러면 이 패를 물려야 되는데 그럼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는 나름대로 고민이 많았다는 것이 그 뒤의 후일담이고, 후에 세계일보가 윤여준 전 장관의 말을 빌려서 이야기를 했는데 그 당시 윤여준 전 장관이 그러면 지금 양보하는 쪽으로 해서 나가는 것이 어떻겠느냐 그렇게 이야기를 했다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지금 그러니까 일단 세계일보가 옛날에 보도했던 측면이 있지만 진실인지 여부는 저는 확실히는 모릅니다마는 일단 제가 보도된 사실이 그런 사실이 있었다는 것만 말씀드리겠습니다.

◇ 김종대> 어쨌든 양보가 정치인으로서의 무게감을 더 키운 건 사실 아닙니까?

◆ 김민하> 그렇죠. 그때 설만 무성했는데 지금 말씀해 주셨듯이 원래는 국회의원을 나가라고 했는데 굳이 시장을 한다고 했다가 가족의 반대로 접었다든지. 그리고 실제로 어떤 정황이 있다든지 이런 얘기가 많았습니다마는 어쨌든 이때 대중들의 눈에 비친 것은 당시에 나가면 무조건 당선될 수 있는 후보가 자기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에게 지지율이 정말 안 나오는 박원순 당시 변호사에게 그냥 양보를 아무 조건 없이 해 준 거잖아요. 이때까지는 정치의 문법이라는 것은 누구에게 유리한가, 불리한가를 세세하게 따지고 내가 양보하면 나한테 뭘 줄 거냐를 막 이렇게 협상을 하고 그런 것들이 일반적으로 우리가 상상하는 정치의 문법인데 이건 조건 없이 '당신이 더 잘할 수 있으니 당신이 하시오 이렇게 양보를 하면서 내가 도와주겠소' 이렇게 한 것이기 때문에 저 사람은 기성 정치에 우리가 신물나는 그런 어떤 이해관계의 조정 이런 걸 떠나서 정말 대의를 위해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구나, 그런 어떤 여러 가지 이해관계의 족쇄가 없는 사람이구나. 이렇게 좀 각인이 되는 계기가 실제로 된 거죠.
시사평론가 김민하 (사진=김종대의 뉴스업)

 


◇ 김종대> 하긴 뭐 정치에서 양보라는 말이 가당키나 합니까? 정치에서.

◆ 김민하> 양보 없죠.

◇ 김종대> 그러니까 양보 자체가 또 하나의 정치가 되는 이런 어떤 몸집을 키운 안철수 후보. 그런데 또 한 번 양보를 합니다. 이제 양보의 아이콘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 계기. 바로 2012년 대선에서 문재인 당시 민주통합당 후보와 단일화 협상을 하다가 후보직을 사퇴한 것이죠. 당시 음성 들어보겠습니다.

[ 안철수 후보 "그러나 문재인 후보와 저는 의견을 좁히지 못했습니다. 제 마지막 중재안은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더 이상 단일화 방식을 놓고 대립하는 것은 국민에 대한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후보직을 내려놓겠습니다. 국민 여러분, 이제 단일후보는 문재인 후보입니다." ]

◇ 김종대> 예전에 박원순 시장한테 아름다운 양보라 그랬는데 이번 양보는 어떻던가요? 이것도 아름답다라는 얘기 나왔습니까?

◆ 김수민> 이거는 양보라기보다 포기에 더 가깝지 않았나, 이렇게 보여집니다. 이때 여론조사 흐름들을 좀 보면 한동안은 안철수 당시 후보가 여론조사에서 3자 구도 하면 2위를 했었거든요. 그런데 이게 단일화에 들어가면서 역전 현상이 일어납니다. 이게 노무현-정몽준 단일화 때도 똑같이 일어났는데 이런 경향이 있어요. 뭐냐 하면 안철수 후보가 좌우 양쪽의 지지를 좀 얻어서 2위가 된 거거든요, 처음에. 단일화에 막상 들어가게 되면 이를테면 민주당을 싫어했던 유권자들이 어? 단일화에 실망했다라고 떠나게 돼 있어요,안철수 후보 쪽을. 그리고 한편으로 호남이라든지 전통적 민주당 지지층은 어차피 단일화를 하기로 했으니까 마음을 이제 놓았다. 그런데 둘이 비교를 해 보니까 당선 가능성은 안철수 쪽이 높더라도 이왕이면 민주당 식구인 문재인 후보를 밀어주자, 이렇게 해서 표가 양쪽으로 흩어지게 돼 있습니다. 정몽준 후보도 그래서 노무현 후보한테 패배했던 측면이 있거든요.

똑같은 패턴을 밟아서 안철수 후보도 지지율이 처지기 시작합니다. 당시에. 그러면서 여론조사에서 실질적으로 보면 대다수가 3등으로 처지는 그렇지만 한편으로 가상 대결에서는 박근혜 후보에게 안철수 후보가 이기는 이중적인 결과가 있었던 거고 이것 때문에 단일화 협상이 계속 교착이 됐던 거죠. 그러다가 결국에는 시간에 쫓기고 더 이상의 여론조사를 실시할 수 있는 시일도 부족하고 이런 상황에서 자진해서 던지는 이런 길로 가게 됩니다.

◇ 김종대> 양보라기보다 포기에 가깝다.

◆ 차재원>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봤을 때는 당시 외형상으로는 아름다운 양보의 모양새는 취했죠. 왜냐하면 노무현, 정몽준 단일화처럼 일종의 그러니까 여론조사 대결을 한 것이 아니라 상당히 똑같은 정치적 딜레마를 문재인 후보도 갖고 있었잖아요. 그런데 문재인 후보가 포기를 하지 않고 안철수 후보가 먼저 던졌다는 그 자체는 상당히 그러니까 야권을 지지하고 그러니까 정권교체를 지지했던 유권자들 입장에서 보면 안철수의 아름다운 단일화라고 말할 수가 있는 거죠. 그런데 문제는 단일화에 동의하고 난 뒤에 이후의 행보가 문제였던 겁니다.

그러니까 흔쾌히 단일화에 응했다고 한다면 바로 그다음부터 바로 선거운동에 들어가는데 단일화에 합의하고 난 다음에 일주일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거든요. 그러면서 여러 가지 억측들이 벌어지기 시작하는 거죠. 물러난 지 일주일 뒤에 시내에 있는 한 한식당에서 두 사람이 만나서 그러니까 문재인 후보를 만나서 공식적으로 지지를 하면서 같이 유세를 다니기는 합니다마는 그러나 그것이 만약에 문재인 후보 승리로 끝났다고 한다면 여전히 안철수 후보의 아름다운 단일화로 이야기가 됐었겠지만 지고 나니까 그 패인 중의 하나가 왜 그걸 흔쾌히 해 놓고 일주일 동안 왜 안 나타났느냐 이런 식의 문재인 지지층들의 상당한 공격에 직면했던 것이죠.

그러니까 그런 측면에서 보면 사실 이왕 정권교체를 바라고 지금 단일화에 대해서 흔쾌히 승복을 했다고 한다면 사실 그 뒤의 행보도 좀 더 빨리 했다고 하면 포기가 아니라 진짜 아름다운 단일화로 훨씬 더 정치적 비중이 커질 수 있는 그런 아까운 찬스를 놓친...
2012년 당시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

 


◇ 김종대> 그러니까 왜 그랬을까요? 왜, 좀 적극적으로 돕지.

◆ 차재원> 사실은 당시에 안철수 후보 캠프를 진심캠프라고 그랬는데 진심캠프의 구성원 자체가 다국적군. 예를 들면 과거 한나라당 국회의원이었던 김성식 의원 같은 분들이 상당히... 물론 김성식 의원은 상당히 중도적이고 상당히 합리적인 모습을 갖고 있지만 예를 들면 지금 이태규 의원이라고 있지 않습니까? 이태규 의원이 사실은 MB정권의 기록관리비서관인가를 했어요.

◇ 김종대> 청와대 근무했죠.

◆ 차재원> 청와대 근무를 했죠. 그런 식으로 MB맨들도 들어와 있을 정도로 상당히 이합집산이었기 때문에 다국적군들이 일단 문재인 후보에 대한 흔쾌한 승복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안에서 참모들 상당수가 좋다, 그러니까 포기는 하지만 돕는 것까지는 나가서는 안 된다. 그래서는 당신이 완전히 민주당 사이드로 가버리면 중도의 가치가 사라질 수 있으니까 참아라라는 그런 또 이야기가 있었던 것이. 그런 여러 가지 문제들 때문에 상당히 결단하는 데 시간이 걸렸던 거죠.

◆ 김수민> 그런데 이게 어떻게 해도 욕을 먹는 게 지원 유세를 빨리 들어가버리면 이 선거는 후보도 아닌데 안철수 판이 돼버린다, 이런 지적을 또 받을 수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그렇게 빨리 유세에 안 들어간 것 자체는 크게 선거에 어떤 해악이 되거나 그런 건 아니었는데 어쨌든 지면 이렇게 되는 겁니다.

◇ 김종대> 하기는 옛날에 노무현 후보하고 단일화했던 정몽준 전 의원 같은 경우도 초기에 선거유세 안 나왔습니다.

◆ 김수민> 그랬었죠.

◇ 김종대> 거의 다 끝날 때 나왔어요.

◆ 김수민> 그리고 그때는 노무현 후보 지지층이 오히려 기다려줬어요. 지금 빨리 나올 필요가 있느냐, 나중에 좀 피크 때 나오는 게 낫겠다, 이런 얘기도 했었습니다.

◆ 김민하> 마음이 안 좋았을 수도 있어요, 안철수 대표가. 슬프니까. 일주일 쉬었을 수 있는 거죠.

◇ 김종대> (웃음) 마음이 편치 않아서. 2012년 대선 이후로 안철수 후보 정치인생이 격변하기 시작해요. 앞서 퀵마도 정리했죠. 창당, 탈당, 창당. 계속 거듭하면서 이제 위기에 부활에 아주 정치의 여러 가지 시련과 영광을 다 겪는단 말이죠. 이건 또 어떻게 보십니까?

◆ 차재원> 사실은 그 대목이 상당히 제가 생각했을 때는 안철수 대표의 정치인생에서 상당히 안타까운 대목인데. 본인이 2012년 대선을 포기하고 난 뒤에 2013년도에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지 않습니까, 노원병에. 당선되고 난 뒤에 본인이 자신의 정치세력을 꾸립니다. 그것이 새정치연합이죠. 새정치연합이라는 걸 창당준비위원회까지 구성해서 그 대회까지 마쳤는데 하루아침에 당시 민주당, 통합민주당이었죠. 통합민주당의 김한길 대표하고 만나서 전격적인 통합을 합당을 선언을 하거든요. 그러면서 두 당이 합쳐져서 새정치민주연합으로 만들어진 거죠.

그런데 그렇게 들어가서 제일 먼저 안철수 대표가 당시 스타일을 구긴 것이 뭐냐 하면 그때는 지방선거가 임박했었거든요. 2014년 지방선거 때 가령 공천을 하느냐 마느냐. 그러니까 기초의원들한테 공천하느냐 마느냐 그 부분 갖고 사실은 양당이 안 하기로 했는데 먼저 그때 당시 새누리당이 그걸 포기를 했어요. 그러니까 그때 새정치민주연합이, 새정련이 그걸 따라가야 되냐, 말아야 되느냐 상당히 할 때 안철수 대표는 상당히 원칙론을 갖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게 당내의 여러 가지 투표에 의해서 뒤집어집니다. 뒤집어지면서 결국은 민주계의 뜻대로 따라가게 되는 거죠. 그러면서 상당히 그때부터 정치적인 스타일을 많이 구기게 되는 그러한 모습을 보여줬죠. 그러니까 기성정당에 들어가서 장악한다는 게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아마 처음 느꼈을 거예요.

◆ 김민하> 그리고 그때 합당을 결의하는 과정에서도 잡음이 있었던 게 윤여준 전 장관이 그때 상당히 크게 반발을 하면서 거의 안철수 대표를 굉장히 강하게 비난을 하거든요. 앞에서 얘기와 뒤에서 얘기가 다르다.

◆ 김수민> 이자가 나를 속였다. 할리우드 배우감이다, 뭐 이런 얘기.

◆ 김민하> 다 연기였다. 뭐 이렇게까지 반응을 했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하고서 들어간 어쨌든 새정치민주연합이라는 조직을 꾸린 거였는데 거기서도 위력을 보여주지 못했고 그리고 2014년 7월달에 재보선이 이렇게 좀. 재보선에서 참패를 하면서 그때 지도부 총사퇴 이런 얘기가 막 나오고 하니까 그때 대표를 그만두고 그 이후에 사실상 조직을 쪼개고 이런 과정이 이어지는 거죠.

그런데 이게 그 내에서 사실 계속 싸워서 자기의 자리를 쟁취해 갔으면 또 스토리가 달랐을 텐데 이때 결국은 어쨌든 간에 새정치민주연합을 탈당하고 2016년에 국민의당을 창당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때 명분이 뭐였는가에 대해서 사실은 이때 사실은 그전까지 그게 아름다운 양보라든지 그다음에 어떤 정치적인 이해관계의 어떤 휩쓸리는 사람이 아니라든지 이런 좋은 이미지가, 종국에는 국민의당 창당하면서 상당 부분 무너졌다라고 저는 생각을 했어요. 왜냐하면 이때 자기가 대통령이 돼야겠다 그것 이상의 비전이 있었는가가 의문이었거든요. 그래서 결정적인 순간은 거기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 김종대> 이래서 조금 또 새정치의 신선한 이미지가 많이 훼손됐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이렇게 해서 1라운드 안철수의 정치적 행보 정리해 봤고요. 다음은 후반부 2막으로 넘어가겠습니다. 퀵마우스가 정리한 거 들어보시죠.

◆ 임경빈> 갑철수 그리고 MB 아바타.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그리고 이어진 2017년 제19대 대선. 국민의당 후보로 대선에 나선 안철수에게 그 뒤로 오랫동안 따라다닐 토론 못하는 안철수라는 이미지가 바로 이때 만들어졌습니다. 그 화려했던 별명 창조의 현장들 직접 들어보시죠.

[안철수 "문 후보께 묻겠습니다. 제가 갑철수입니까, 안철수입니까?"
문재인> 다시 한 번요.
안철수> 갑철수입니까, 안철수입니까? 제가 MB의 아바타입니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문재인> 항간에 그런 말도 있죠.

안철수> 지금 문 후보님 생각을 묻습니다. 제가 MB의 아바타입니까?

문재인> 그게 제 생각입니다.

유승민> 안 후보님께서 박지원 대표하고 초대 평양대사 이 장관에 대해서 이렇게 합의를 하셨습니까?

안철수> 참... 그만 좀 괴롭히십시오.

유승민> 아니, 이런 부분을 어떻게 안철수 후보하고 이야기도 안 하고 박지원 대표가 이렇게 얘기합니까?

◆ 안철수> 유 후보님 실망입니다.]

◆ 임경빈> 대선 투표일을 앞두고서는 일명 뚜벅이 유세까지 벌이며 분전했지만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에게도 밀리면서 3위로 낙선. 이후 다시 당대표에 도전해 국민의당 대표로 선출된 뒤 2018년 바른정당과 합당을 감행하면서 바른미래당을 창당합니다. 이 때문에 결국 정치적 기반이었던 호남과 결별을 하게 되죠.

그다음은 삼철수 시대입니다. 2018년 7년 전 양보했던 서울시장 선거에 도전. 하지만 박원순 시장에게는 물론이고 자유한국당 김문수 후보에게도 또다시 밀리며 이번에도 3위로 낙선. 연속 3위로 삼철수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이후 정치적 휴지기를 갖겠다며 독일로 출국했다가 미국을 거쳐 2020년 1월 정계 복귀를 선언. 이번에는 바른미래당을 탈당해서 우여곡절 끝에 상징색을 오렌지로 바꾼 국민의당을 창당했습니다.

2020년 총선, 이번에는 마라톤 유세에 나선 안철수. 하지만 오렌지식 국민의당은 녹색 국민의당만한 돌풍을 일으키지 못했고 지지율 6.8%를 얻으면서 3석으로 원내 제4당이 됐습니다. 그리고 2021년 안철수는 세 번째로 서울시장 선거 앞에 서 있습니다. 10년을 돌아온 그 자리에서 이번에는 어떤 별명이 아니, 어떤 결과가 안철수를 기다리고 있을까요.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

 



◇ 김종대> 안철수 후보의 정치사 2막. 왠지 좀 아쉬움과 실패의 연속인 것 같아요. 어떻게 보셨어요? 어떤 느낌.

◆ 김민하> 직전에 말씀드렸듯이 국민의당을 창당해서 성과는 좋았습니다. 국민의당을 창당한 거 자체는. 왜냐하면 제3당으로서의 위상을 굳건히 했는데. 이때 제 생각에는 이미 그동안에 가져왔던 정치적인 명분들이 많이 훼손된 상태였어요. 그래서 이때 호남에서 돌풍을 일으킨 것도 사실 뭐랄까, 정권 교체를 하기 위해서는 문재인 후보가 유리할 것이냐, 안철수 후보가 유리할 것이냐에 대한 판단을 호남이 했다. 이 결과로 보여줄 수 있는 측면이 있고 안철수의 정치적 비전에 동의한 거는 아니었다고 저는 생각을 하거든요. 그런데 그 여파가 이제 대선에서도 방금 들은, 우리가 들은 토론에서의 여러 가지 어떤 문제적인 발언들 이런 걸 통해서 그런 분위기가 더 배가된 거죠. 그래서 그 정치적 평가가 지금도 남아 있는 건데.

그런데 신기한 건 뭐냐 하면 이렇게 계속해서 정치적인 명분이나 이런 것들이 훼손돼 오고 무너져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안철수만큼 무언가를 했을 때 어떤 여론조사에서 어느 순간에 지지율이 이렇게 많이 나오는 정치인도 없다는 겁니다. 그건 참 신기한 대목이에요, 그게.

◇ 김종대> 신기한 대목인데요. 참 그만큼 변화무쌍했어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으로 이루어진 2017년 대선. 여기서 안철수 후보가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목소리 한번 듣고 가시죠.

[ 안철수 / "상속자들 나라를 공정한 기회의 나라로 바꿀 지도자 누구입니까? 박근혜가 박정희 딸 아니었으면 어떻게 대통령 됐겠습니까? 이재용이 이건희 아들 아니었으면 어떻게 삼성의 1인자가 됐겠습니까? 능력 없는 사람들이 상속으로 높은 자리 오르면 안 됩니다."]

◇ 김종대> 초기의 그 수줍어하던 새 인물 안철수하고는 완전히 다르죠?

◆ 김민하> 저도 이때 이 목소리로 라디오 방송 한번 했었는데 이 목소리에 대해서 주제를 놓고 다뤘었는데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이런 목소리를 너무 오랫동안 사용하면 성대결절이 와서 건강을 해칠 수가 있습니다. 참 이게 여러모로 안타깝습니다.

◆ 김수민> 이게 목을 긁을 때 좀 위쪽으로 긁어줘야 돼요. 아래쪽으로 긁으면 더 많이 상합니다.

◆ 김민하> 경험담인가요, 그거는?

◆ 김수민> 그렇습니다.(웃음)

◇ 김종대> 그래도 저런 변화의 모습이 뭔가 의지가 있어 보이지 않습니까?

◆ 차재원> 그렇죠, 사실 뭐 목소리도 변했지만 그때 당시 포스터 자체도 상당히 혁신적이었거든요. 그러니까 그때 광고계의 천재라고 하는 이제석이라는 분이 있잖아요. 그분이 디자인을 해서 상당히 젊은층들한테도 어필이 되고 그래서 선거 초반에는 상당히 지지율 상승 곡선을 보였죠.

그런데 제가 생각했을 때 패인은 결국 그거인 것 같아요. 2016년 총선에서 국민의당이 녹색 바람을 일으켰잖아요. 그러면서 사실은 그때 당시 국민의당이 정당 투표에서는 1위를 했거든요. 그러니까 26.7%를 얻어서 25.5%인 민주당을 제쳤어요. 그러니까 비례의석이 훨씬 더 많았죠. 1석인가 2석인가 많았는데. 문제는 국민의당이 제3당으로서 캐스팅보트를 쥐면서 20대 국회를 주도하는 모습을 보여야 되는데 사실 그러지 못했다는 거죠. 많은 사람들이 국민의당이 거대 양당 그러니까 적대적 공생 관계를 깨는 뭔가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국회는 여전히 거대 양당이 치고받고 싸우는 극한 대립으로 가고 있다. 그런 부분들에 대한 실망이 있었고요.

그다음에 2017년도 대선 과정에서 물론 아까 MB 아바타입니까부터 시작해서 말실수가 있었지만 그것보다 정작 더 중요한 것은 17년 조기 대선이 왜 생겼죠? 촛불혁명 때문에 생긴 거 아닙니까? 그렇다고 한다면 안철수는 그 촛불혁명의 이미지를 그럼 어떤 식으로 그러면 비전화시키고 정치력화시킬 것인가를 딱 손에 잡힐 정도로 국민들한테 전달해 주지 못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국민의당이 제3당이었기 때문에 가령 안철수 국민의당이 집권했을 때 과연 그러면 의회를 비롯해서 기존 정치권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부분에 대해서 그러면 다른 정당하고 연합이나 연대를 통해서 하겠다는 그런 부분들도 보여주지 못했다. 그러면서 그런데 어떻게 보면 중도 입지에서 자신들이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정체성의 혼란만 가중시켰다. 그런 측면들이 저는 가장 큰 패인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 김민하> 국민의당이 그 당시에 자기중심을 가지고 지금 교수님 말씀대로 정치를 쭉 가져가는 게 아니라 사실 국민의당의 구성원들도 기성 정치의 한 부분인 것처럼 계속 비쳐졌거든요. 호남을 기반으로 한 사람들, 아니면 과거에 보수정치에 가까웠던 사람들 서로 대립하고 이러면서 안철수가 상징했던 새 정치의 가치를 그 당은 보여주지 않았고 안철수의 새 정치는 사실 퇴색이 됐기 때문에 그래서 사실은 대선 성적도 안 좋았고 그 이후 행보도 사실은 여러 가지 한계에 지금 부딪히고 있다, 이런 생각입니다.

◇ 김종대> 3등으로 대선에서 낙선을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대선캠프는 화제였어요. 한국사회 원로도 많이 들어갔고요. 김종인 위원장이 당시 안철수 후보 캠프에 합류를 했었네요. 그런데 지금은 뭐 인연이라고 할 것 없이 저렇게 까칠까칠하단 말입니다. 어떻게 보십니까?
시사평론가 김수민 (사진=김종대의 뉴스업)

 


◆ 김수민> 그때 합류한 게 두 사람의 포지션은 사실 비슷하다라고 봐야 될 것 같아요. 오히려 현재 좀 까칠까칠한 것도 포지션이 너무 비슷해서 그런 것 아닌가.

◇ 김종대> 그래요?

◆ 김수민> 겹치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경쟁의식이 있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드는데 이 당시에 이유는 개혁공동정부라고 해서, 아까 차 교수님께서 지적하셨지만 국민의당이 집권하면 이 소수정당이 어떻게 할 거냐. 이 부분이 있었잖아요. 그런데 이때 당시에 두 사람이 합의했던 것이 탄핵 반대 세력과 계파 패권 세력을 빼고 연정을 꾸려서 공동개혁 정부를 만든다 이거였습니다. 그때 합의를 하면서 이제 김종인 위원장이 합류를 하게 된 거고. 그런데 선거운동을 한다기보다는 개혁공동정부가 출범하는 경우를 대비해서 조각을 하겠다. 내각에 참여할 인사들을 조직하겠다, 이 명분을 가지고 좀 뛰었었죠.

◇ 김종대> 그렇군요. 대선 과정에서도 여러 가지 어떤 어려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 국민의당에서 제보 조작사건이 드러났어요. 상대는 문재인 후보였죠. 이게 그다음에 상당히 어떤 후유증으로 다시 또 이어지죠?

◆ 김수민> 국민의당에서 주로 대선캠프에서 제기를 했었던 부분이 문 대통령의 아들인 문준용 씨가 취업 특혜로 고용정보원 했던 거 아니냐, 그 얘기를 하다가 그게 결국에 나중에 선거 끝나고 나서 그때 받았다라고 하는 제보가 조작되었다라고 하는 것이 드러났고. 사실 선거 직후에 안철수 후보 입장에서는 온라인 쪽에서 지지 조직도 만들어지고 아주 나쁘지만은 않은 분위기였거든요. 이 사건이 터지면서 안철수 후보는 다시 한 번 중대한 정치적 위기를 맞게 됩니다.

◇ 김종대> 그래서 국민의당도 존폐 위기에 놓이고 결국은 당 재건을 선언하면서 국민의당 재건도 다시 또 나서가지고 당선이 됐습니다. 이렇게 해서 당대표에 당선이 됐는데 이렇게 재건한 당을 2018년에 바른정당과 합당을 해서 바른미래당으로 창당으로 나갔거든요. 벌써 이게 세 번째 창당입니다, 이게. 아니, 이렇게 어지러워요.

◆ 차재원> 바로 그 과정에서 그러니까 국민의당의 가장 큰 지분을 갖고 있던 구동교동계 세력들하고 상당히 정치적으로 결별하게 되는 그런 하나의 결정타가 되는 것이죠. 그런데 아마 안철수 대표의 입장에서는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아까 2017년 대선 과정에서 나왔던 박지원 상왕론을 비롯해서 구동교동계의 그런 구성원들 자체가 앞서 우리 김 평론가 말씀하신 것처럼 이 기존의 인물이라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아마 본인 입장에서는 그런 분들에 발목에 잡혀서는 안 되겠다라고 생각해서 뭔가 새로운 정치 지형을 만들어나가야 되겠다. 그때 내세웠던 이야기가 소위 말하는 극중주의거든요. 확실한 중심에 서겠다는 것이었는데.

그러다 보니까 기존의 동교동계들하고 거리를 두면서 정치적으로 결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문제는 동교동계와의 결별은 어떻게 보면 당의 지역적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호남과 어떻게 보면 상당한 작별이 되는 그런 셈이 된 국면이 분명히 있어요. 그러나 그걸 오히려 상당히 감당을 하면서도 바른미래당을 만들었는데. 그런데 그 실험 자체가 사실은 거기도 결국은 계파 싸움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결국 실패로 끝나버렸죠.

◆ 김민하> 그래서 이 모든 과정이 새정치로 시작해서 보수정치로 가는 어떤 징검다리가 된 것처럼 지금 와서는 비쳐지게 돼버린 겁니다.

 


◇ 김종대> 2018년에 서울시장에 또 도전합니다. 그리고 다시 낙선을 하죠. 당시에는 결자해지로 나선다고 했었습니다. 그랬던 안철수 후보, 이번 서울시장에 다시 출마했습니다. 안철수의 정치사에 어떤 의미가 있을지 짤막하게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 김민하> 이제는 변화된 안철수라는 측면. 양보가 아니라 이번에 뭔가 해 보겠다라는 측면이 하나. 두 번째는 확실하게 이번 기회에 보수정치에서 대통령을 한번 해 봐야 된다라는 어떤 각오, 이 두 가지가 결합된 행보이다,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

◇ 김종대> 그렇군요. 어쨌든지간에 오세훈 후보와의 단일화가 또 남아 있습니다. 아름다운 양보는 없다고 선언했는데 최종 후보가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몹시 궁금한 대목입니다. 이제 마무리할 시간이네요. 차재원 부산가톨릭대 교수, 뉴스빙하, 뉴스화산. 세 분 수고 많으셨습니다.

◆ 김수민> 고맙습니다.

◆ 김민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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