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변희수 하사가 지난해 1월 22일 오후 기자회견 중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황진환 기자
군으로부터 버림받은 또 한 명의 군인이 결국 세상을 떠났다. 부사관으로 복무하던 중 성전환 수술을 받은 변희수 전 육군 하사는 강제전역된 지 1년여만인 지난 3일 숨진 채로 발견됐다.
15년 전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당사자는 유방암 수술을 받은 뒤 2006년 강제전역을 당하고 행정소송에서 승소, 2년만에 복직한 피우진 전 국가보훈처장(퇴역 육군중령)이다.
군 당국은 이 사례에서 엄청난 비난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판례를 무시하면서 똑같은 일을 반복했다. 공군참모총장상까지 받을 만큼 직무에 충실하고 꿈 많았던 또 한 명의 군인을 내쫓기에만 바빴던 것이다.
◇ 유방암 수술이 심신장애?…법원 "현역 복무에 장애사유 없으면 강제전역 불가"
피우진 전 국가보훈처장(퇴역 육군중령). 박종민 기자
군인사법 37조는 '심신장애로 인하여 현역으로 복무하는 것이 적합하지 아니한 사람'은 전역시킬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 법 시행규칙 53조는 전역의 기준을 해당 심신장애가 1~9급에 해당되는 경우로 정하고 있다.
여군 헬기 조종사였던 피 중령은 저서 '여군은 초콜릿을 좋아하지 않는다'에서 2002년 유방암 진단을 받고 절제 수술을 받았을 때 당시 부대장이었던 육군 항공학교장도 이를 알면서 전혀 문제삼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1년에 한 번 있는 신체검사에서 불합격을 받기는 했지만, 부대의 배려로 계속 근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학교장이 바뀌면서 그에게 밉보인 탓에 조종사 자격을 심사하는 위원회에 회부돼 조종사에서 해임됐고, 심신장애 2급 판정을 받아 2006년 11월 군에서 강제로 쫓겨났다고 피 중령은 설명한다. 그는 이에 불복하는 소청심사청구에서도 기각당하자 행정소송을 냈고, 여기에서 승소해 2008년 군에 복직했다.
서울행정법원 재판부는 피 중령의 판결에서 "오늘날 전쟁의 양상은 단순히 육체적 능력을 바탕으로 한 개별 작전의 수행에서 벗어나 기술전, 정보전, 과학전으로 진화되고 있으므로 현역복무의 의미를 단순히 육체적·직접적 전투수행에 한정하여 볼 것이 아니라 군 조직관리나 행정업무 등을 포괄하는 종합적 전투수행으로 확대하여 보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군인사법 시행규칙의 심신장애등급 분류에 대해서도 "심신장애의 원인, 군 구성원 개인 간의 상대적인 차이 등에 따른 임무수행의 가능성의 차이 등을 고려하지 않은 채 획일적으로 그 기준을 정한 점" 등을 지적하며 "심신장애등급 1~7급에 해당한다는 판정을 받았어도
현역으로 복무하는 데 장애사유가 되지 않는 경우에는 심신장애를 이유로 전역처분을 할 수 없다고 봄이 상당하다"고 명시한다.
재판부는 피 중령의 수술 경과가 양호하고 암 전이가 없으며 완치가능성이 90% 이상이고, 주치의가 정상적인 군 생활이 가능하다고 보고 있으며, 수술 후 체력검정에서도 모두 합격한 것과 업무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은 점 등에 비춰볼 때 "원고는 현역으로 복무하는 데 장애사유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결론내렸다.
◇ 인권위도 10여년 전 법원과 비슷한 판단…"육군, 변 하사 전투력 상실 입증 못해"그런데 지난해 12월 14일 변 하사의 강제전역이 인권침해라고 판단한 국가인권위원회의 결정문을 보면 놀랄 만큼 서울행정법원의 판례와 비슷하다.
인권위는 "현행법상 '장애'란 '신체적 정신적 손상 또는 기능상실이 장기간에 걸쳐 개인의 일상 또는 사회생활에 상당한 제약을 초래하는 상태'라고 정의한다"며 "신체와 성정체성의 일치를 목적으로 성전환수술을 한 사람(변 하사)을 군인사법상의 '심신장애인'으로 결론내릴 근거는 없다"고 판단한다.
군인사법 시행규칙 53조 3항은 심신장애로 인한 전역 대상자가 현역 복무를 원하는 경우에는 의무조사위원회의 전문적 소견을 참고해, 심의를 거쳐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정하고 있다. 다만, '위법행위나 고의로 심신장애를 초래한 경우', '해당 병과와 계급에서 요구되는 근무·훈련·작전 등 임무를 수행하기 곤란하거나 임무수행에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경우' 등에는 복무할 수 없다고 덧붙인다.
그런데 변 하사의 전역을 둘러싼 정황을 살펴보면 군은 그의 경우가 이 조항에 해당된다고만 계속 언급할 뿐, 실질적으로 왜 현역으로 복무할 수 없는지에 대해 설득력 있는 근거를 대지 못하고 있다.
결정문을 보면 육군은 인권위에 "군의 특수성과 국민적 공감대, 법적 문제에 대한 정책판단이 필요하며 성전환자의 군 복무 여부에 대해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은 상황과 관련 법령이 정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임시적으로 계속 복무가 인정되는 경우 국방임무 수행에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고만 설명한다.
지난해 1월 22일 변 하사의 강제전역이 결정되던 날에도 육군 관계자는 취재진에게 "성별 정정 여부와는 관계 없이 신체조건에 따라 내린 결정"이라면서도, 그가 어떠한 근거로 군인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할 수 없는 신체조건에 해당하는지는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했다.
인권위는 결정문에서 육군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 "신체적 기능장애 측면에서 볼 때 음경과 고환이 상실되긴 했지만 성별정체성의 일치를 위해
검증된 의학적 수술의 방법을 스스로 선택한 것이므로 '신체훼손'이나 '기능장애' 또는 '기능상실'로 볼 수 없다"며 "육군이 명확한 법률적 근거 없이 자의적으로 성전환 수술을 심신장애의 요건으로 해석해 피해자를 전역 처분한 것이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현역으로 복무하기 적합하지 아니한 경우'라 함은 '전투력 상실'을 의미하는데, 군은 '군의 특수성'과 '국민적 공감대' 등만 거론한다며 현역으로 복무하지 못할 정도의 전투력 상실을 전혀 입증하지 못했다고도 지적한다.
변 하사는 전차 조종수였는데 이미 다수의 여군 부사관들이 이 보직으로 근무하고 있고, 영내거주가 곤란한 사정 등이 있다면 보직 조정이나 영외숙소 배정, 부대배치 전환 등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트랜스젠더는 호르몬 치료를 주기적으로 계속 받아야 한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인권위는 변 하사의 근력이 약간 떨어지는 것 정도는 예상되더라도 그것이 군인으로서 임무수행이 불가능한 것임을 증명하는 것도 아니라며,
성전환 수술과 복무적합성 간의 상관관계를 인정할 수 없다고 결론내렸다.
한 마디로, 군이 성의 있게 조치를 취할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않고 변 하사를 '내치는' 것으로 해결하려 한 것은 인권침해라며 전역 처분을 취소하라는 이야기다.
육군은 이 권고조차 "취지는 존중하나, 전역 처분은 관련 법규에 의거 정상적으로 이루어진 적법한 행정처분"이라며 "행정소송이 진행 중이므로 결과에 따라 필요한 조치를 할 예정"이라며 묵살했다.
◇ 성전환자 늘어나는 현실에 아무 대비 안 한 軍육군 관계자는 지난 3일 오후 변 하사가 숨진 채 발견되자 "고인은 현재 민간인 신분으로, 공식적으로 입장을 내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했다. 여기에 비난이 쏟아지자 다음 날인 4일 국방부 문홍식 부대변인이 정례브리핑에서 "안타까운 사망에 대해서 애도를 표한다"고 밝혔다.
그런데 문 부대변인은 관련 질문에 "현재 성전환자의 군복무 관련 제도 개선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의한 바는 없다"고 부연해, 군 당국이 변 하사가 전역하고 1년여가 지나는 동안 아무런 개선책도 마련하지 않았다는 것을 시사했다.
사실 돌이켜 보면 피 중령의 전역 처분을 취소한 서울행정법원 재판부는 이미 2007년에 '현역 복무에 지장이 없는 이상 강제전역을 시켜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판결을 내렸다. 10여년이 흐르는 동안 사회에서 여러 트랜스젠더들이 활동하면서 이들의 인권 문제도 여러 차례 거론돼 왔다.
지난해 2월에는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전환 수술을 받은 A씨가 숙명여대 법대에 합격했지만 이른바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의 극렬한 반대로 입학 포기 결정을 내렸던 일이 사회적 이슈가 되기도 했다. 10여년의 시간 동안 비슷한 일이 충분히 예상될 수 있었지만 군은 성전환자의 입대를 금지하기만 할 뿐, 군인 가운데서도 성전환자가 나올 수 있는 상황에 대해선 아무런 대책도 마련하지 않았다.
지금도 전 세계에서 실전을 치르고 있는 미국은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앞장서서 성전환자의 군 복무를 보장하라고 지시한다. 지난 1월 바이든 대통령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 금지했던 트랜스젠더의 군 복무를 다시 허용하라는 행정명령을 내리며 "포용력이 있을 때 더 강력해질 수 있다. 자격을 갖춘 모든 미국인이 군복을 입고 나라에 봉사하도록 하는 것은 옳은 일이고, 국익에도 부합한다"고 했다. 독일에서도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전환 수술을 한 중령급 지휘관이 나와 화제가 된 일이 있다.
군 당국은 민간에서 군 관련 문제를 제기할 때마다 '군의 특수성', '군의 사기', '군의 명예'라는 3가지를 녹음기처럼 반복한다. 하지만 징병제 국가에서 '젠더 디스포리아' 극복을 위한 수술을 받으면서까지 "최전방에 남아 나라를 지키는 군인으로 계속 남고 싶다"는 이를 내친 것이 오히려 군의 명예와 사기를 저하시키는 일이라는 생각은 왜 하지 않는지 매우 의문이다.
공식적으로 조문조차 하지 않는 군 당국의 태도에 대해 비난이 쏟아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데려갈 때는 국가의 아들딸, 다치거나 내칠 때는 '너희 아들딸'"이라는 냉소적인 말까지 세간에 회자되는 것도 자업자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