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가 내일로 다가왔지만 해고자들의 주름은 어느 때보다 깊다. 코로나19로 명절에 집에 가지 못해 명절 선물이라도 보내고 싶지만 지갑 열기가 어렵다. 농성 등으로 다른 일을 못 해 경제적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정부가 주는 실업급여도 노조에 받는 투쟁기금도 끊기는 이들이 많다.
◇2년 복직 투쟁에 잔고 0원…대우조선 해고 청원경찰
금속노조 경남지부 제공
"설날요? 잔고가 0원인데, 농성장에서 합동 차례 지내야죠"10일 경남 거제 대우조선해양에서 일하다 정리해고된 박대근(39) 금속노조 대우조선산업보안분회장이 한 말이다. 그는 대우조선 서문 앞 아스팔트 바닥에 1인용 천막에서 살고 있다. 설 연휴에 부모님도 만나러 부산에 가고 싶기는 하지만 돈이 없다. 노조에서 주는 9개월짜리 투쟁기금과 실업급여로 연명해왔는데 이달이면 모두 동이 난다. 박 분회장은 "농성장을 지키는 동지들끼리 실향민처럼 이곳에서 합동 차례를 지내기로 했다"며 "대우조선 원청이 청원경찰법 취지에 따라 빨리 직접고용했다면 이런 일 자체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 분회장은 지난 2008년 대우조선 자회사 '웰리브'에 입사했다. 그는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경비가 끌렸다"며 11년 간 대우조선 안팎의 보안 경비를 담당했다. 그러나 회사가 2019년 4월 1일 박 분회장을 포함한 청원경찰 32명을 정리해고 하면서 박 분회장은 느닷없이 해고자 신분이 됐다. 떠나고 남은 해고자 26명을 모아 회사와 싸우기 시작했다.
해고자들은 청원주가 임용해야 한다는 청원경찰법 등을 근거로 원청이 대우조선이라고 주장하며 경남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 구제 신청을 냈다. 2019년 6월 부당해고로 판정하며 복직이 이뤄져야 한다는 판정을 받았지만 중앙노동위원회의 판정은 달랐다. 중노위는 같은해 9월 "대우조선을 사용자로 볼 수 없다"는 취지의 판정으로 원심을 뒤집었다.
해고자들은 이런 중노위 판정에 불복해 같은해 11월 대전지방법원에 중노위를 피고로 행정소송을 냈다. 1년여가 흐른 지난 3일 법원에서는 중노위 판정을 취소하고 청원경찰법에 따라 청원주가 직접 고용해야 한다고 판정했다. 해고자들은 텐트 농성장에서 판결문을 꼭 쥐고 잔다. 다음 설날에는 꼭 대우조선 정식 경비원으로서 회사가 주는 명절 선물을 가족들에게 건네고 싶다는 게 그들의 희망이다.
◇불법파견 조사 중 폐업한 지에이산업…거리에 해고자 40명
이형탁 기자
항공기 부품을 공정하는 사천 지에이산업은 불법파견 조사를 받는 중에 지난달말 공장문을 닫고 폐업절차를 마무리 짓고 있다. 해고자 40여 명은 사측이 불법파견이라는 법적 판단도 받기 전에 꼼수로 위장폐업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회사 주주인 경남도가 중간에서 대안을 내라고 촉구하고 있지만 크게 달라지지 않는 현실에 힘이 부친다.
금속노조 사천지역지회 이현우(37) 지에이산업분회장은 설 연휴로 더욱 마음이 무겁다. 코로나19로 지난해부터 현재까지 아내의 고향인 필리핀에 한 차례도 다녀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분회장은 1년에 한번씩은 꼭 가는 그곳에 자신을 반겨주는 장인어른과 소주를 한잔 하고 싶다. 하지만 코로나와 농성 등으로 여건이 안 된다. 그래서 이번에는 항공편 택배는 값이 비싸 다소 저렴한 배편으로 한국산 명절 선물을 넣어 보내려 한다. 이 분회장은 "필리핀에 있는 장인어른이 좋아하는 생필품을 보내려 한다"며 "비행기로 보내면 비싸서 배편으로 다소 저렴하게 마음만 담아 보내려고 한다"
고용노동부는 지에이산업 원청이 하도급업체 5곳에 불법파견했다는 혐의로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검찰이 기소한 뒤 법원이 불법파견이므로 직접고용하라는 판결만 한다면 전원 돌아갈 수 있다고 해고자들은 보고 있다.
◇48년만 폐업 한국산연…이번 설에도 농성장 당직
이형탁 기자
지난달 20일 일본 자본 철수로 48년 만에 폐업을 강행하면서 눈물을 흘렸던 한국산연 마지막 노동자 16명은 지난 추석에 이어 이번 설에도 농성장을 지키기 위한 당직을 선다. 한국산연 김형광(43) 사무장은 자주 있어왔는지 사뭇 덤덤한 표정이다. 사측이 법인해산 등기를 하고 건물 단전·단수 조치를 진행했지만 농성장을 지키며 어떻게든 버티겠다는 입장이다.
농성은 버티겠지만 사실 가족에게는 미안하다. 돈을 빌리며 어떻게든 집을 유지하고는 있지만 설 명절에 본가와 처가에 명절 선물 하나 제대로 사지 못해 면이 서지 않는다. 김 사무장은 "6년 전에 결혼했는데 1년 만에 정리해고 통보를 받았다. 처가에 미안하긴 한데 농성장을 지켜야 해서 갈지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1973년 일본 산켄전기에 의해 설립된 한국산연은 2016년에 정리해고 통보로 노동자들이 위기를 겪었다. 이에 한국산연 노동자들은 일본으로 원정 투쟁에 나서 위기를 막았다. 김 사무장은 이번에도 해고를 막을 수 있을 거라고 봤지만 현재까지는 불투명한 미래다. 사측이 경영상의 이유로 폐업을 마쳐버렸기 때문이다. 김 사무장은 "불법과 위장폐업으로 노동자들을 기만하는 산켄전기에 대해 외투기업을 규제하는 법안을 꼭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 설 선물은 회사 대표의 거짓 연기 퍼포먼스…한국공작기계 농성 2년
한국공작기계 관계자 제공
창원 50년 전통의 한국공작기계에 다니던 김수연(45) 금속노조 마창지역금속지회장. 회사 앞 농성장이 이제 그의 집이다. 그는 2년째 회사와 싸우고 있다. 법적 다툼에도 2건이나 휘말려있다. 회사 앞에 농성장을 만들었다며 사측에서 한 손해배상소송건, 위장폐업해 사측이 노동자들을 부당해고한 소송건이다. 노동부와 검찰 조사를 받으며 힘겹게 버텨내고 있다.
한국공작기계는 2010년 매출액 최고 1천억 원을 찍는 한 때 잘 나가는 회사였다고 그는 회상했다. 하지만 2019년 11월 횡령과 경영 악화 등의 이유로 공식 파산했다. 1997년 이곳에 입사한 김 지회장은 "수년간 회사 폐업을 막기 위해 노동자들이 고군분투했다"며 "하지만 회사는 수백 억원대 부채를 탕감받기 위해 위장파산을 하고 이름만 영문명으로 바꾼 새로운 회사를 차렸다"고 주장했다.
그가 주장하는 위장파산의 근거는 새로 세워진 한국머신툴스라는 회사가 이전에 한국공작기계가 운영하던 인적, 물적, 영업망 등 사업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점 등이다. 김 지회장은 "이번 설에 회사가 준 선물은 피의자인 회사 대표가 피해자인척 연기하는 퍼포먼스였다"며 "뻔뻔한 회사 대표의 위장 파산이므로 법과 투쟁을 통해 고용승계를 받아낼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2019년 11월부터 회사 앞에 농성장을 차리고 투쟁 중이다. 남은 노동자를 그를 포함해 2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