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양평군 하이패밀리 안데르센 공원묘지에 안치된 정인이의 묘지에 시민들의 추모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이한형 기자
"3회 이상 아동학대 신고가 접수된 가해자는 즉시 구속 수사를 하는 '삼진아웃제'가 도입됩니다. 또 아동학대 사건은 일선 경찰서가 아닌 지방 경찰청별로 설치된 전담 수사팀을 통해 전문적인 수사를 하겠습니다."3차례 학대 신고를 묵살해 결국 16개월 영아 '정인이'를 숨지게 한 경찰이, 7년 전인 2014년 아동학대를 근절하겠다면서 내놓은 대책이다. 당시 울산 울주와 경북 칠곡에서 아동학대 사망사건이 잇따라 일어나면서 여론이 들끓었다.
경찰청은 그해 4월 11일 '아동학대 예방 및 근절 종합대책'을 수립해 당정협의에 보고했다. 아동학대 사건 신고로 출동할 때는 강력사건과 같은 수준으로 조치하고, 상습적이거나 중상해 이상의 피해가 발생한 아동 학대 범죄는 구속 수사를 원칙으로 하는 등 내용이었다.
특히 학대 신고가 3회 이상 접수된 가해자는 지체없이 구속 수사를 하는 '삼진 아웃' 제도를 도입한다고 했다. 정인양의 세 번째 학대 신고가 접수된 지난해 9월 경찰이 7년 전에 공표한 대책을 지켜 양부모를 구속 수사했다면, 참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당시 대책에는 아동학대 사건을 각 지방경찰청에 설치된 성폭력범죄특별수사대가 전담하도록 하는 방안도 담겼다. 아동 사건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 일선 경찰서보다 전문성 있는 수사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이번 정인이 사건에서는 이것 역시 지켜지지 않았다.
아울러 학대 신고가 접수되면 피해아동 부모 외에도 친인척과 이웃, 교사, 진료 의사 등을 모두 의무적으로 조사한다고 했다. 가해자 학대 행위로 아동이 사망할 경우 집행유예 없이 최대 무기징역까지 형량을 높이는 처벌 강화 방안도 제시됐다.
황진환 기자
이름도 거창한 '아동학대 예방 및 근절 종합대책'은 7년이 지난 2021년 경찰 현장에서는 대부분 잊혔다. 경찰 관계자는 6일 CBS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아동학대 '삼진아웃제'를 묻자 "어떻게 관련 신고가 세 번 접수됐다고 해서 구속 수사를 하겠느냐"라고 반문했다.
당시 경찰이 내놓은 대책은 대부분 입법을 필요로 했다. 여론의 관심이 쏠릴 때는 정치권도 경쟁적으로 대책을 쏟아내지만 실제 법률 개정안 등이 국회 본회의 문턱을 넘는 데는 여러 논의가 수반되고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시간이 지나고 공분이 사그라들면 유야무야되기 일쑤다. 당시 대책의 핵심 내용도 입법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정인양 사건 후 정부 부랴부랴 대책 마련…또다시 "땜질·재탕"지난해 10월 정인양의 사연이 언론 보도로 세상에 알려지자 정부는 또다시 부랴부랴 대책 마련에 나섰다. 결과적으로 7년 전 경찰이 발표했던 대책과 비교하면 큰 틀에서 달라진 부분은 없었다. 비슷한 사건이 시차를 두고 반복되니 이를 막기 위한 대책도 '재탕'에 그치는 꼴이다.
경찰청과 보건복지부가 지난해 11월 30일 공동으로 발표한 '아동학대 피해 아동에 대한 응급조치 기준'을 보면, 학대 신고가 두 번 이상 들어온 아동 몸에서 상처가 발견되면 전담공무원이 출동해 72시간 응급 분리 조치를 하게 된다.
이른바 '즉각 분리 제도'다. 학대 신고가 세 차례나 있었지만 가해자 분리에 실패한 정인양 같은 사례를 막자는 취지다. 아동학대 신고 접수 시 피해 아동의 이웃 등 주변인으로 조사 범위를 확대한다고도 했다.
그래픽=고경민 기자
SBS의 '그것이 알고싶다' 방송 이후 국민적 공분이 일자 사건 석 달 만인 지난 5일 정세균 국무총리 주재 회의에서 발표된 대책도 △즉각 분리제도 3월 시행 △경찰청 아동학대 총괄 부서 신설 △전담공무원 추가 배치 등 '땜질식' 처방에 불과했다.
심상치 않은 여론에 정치권도 앞다퉈 '정인이 방지법' 수십개를 무더기로 쏟아내는 중이다. 여야는 오는 8일 본회의에서 관련법을 조속히 통과시키기로 합의했다.
◇"주먹구구식 대책은 그만…아동학대 근절 대책을 근절하자"전문가들은 마구잡이로 발표되는 대책에 대해 "땜질식 대책이 쏟아지면 현장은 뿌리째 흔들린다. 아동학대 근절 대책을 근절해야 한다"고 일갈했다.
장애인인권법센터 대표 김예원 변호사는 "고위험 아동에 대한 즉시분리 매뉴얼은 지금도 있다. 있는 매뉴얼이 잘 작동되는 현장을 만들어야 한다"라며 "즉시분리가 갑자기 늘어나면 오갈 곳 없는 아이들을 어디에 보내야 하나"라고 밝혔다.
이어 "법과 정책이 마구잡이로 바뀌고 일이 터지면 책임만 지라고 한다"라며 "전문성을 키울 시간도 주지 않고 권한만 분산 시켜 놓으니 서로 책임 떠넘기기만 하고 있다. 여론 잠재우기식 무더기 입법은 현장 혼란만 가중한다"고 지적했다.
박명숙 상지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도 "법과 시스템이 없어서 못하는 게 아니다. 현장이 제대로 작동하도록 만드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라며 "지금은 성급하게 법을 만들면서 시행 가능성에 대한 고민은 없어 보인다"고 짚었다.
정세균 국무총리가 지난 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청사에서 '아동학대 관련 긴급 관계장관회의'를 열고 모두발언하고 있다. 이한형 기자
◇전문가들 "전문 수사인력 확보해야…지방청 전담 수사팀 만들자"당장 지키지 못할 대책을 망라할 것이 아니라 전문인력을 확보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는 지적도 나왔다. 김예원 변호사는 "아동학대만 전문적으로 다루는 수사팀을 지방청 단위로 만들어 전문 수사인력을 육성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그는 2013년 출범한 '성폭력특별수사대'를 사례로 들었다. 김 변호사는 "과거에는 경찰의 성범죄 수사가 정말 엉망이었다. 피해자가 경찰로부터 수많은 2차 피해를 당했다"라며 "하지만 성폭력 특별수사대를 도입한 뒤로 많은 것이 바뀌었다. 수사 전문성이 높아지고 지금은 좋은 성과도 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동학대 수사는 '순환보직·3교대 근무' 시스템인 일선서에서는 잘하기 힘들다. 전문성 있는 경찰 인력이 조사와 수사를 전담하고 피해자 지원과 사례관리는 아동보호전문기관이, 행정처리는 전담공무원이 하는 구조를 만들어달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