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이 사랑한 '여지', 어떤 과일인가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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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인민화보 제공)
중국 남방에서 생산되는 여지는 재배와 식용 역사가 2천여 년 전인 한나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 서한 사마상여의 '상림부'는 여지에 관해 기록한 최초의 문헌이다. 여지는 달콤한 맛과 식이요법으로 중국인에게 큰 사랑을 받아왔다.


기후와 토양 등 이유로 조선반도(한반도)에서는 여지가 생산되지 않는다. 잘 알려진 대로 여지는 수확 후 2-3 일이 지나면 풍미가 사라지고 보존이 어렵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는 '흙먼지 일으키는 한 필의 말에 양귀비가 웃는데, 여지를 가지고 오는 것임을 아는 이는 없다(一騎紅塵妃子笑, 無人知是荔枝來)'는 시를 지었다.

이는 당 현종이 양귀비에게 신선한 여지를 주려고 운송인력들에게 준마(駿馬)에 박차를 가해 여지를 운송하라고 시켰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말이 아무리 빨라도 2-3 일 만에 중국 남부 지역의 여지를 조선반도로 운송할 수는 없다. 그렇기때문에 고대 조선반도에서는 오랫동안 여지와 인연이 없었다.

그 후 고려시대 중국 푸젠(福建) 상인은 신선한 여지를 소금에 절여 장기간 보관하고 맛이 변하지 않게 하는 방법을 고안해내 해상무역을 통해 고려에 팔아 큰 인기를 끌었다.

조선시대 명나라 통치자는 국가선물로 여지를 조선에 선물했다. 1403년 명나라 영락제는 여지 등 과일을 조선 사신 설미수에게 주었고 설미수는 여지를 갖고 조선으로 돌아가 태종에게 올렸다. 물론 바람에 말린 여지였지만 신선한 여지와 풍미가 거의 비슷했다.

1411년 조선 태종이 태평관에서 연회를 열고 명나라 사신 황엄을 초대하자 황엄은 여지 등 진귀한 물건을 선물로 올렸다. 명나라 윤봉이 사신으로 3차례 조선을 방문할 때 가져간 선물에도 여지가 있었다.

1452년 명나라 사신 김흥(金興)은 조선의 단종에게 여지와 용안을 한 상자씩 선물로 올렸다. 조선에서 세조, 예종이 즉위하자 명나라는 예외 없이 여지를 선물했다. 특히 연산군의 여지 사랑은 남달랐다고 한다.

1496년 즉위한 지 얼마 안 된 연산군은 승정원에 해마다 명나라로 가는 사신에게 굵은 설탕과 빈랑, 용안, 여지를 구입해오라고 명령해 대신들의 반대에 부딪쳤다. 1497년 연산군은 대신의 반대를 고려해 용안과 여지 두 가지 물품만 사오라고 명을 내렸다. 1504-1506년 3년 동안 연산군은 여지를 구입해오라고 여러 차례 명을 내리면서 "많이"와 "좋은 것을 골라서"를 강조했다.

임진왜란 시기 여지는 명나라 군대를 따라 다시 한번 조선에 들어갔다. 1599년 조선 선조는 명나라 장군 이여송을 방문했고 선조를 환대하는 연회에도 여지 등 과일이 올랐다.그러나 양국 간 여지 무역은 개방되지 않았다. 조선의 통치자가 여지 무역을 백성을 혹사시키고 물자를 낭비하는 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지의 약품 가치는 인정하고 중요하게 여겼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숙종 시대에 어의는 왕실을 위한 통심음(通心飲)을 제조할 때 여지씨를 넣었다.

조선의 문인들은 여지 관련 기록과 작품을 남겼다. 김진수는 '연경잡영'에서 여지 재배 형태를 시로 표현했고, 손명래는 '창사집'에서 여지를 '인간 세상의 100가지 과일이 다 노예다'라고 찬양했다.

박장원은 '구당집'에서 내주부에 있는 친구 이만웅이 여지를 보내준 것에 감사를 표했다. 장지연은 '위암문고'에서 당시 백성들이 제사에 여지를 올렸다고 썼다.

지금은 한중 무역이 발전하면서 중국 남부 지역과 아세안에서 여지가 다량 한국으로 수출돼 일반 가정에서도 여지를 즐길 수 있게 됐다. 이런 상황을 500년 전 연산군이 봤다면 부러워했을 것이다.

※본 기사는 중국 인민화보사에서 제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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