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스웨덴에선 장애인도 '자기만의 속도'로 산다

'탈시설 성지' 스웨덴에서 찾는 장애인의 미래③-활동지원서비스

  • 2020-11-14 06:00
문재인 정부는 출범 당시 장애인 탈(脫)시설 정책을 국정과제로 채택했다. 하지만 한국은 여전히 시설 중심의 정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반면 유럽의 국가들은 일찍이 탈시설 자립 생활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특히 대표적 복지국가 스웨덴은 1997년 모든 장애인 수용 특수병원 및 요양 시설의 폐쇄를 결정하고 '탈시설 사회'로의 전환에 성공했다. 본 기획은 탈시설 이후의 삶을 살고 있는 스웨덴의 사례를 통해 장애인도 자립해 살 수 있으며,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려면 어떤 시스템이 구축돼야 하는지 제시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스웨덴에선 왜 어디서나 장애인을 볼 수 있을까
시설 '안' 사람들-시설 '밖' 사람들
③스웨덴에선 장애인도 '자기만의 속도'에 맞춰 산다
(계속)
크리스 룬드스트롬(40)과 자녀 조슈아(8)가 아이스하키를 관람하고 있다 (사진=크리스 룬드스트롬 제공)

 

"작년 스페인으로 휴가를 다녀왔는데 활동지원인도 같이 갔어요. 돈이요? 활동지원인에 들어가는 항공료, 숙박비 전부 아껴뒀던 활동지원서비스 보조금으로 지불했죠. 제 돈은 거의 들지 않았어요"
소아마비 장애를 가진 요한나(52)는 지난해 여름 스페인으로 휴가를 다녀왔다. 고작 일주일 여행에 휠체어와 보조기구 등 수화물을 8개나 추가하는 '대이동'이었지만 활동지원서비스 덕분에 큰 문제없이 휴가를 즐길 수 있었다.
스웨덴은 1994년 장애인 활동지원서비스를 도입했다. 활동지원서비스는 중증장애인이 활동지원인을 통해 일상생활(식사, 세면 등)과 사회활동(외출, 등하교 등)을 보조받는 서비스를 말한다. 이 서비스는 '자원봉사'와는 다른 개념이다.
장애인은 활동지원인을 직접 채용할 수 있고 활동지원인의 임금은 국가가 지급한다. 스웨덴뿐 아니라 우리나라 역시 활동지원서비스가 '탈시설'의 핵심이라고 입을 모아 말한다.
장애인이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 자기결정권을 보장하며, 지역사회에서 자립 생활을 꾸려 나갈 수 있도록 뒷받침하기 때문이다.
조슈아가 활동지원사와 함께 스키캠프에 참가했다. (사진=크리스 제공)

 

스웨덴에서는 장애인이 '직접지불제도'를 통해 활동지원서비스 보조금을 운용한다. 정부가 지급하는 보조금은 시간당 304크로나(한화 약 3만 9천원)인데 이 안에는 활동지원인의 임금뿐 아니라 세금, 사회보험료, 행정보조금과 활동지원인을 동반하는 데 필요한 차비, 식사비까지 포함된다.
이 돈을 잘 유용해서 적립해 놓으면 휴가를 가거나 활동지원인이 더 필요한 경우 사용할 수 있다. 요한나가 활동지원인과 함께 해외로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활동보조서비스는 탈시설 핵심…연간 활동지원비만 2억 원
스톡홀름 쿵스홀멘 지역에 살고 있는 크리스 룬드스트롬(40)의 자녀 조슈아(8)는 뇌병변 장애를 가지고 있다. 조슈아에 대한 활동지원시간은 일주일에 100시간인데, 이는 학교에서 지원받는 활동지원시간은 포함하지 않은 수치다.
조슈아는 특수학교가 아닌 일반학교에 다니지만 학교에서 장애인 학생을 위해 의무적으로 고용한 활동지원인이 따로 있어 매일 6시간씩 보조받는다.
하루 20시간, 한 달에 약 520시간에 해당하는 활동지원서비스는 돈으로 환산하면 한화로 무려 2천 만 원이 넘는다. 조슈아가 연간 활동지원서비스비로 이용할 수 있는 돈만 2억 4천만 원 가량 되는 셈이다.
그래픽=고경민 기자

 

한국에서도 장애인들이 활동지원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 다만 '돈의 스케일'에서 큰 차이가 난다. 활동지원서비스 보조금은 시간당 1만 3500원으로, 휴일수당이나 야근수당을 챙겨주고 나면 장애인이 실제 활용할 수 있는 비용은 얼마 남지 않는다. 비용이 줄어든다는 것은 활동지원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든다는 의미다.
정부는 지난해 장애등급제 단계적 폐지를 시행하면서 활동지원시간을 최대 480시간까지 늘리겠다고 밝혔지만 아직까지 480시간을 받는 장애인은 단 한 명도 없다. 조슈아의 사례를 비춰보면 시간도, 금액도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다.
또 보조금을 현금이 아닌 바우처 방식으로 지급하기 때문에 적립을 한다거나 활동지원인에게 들어가는 부대비용으로 사용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예컨대 장애인이 여행을 계획할 경우 활동지원인의 교통비, 숙박비 등의 비용은 개인 몫이다. 활동지원인에 들어가는 비용까지도 활동지원서비스 보조금으로 사용할 수 있는 스웨덴과는 차이가 있다.
그래픽=고경민 기자

 

한국과 스웨덴의 결정적 차이는 예산에서 비롯된다. 활동지원서비스는 보건복지부의 장애인 정책 예산 가운데 1/3을 차지하는 가장 큰 규모의 예산이지만, 늘어나는 서비스 이용자와 상승하는 물가·인건비 등을 현실적으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2013년 기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발표한 국가 GDP 대비 장애인복지지출은 한국 0.61%, 스웨덴은 4.25%다. OECD 평균(2.1%)은 한국에 비해 3.5배나 높다.
예산안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한국은 2013년 이후 활동지원예산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지만 2019년에 들어서야 1조 원을 겨우 넘겼다. 반면 스웨덴은 예산이 대폭 늘진 않았지만 이미 2014년부터 3조 원대를 유지 중이다.
2019년 기준으로 서비스 이용자는 한국(8만 1천 명)이 스웨덴(1만 4천 명)보다 5배 이상 많지만 예산은 1/3 이하 수준이다.
그래픽=고경민 기자

 

◇승마·축구·스키까지…스웨덴에선 장애가 심해도 못하는 스포츠가 없다
한참 뛰놀기 좋아할 나이인 조슈아의 일주일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월요일에는 승마, 화요일은 수영을 배우고, 수요일엔 음악학교를 간다. 목요일에는 물리치료를 받고 금요일 하루는 엄마의 허락 하에 컴퓨터 게임을 원 없이 할 수 있다. 토요일은 축구클럽에 가서 친구들과 축구를 하고 일요일엔 아빠와 아이스하키를 한다.
그뿐만 아니다. 집에서는 로봇 다리를 이용해 서서 타는 자전거로 매일 운동을 한다. 겨울에는 스키여행, 여름엔 캠핑을 다닌다.
아빠 크리스는 "스웨덴에서는 장애인들이 모든 스포츠를 할 수 있다"며 "휠체어가 접근하지 못하는 곳이 없고, 장애인을 위한 특수 기기를 사용하는 것도 무료다. 무엇보다 활동지원인이 있기 때문에 무슨 스포츠든 즐길 수 있다"고 말했다.
뇌병변 장애를 가지고 있는 조슈아는 휠체어에 앉아서 생활하긴 하지만 목을 가눌 순 없다. 또 언어장애가 있어서 시선추적장치를 이용해 컴퓨터 음성으로 대화한다. 한국이라면 조슈아는 '장애 정도가 매우 심한 최중증 장애인'으로 분류될 것이다.
하지만 스웨덴에서는 장애를 등급으로 분류하지 않는다. 장애 유형과 장애 정도로 판단하는 게 아니라 '활동에 제약이 많다' 혹은 '신체적 기능이 떨어진다' 정도의 의견으로 장애인의 특징을 드러낸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나이의 같은 장애를 가지고 있더라도 개인의 특성에 맞게 필요한 지원을 입체적으로 받을 수 있다.
한국에서는 장애를 등급으로 나누거나(장애등급제) '장애정도가 심한 장애인'·'심하지 않은 장애인'으로 구분(서비스 지원 종합조사 제도)해 복지예산과 활동지원서비스를 차등 지원한다. 개별적 필요와 수요를 감지하지 못한 채 장애 유형만으로 장애인의 상태와 상황을 파악하며 필요와 수요를 가늠한다.
조슈아는 필요에 따라 다르게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평상시에는 한 명의 활동지원인의 도움을 받지만, 움직임이 많은 날엔 두 명의 활동지원인을 요청할 수 있다. 한 활동지원인이 아이의 움직임을 도와주면 다른 활동지원인은 장애물 등을 확인하는 역할을 맡아 보조한다.
장애인이 활동하기 원하는 분야가 있어 활동지원인이 사전 교육을 받아야 하거나 자격증을 이수해야 하면 이 비용 역시 활동지원서비스 보조금에서 쓸 수 있다. 특수 장비를 착용하고 활동지원인들이 보조해준다면 조슈아가 못할 운동은 없다. 물론 경기장을 포함한 모든 공간에 휠체어 접근이 가능하며, 입장료와 기구 사용료는 거의 무료다.
'벡스트라 IFF' 볼링클럽을 이끌고 있는 마빈 사맛칼라 (사진=마빈 사맛칼라 제공)

 

2008년부터 스톡홀름에서 '벡스트라 IFF' 볼링클럽을 이끌고 있는 마빈은 주말마다 장애인 친구들과 만나 다양한 여가를 즐긴다. 평일에는 스포츠를 함께하고 주말마다 여행도 간다.
그는 "스웨덴에서는 장애인이 여행 가기 쉽다. 램프(휠체어를 자동차에 실을 수 있게 도와주는 장치) 설치 보조금이 정부에서 나오기 때문에 자가용을 타고 많이들 놀러간다"고 설명했다. 버스, 기차 등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편리해서 산과 바다 등 어디든 갈 수 있다.
'벡스트라 IFF' 볼링클럽 멤버들과 마빈 (사진=마빈 제공)

 

◇"스웨덴에선 장애인의 속도에 맞춰 살 수 있어요"
한국의 장애인에게 즐길 거리는 극장이나 미술관 등 관람 위주가 대부분이다. 몸을 사용하는 체험활동은 기구를 구하기도 어렵고 장소 접근조차 쉽지 않다. 스웨덴에서 중증장애인이나 발달장애인도 거의 모든 레포츠를 할 수 있는 이유는 LSS법(장애인에 대한 지원 및 서비스 관련 법률) 덕분이다.
LSS법에는 장애를 가진 사람도 공공문화와 레저를 즐길 수 있도록 동반자 서비스를 지원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특히 스톡홀름시는 장애 아동이 활발히 레저 활동에 참여할 수 있게 구(區)마다 '레저 활동 조정관'을 두고 있다.
스톡홀름의 린키비-키스타구 스포츠국에서 레저 활동 조정관으로 일하고 있는 말린 번트(Malin Bernt)는 "지역 스포츠클럽이 결성되면 장애인도 참여할 수 있도록 팀을 조직한다"며 "무조건 비장애인들이 있는 팀에 장애인을 넣는 게 아니라 장애인의 의사를 먼저 묻는다"고 설명했다.
그는 "장애인 당사자가 비장애인과 어울려 운동을 하고 싶다고 하면 그렇게 팀을 꾸려주고, 장애인만 있는 팀에서 뛰길 원하면 장애인들끼리 운동할 수 있는 팀을 만들어준다"고 덧붙였다.
말린은 "스웨덴에선 장애인도 자기만의 속도에 맞춰 사는 게 가능하다. 자신이 무엇을 할지 본인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점이 스웨덴 장애인 복지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 본 기획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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