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신경영 선언' 당시 고(故) 이건희 회장의 모습(사진=삼성전자 제공)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자"지난 1993년 6월, 고(故) 이건희 회장이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사장단을 소집해 '신경영'을 선언하면서 한 말이다.
당시 글로벌 경영환경의 격변 속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일류가 돼야 하고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기업이어야 하는데, 삼성의 수준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이건희 회장의 진단이었다.
이때까지 삼성은 실질보다 외형 중시의 관습에 빠져 있었다. 일선 경영진의 관심은 지난해에 비해 얼마나 많이 생산하고 판매했는가에 집중돼 있었다. 각 부문은 눈앞의 양적 목표 달성에 급급해 부가가치, 시너지, 장기적 생존전략과 같은 질적 요인들을 소홀히했다.
이처럼 1990년대 초반 삼성은 위기의식을 갖지 못한 채 '국내 제일'이라는 자만에 빠져 있었다.
이건희 회장은 "우리는 자만심에 눈이 가려져 위기를 진정 위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의 못난 점을 알지 못하고 있다. 이대로 가다간 망할지도 모른다는 위기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내가 등허리에 식은땀이 난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삼성이 만든 제품은 동남아 등 일부 시장에서 부분적으로 성공을 거뒀지만 미국, 일본 등 선진국 시장에서는 싸구려 취급을 받고 있었다.
◇1993년 美 'Best Buy'매장에서 먼지 뒤집어쓰고 있던 삼성전자 제품
(사진=황진환 기자/자료사진)
마침내 이건희 회장은 1993년 2월, 전자 관계사 주요 임원이 참석한 가운데 미국 LA에서 전자부문 수출상품 현지 비교 평가회의를 주재했다.
삼성이 잘한다고 자부하며 만든 제품들이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에서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자는 취지에서였다.
그런데 현지 'Best Buy' 매장에서 삼성 제품은 고객으로부터 외면받아 한쪽 구석에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놓여 있었다. 임원들과 함께 이를 둘러보며 이건희 회장은 "삼성이란 이름을 반환해야 한다. 한쪽 구석 먼지 구덩이에 처박힌 것에다 왜 삼성이란 이름을 쓰는가? 그나마 진열대에 놓여 있는 제품 중에는 뚜껑이 깨져 있거나 작동이 안 되는 것도 있지 않은가? 이는 주주, 종업원, 국민, 나라를 기만하는 행위"라고 통탄했다.
이건희 회장은 이대로 있으면 삼류, 사류로 전락하고 망할지도 모른다는 절체 절명의 위기감을 전 임직원이 공감하고 대전환의 길을 선택할 것을 바랬다.
그것은, "양(量)이냐 질(質)이냐"의 선택이었고, 국내 제일에 머물 것인가, 세계 시장으로 나갈 것인가의 선택이었다.
◇'신경영 선언'(프랑크푸르트 선언)이 나오기까지
1993년 신경영 선언하는 이건희 회장(사진=연합뉴스)
1993년 6월 4일 이건희 회장은 일본 도쿄에서 삼성의 경영 현장을 지도해 온 일본인 고문들과 삼성이 지닌 문제점들에 대해 회의를 가졌다. 새벽까지 이어진 회의에서 이건희 회장은 디자인 수준을 어떻게 올려야 할 지에 대한 고민을 털어 놓았다.
삼성전자 정보통신부문 디자인부서를 지도했던 후쿠다(福田) 고문은 삼성전자에서 4년간 근무하면서 보고 느낀 점을 이야기했다.
일류상품은 디자인만으로는 안 되고 상품기획과 생산기술 등이 일체화 되어야 하는데, 삼성은 상품기획이 약하다. 개발을 해도 시간이 오래 걸리고, 시장에 물건을 내놓는 타이밍도 놓치고 있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보고서에서 거론되고 있는 사항들은 그 동안 이건희 회장이 숱하게 지적하며 고치기를 강조해온 고질적 업무관행이었다. 도쿄에서 프랑크푸르트로 향하는 기내에 동승했던 사장단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하고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논의하게 했다. 그 논의는 프랑크푸르트에서도 이어졌다.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한 이건희 회장은 세탁기 조립 라인에서 직원들이 세탁기 덮개 여닫이 부분 규격이 맞지 않아 닫히지 않자 즉석에서 덮개를 칼로 깎아 내고 조립하는 모습이 담겨 있는 품질고발 사내방송 프로그램 비디오테이프를 받아 보고 또 다시 충격을 받았다.
(사진=연합뉴스)
1993년 6월 7일 마침내 이건희 회장은 비장한 각오로 임원과 해외주재원 등 200여 명을 프랑크푸르트 캠핀스키 호텔로 불러 모아 새로운 삼성을 여는 회의를 주재했다.
이 자리에서 이건희 회장은 "세기말적 변화에 대한 기대와 위기감으로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았다"며 "때로는 찬란한 비전과 희망에 흥분하기도 했고, 때로는 무섭게 엄습해오는 책임감 때문에 등골이 오싹해지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여러 선진국들을 둘러본 결과, 국가도 기업도 개인도 변하지 않으면 살아 남지 못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강조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회장 자신부터 변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또한 삼성도 뼈를 깎는 아픔을 감내하고 스스로 변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판단했고, 마침내 1993년 6월 7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삼성은 이제 양 위주의 의식, 체질, 제도, 관행에서 벗어나 질 위주로 철저히 변해야 한다"고 선언하며 삼성 신경영을 꺼내들었다.
◇양(量) 위주의 경영에서 질(質) 위주의 경영으로
신경영 선언 20주년 행사에 참여한 고 이건희 회장(사진=연합뉴스)
삼성의 '신경영'은 이제까지 지속됐던 양 위주 경영의 악순환 고리를 끊고 질을 중심으로 양이 조화를 이루는 선순환의 경영구조를 실현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건희 회장은 양 위주 경영의 한계를 절감하고, 양적 사고의 결과로 생기는 불량을 고질적인 병폐라고 지적했다. '불량은 암'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회사를 망하게 할 수 있는 불량의 폐해를 강조했던 것이다.
"나는 20년이 넘도록 '불량은 암'이라고 말해왔다. 위궤양은 회복되지만 암은 진화한다. 초기에 잘라내지 않으면 3~5년 뒤에 온몸으로 전이되어 사람을 죽인다. 삼성은 자칫 잘못하면 암의 말기에 들어갈 가능성이 있다. 암은 초기에 수술하면 나을 수 있으나 3기에 들어가면 누구도 못 고친다"
이러한 이 회장의 뜻대로 삼성은 생산라인을 중단시키더라도 불량을 선진국 수준으로 낮추도록 했으며, 한 품목이라도 좋으니 세계 제일의 제품을 만들기로 했다.
◇라인스톱 제도와 불량 휴대전화 화형식
삼성서울병원 건설 현장 방문한 이건희 회장(사진=연합뉴스)
삼성의 초일류를 향한 출발은 불량 추방에서 시작됐다. 삼성은 무한한 성장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량으로 인해 질적인 면에서 답보상태에 머물러 있고, 선진시장에서도 제값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건희 회장은 당시 삼성전자의 현주소에 대해 "생산 현장에 나사가 굴러다녀도 줍는 사람이 없는 조직이 삼성전자고, 3만 명이 만들고 6,000명이 고치러 다니는 비효율, 낭비적인 집단인 무감각한 회사"라고 질타하며, 품질에 대한 임직원들의 기본 의식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프랑크푸르트 선언 이후 품질을 최우선으로 불량을 뿌리 뽑기 위한 실질적인 조치들이 잇달아 취해졌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가 '라인스톱 제도'였다.
라인스톱제란 생산현장에서 불량이 발생할 경우, 즉시 해당 생산라인의 가동을 중단하고 제조과정의 문제점을 완전히 해결한 다음 재가동함으로써 문제 재발을 방지하는 혁신적인 제도였다.
생산물량이 밀려 있는데도 불구하고 라인을 세워야 하는 생산 담당자들에게는 상당한 고통이었지만, 효과는 컸다.
실제로 전자제품의 경우, 1993년의 불량률이 전년도에 비해 적게는 30%, 많게는 50%까지 줄어들었다.
라인스톱제와 함께 질 위주로 가기 위한 삼성의 뼈를 깎는 의지를 보여 준 사례가 1995년 3월에 있었던 불량 무선전화기 화형식이다.
당시 삼성전자의 무선전화기 사업부는 품질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완제품 생산을 추진하다 제품 불량률이 무려 11.8%까지 올라가는 심각한 문제를 드러냈다.
(사진=연합뉴스)
이에 이건희 회장은 "신경영 이후에도 이런 나쁜 물건을 만들고, 엉터리 물건을 파는 정신은 무엇인가? 적자 내고 고객으로부터 인심 잃고 악평을 받으면서 이런 사업을 왜 하는가? 삼성에서 수준 미달의 제품을 만드는 것은 죄악이다. 회사 문을 닫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시정해야 한다"고 질타했다.
1995년 1월 이건희 회장은 품질사고 대책과 향후 계획을 점검하면서 고객들에게는 사죄하는 마음으로 무조건 새 제품으로 교환해주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도록 했다.
이 회장은 이렇게 수거된 제품을 소각함으로써 임직원들의 불량의식도 함께 불태울 것을 제안했고, 15만 대(150여억 원 어치)의 제품을 경북 구미사업장에서 '화형식'을 통해 전량 폐기시켰다.
삼성측은 "이러한 가시적 조치와 노력을 통해 '불량은 암'이라는 인식이 삼성인들 가슴속에 자리를 잡아갔고, 현장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부실 요인을 찾아 고치는 풍토가 그룹 전체에 확산되는 계기가 됐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