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영화 속에 이름을 가진 여성 캐릭터가 최소 두 사람이 나올 것.둘째, 이들이 서로 대화를 나눌 것.셋째, 해당 대화 소재나 주제는 남자 캐릭터에 관한 것이 아닐 것.이른바 '벡델 테스트'(Bechdel test)는 영화에서 양성평등을 가늠하는 지수다. 단순해 보이는 기준이지만, 한국영화계를 되돌아보면 이 단순한 지표마저 충족하는 영화가 적은 게 현실이다. 그러나 지난 몇 해 사이 영화계에서는 이를 타파하려는 시도가 꾸준히 나오고 있다.
관객들도 마찬가지다. 양성평등의 관점에서 영화를 바라보는 흐름이 뚜렷이 체감될 만큼 국내 관객 문화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이러한 관객 변화에 적극적으로 응하고 한국영화계가 관객의 기대를 더욱 민첩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독려하기 위해 기획된 게 '벡델데이 2020'(9월 1일~7일)이다.
'양성평등주간'의 첫 영화 관련 행사이자 문화체육관광부 주최로 한국영화감독조합이 주관해 기획된 '벡델데이 2020'은 양성평등의 시선으로 바라본 영화 10편과 영화인을 선정했다. 영화인은 영화 소개 속 별표(
★)로 표시했다. 영화는 2회에 걸쳐 소개하려 한다.
◇ '82년생 김지영'(감독 김도영)□영화 정보│감독 : 김도영
│작가 : 유영아
│주연 : 정유미 공유
│제작자 : 박지영 곽희진
│제작사 : 봄바람영화사
│1982년 태어나 2019년을 살아가는 보편적인 여성 김지영의 이야기
"벡델 테스트의 중요한 기준처럼, 여성이 콘텐츠의 제목에서부터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는 일은 얼마나 감격인가. 지난 몇 년간 한국 사회의 양성평등 이슈에 있어 '82년생 김지영'만큼 뜨거운 이름이 또 있었을까. 출간 2년 만에 누적 판매 부수 100만 부를 돌파하고 중국, 일본, 대만 서점가에서도 베스트셀러에 오른 '82년생 김지영'이 영화화된 것은 지금 우리 시대의 운명이었다.
봄바람영화사의 박지영, 곽희진 공동대표가 창립작으로 제작하고 유영아 작가가 각색에 참여한 뒤 단편 '자유연기'로 주목받은, 하지만 그보다 배우로 조금 더 알려졌던 신인 김도영 감독이 연출을 맡기까지의 과정도 한국영화계 여성 영화인들의 끈기와 자존심을 보여준 일이었다.
정유미 배우가 연기하는 김지영이 부엌에 우두커니 서서 일하다 느닷없이 빙의돼 '사부인'을 부를 때, 소설과 영화를 초월하는 소중한 공감과 위반, 더 나아가 한국 영화의 새로운 자리가 만들어지는 순간이었다." _주성철 프로그래머
◇ '메기'(감독 이옥섭)□영화 정보│감독 : 이옥섭
│작가 : 이옥섭 구교환
│주연 : 이주영 문소리 구교환
│제작자 : 구교환 이옥섭 최영재
│제작사 : 국가인권위원회/2X9HD
│병원을 발칵 뒤집은 19금 엑스레이 사진, 도심 한복판에 등장한 싱크홀과 지구의 위험을 감지하는 특별한 메기까지, 믿음에 관한 가장 엉뚱하고 발칙한 상상을 담은 코미디 영화
"의심과 불신, 추측과 불안의 '구덩이'가 지속해서 발생하는 사회. 바로 어항 속 '메기'가 바라보는 왜곡된 세상이다. 메기는 이곳의 피해자인, 마리아 사랑병원 간호사 여윤영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출처 불명의 'SEX-ray'로 발칵 뒤집힌 이곳에서 사람들의 호기심의 대상은 '찍힌' 여성 여윤영이다. 그 누구도 '찍은' 사람을 궁금해하지도 처벌하지도 않는 곳. 가십 위주, 여성 피해자가 양산되는 고질적인 사회에서 어항 속 메기처럼 여윤영은 숨을 쉬기가 힘들다.
'메기'는 그저 고발에 그치지 않는다. 물의에 대한 책임을 묻는 병원 측의 퇴사 요구에 여윤영은 강력히 거부권을 행사한다. 당연하게 여겨졌던 세상의 관습에 맞서는 일격이다. 잘못한 남성에게는 구구절절 변명의 기회를 주지 않고, 구덩이에 묻어 버리는 이 영화의 결말에 지지를! 이옥섭 감독이 이 사회를 향해 날리는 '찐 블랙코미디'." _이화정 프로그래머
◇ '미성년'(감독 김윤석)□영화 정보│감독 : 김윤석
│작가 : 이보람 김윤석★│주연 : 염정아 김소진 김혜준 박세진 김윤석
│제작자 : 이동하
│제작사 : 영화사레드피터/화이브라더스코리아
│평온했던 일상을 뒤흔든 폭풍 같은 사건을 마주한 두 가족의 이야기
"언뜻 보기엔 미성년인 고등학생 두 명의 이야기다. 자세히 보면 나이만 주워 먹었지 여전히 미성년인 엄마 아빠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모순과 부조리의 가부장제 속에서 허우적대는 이들을 향한 냉소와 조롱과 연민과 공감과 연대와 화해가 층층이 쌓인 이야기다.
가장 큰 반전은 김윤석 배우의 연출 데뷔작이라는 사실이다. 거친 중년 남성 캐릭터의 필모 트랙을 외발로 질주하던 김윤석이 요상한 턴을 하며 기우뚱하는가 싶더니, 다른 발 하나를 우아하게 감아 착지하며 묘하게 균형 잡힌 피니시 동작을 선보였다. 생경하고 신선하다." _민규동 감독
◇ '벌새'(감독 김보라)□영화 정보│감독 : 김보라★│작가 : 김보라
│주연 : 박지후 김새벽
│제작자 : 조수아 김보라
│제작사 : 에피파니
│1994년 알 수 없는 거대한 세계와 마주한 14살 은희의 보편적이고 찬란한 기억의 이야기
"'벌새'는 은희와 주변 인물의 갈등을 그린 작품으로 다양한 성격과 배경을 가진 이들이 등장한다. 그중 은희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건 가족과 지숙, 영지 등인데 대부분이 여성임을 알 수 있다. 가부장적인 아빠와 함께 사는 엄마,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언니와 폭력적인 오빠, 그 속에서 은희는 담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러다 은희는 한문 선생님 '영지'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은희의 가정폭력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이며 오빠에게 매 맞는 것이 얼마나 불합리하고 폭력적인지에 대해 알려주는 인물이다. 그런 영지와의 만남과 이별은 은희의 세계를 바꿔 놓는데, 은희가 영화 후반부 남자친구에게 '나 사실 너 좋아한 적 없어'라고 한 것이 그 증거이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은희는 남자친구와 불안한 관계에 놓이지만 영지와의 이별 이후 은희는 그 불안한 관계에서 벗어나 사뭇 달라진 모습을 선보인다. 관객으로서 이 장면이 은희의 성장을 드러낸다고 생각했다. '벌새'가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가능성'이었다. 여성으로 이루어진 극 속에서, 남녀의 사랑만이 아닌 다양한 사랑의 모습이 전혀 지루하지 않고 충분한 공감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_김보라 배우
◇ '아워 바디'(감독 한가람)□영화 정보│감독 : 한가람
│작가 : 한가람
│주연 : 최희서 안지혜 김정영
│제작자 : 오석근
│제작사 : 한국영화아카데미
│몸도 마음도 지쳐버린 자영이 달리는 현주를 우연히 만나 세상 밖으로 나오는 이야기
"8년을 다람쥐처럼 달렸던 공시생 자영이 갑자기 달리기에 빠지면서 만나는 사람들. 우리 시대 청년들의 이야기라고 단순하게 말하기엔 깊고, 난해하다. 달리기 고수 현주는 자영의 빛나는 롤모델이지만 그녀의 절망적 삶은 금방 드러난다. 새로운 일터에서 만난 비정규직 여성들의 삶 또한 전쟁터다.
여성 감독이 여성 주인공을 비롯해 친구와 엄마, 동생, 직장 동료까지 모두를 여성으로 설정해 다양한 여성에 주목함으로써 이 이야기는 단순한 청년 이야기에서 묵직한 섹슈얼리티에 대한 논쟁을 가시처럼 송곳처럼 품고 있는 작품이 되었다. 스포츠 성장영화에서 깨어나 시대의 청년과 젠더에 대한 화두를 참구하라고 죽비를 내리친다." _진모영 감독<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