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코로나19 방역 장면. (사진=연합뉴스/자료사진)
"그 어떤 경제건설 성과보다 대유행전염병의 침습을 막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이 사업에 최선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 우리 당의 요구이다"(노동신문 7월 10일자 기사 중)북한은 자칭 '전염병 청정지역'이다. 아프리카돼지열병은 단 한 건 발생했고, 코로나19 확진자는 한 명도 없다는 것이 북한의 공식 입장이다.
전염병 창궐이 없는데도 북한은 전염병 차단 방역을 "그 어떤 경제건설 성과"보다 더 중시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결국 북한의 공식 주장과는 달리 코로나19와 돼지열병 등 전염병이 북한에 매우 심각한 영향을 주고 있다는 점을 반증하는 것으로 보인다.
전염병은 무엇보다 민심 동요에 악영향을 주는 것으로 관측된다.
◇북한에서 돼지는 식량, 소와 달리 개인 소유 가능북한에서 소와 돼지는 위상이 다르다. 소는 부림 짐승으로 생산수단이기 때문에 개인이 소유할 수 없다. 국가 또는 협동농장 소유이다. 전시 동원물자로까지 등록된다. 개인이 처분하거나 잡아먹을 수 없다는 얘기이다.
반면 돼지는 개인 소유가 가능하다. 가정에서 키워 잡아먹을 수 있고 장마당에 팔 수 도 있다. 특히 90년대 고난의 행군시대를 거치면서 돼지는 북한 중산층 가정에서 무척 소중한 존재가 됐다. 돼지를 키워 식량과 교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돼지사육은 바로 돼지농사였다.
북한에서 수의방역담당 공무원으로 일하다 2011년 탈북한 조충희 굿 파머스 연구위원은 "봄에 새끼돼지 1, 2마리를 사서 가을에 60킬로그램 정도 나가는 돼지로 키워 장마당에 내면, 돼지고기 1킬로그램에 쌀 2킬로그램의 시세에 따라 통상 돼지 두 마리로 120킬로그램의 쌀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정도면 북한 4인 가구가 1년은 먹고 살 수 있는 식량이니, 90년대 식량난을 거치면서 북한 가정에서는 너도 나도 돼지를 키웠다"는 것이다.
조 연구위원의 설명에 따르면, 북한의 전체 500만 가구 중 200만 가구는 돼지를 키운다고 한다. 평양도 예외가 아니다. 평양 전체 가구의 4,50%는 돼지를 키우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파트에서는 주로 베란다에서 돼지를 사육한다. 돼지를 키운다는 것 자체가 웬 만큼 사는 중산층임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북한 가정에서 돼지를 키우는 것은 사실 북한 당국의 정책적인 장려도 한 몫을 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도 2019년 신년사에서 "협동농장들의 공동 축산과 개인 부업 축산을 장려하여 인민들에게 더 많은 고기와 알이 차려지게 하여야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김 위원장이 언급한 개인부업 축산 중 가장 비중이 큰 것이 바로 돼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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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들 폐사에 "민심 흉흉" 그런데 비극이 생겼다. 아프리카 돼지열병으로 협동농장은 물론 북한 가정에서 키우던 돼지가 갑자기 죽어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북한은 지난해 5월말 자강도 우시군의 한 농장에 돼지열병이 발병했다고 세계동물보건기구(OIE)에 보고한 바 있다. 북한의 돼지열병 발병 보고는 이 한 건이 전부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북한 전역에서 발병한 것으로 관측된다.
북한 수의방역에 정통한 국내 수의업계 관계자는 "지난해 북한 수의사들을 접촉한 결과, 평안북도, 평안남도, 황해북도, 황해남도는 물론 개성특별시, 평양까지 돼지열병이 왔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북한이 돼지열병 진단을 위해 200개 이상의 항체를 모아 진단키트를 만들었는데, 200개의 항체라는 것은 곧 200군데 농장에서 돼지열병이 발생했다는 의미"라는 설명이다.
국정원도 지난해 9월 24일 국회 정보위 전체회의에서 "아프리카돼지열병(ASF)으로 북한 평안북도의 돼지가 전멸했다"며, "(북한에) 고기가 있는 집이 없다는 불평이 나올 정도이다. 북한 전역에 돼지열병이 상당히 확산됐다는 징후가 있다"고 보고한 적이 있다.
코로나19처럼 백신도 없고 치료제도 없는 돼지열병의 확산으로 지난해 북한의 상당수 가정에서 원인도 정확히 모른 채 돼지가 죽어 나갔고, 이에 돼지를 다시 사서 키우다 죽는 사태가 반복된 것으로 전해졌다.
한 해 식량을 의미하는 돼지가 죽어나가는 허망함에 "민심이 흉흉했다"고 한다.
◇돼지의 비극은 올해도 계속…"돼지 10마리 중 절반 죽어"올해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조충희 연구위원은 "차단방역이 잘된 국영기업소나 협동농장돼지는 살아남았으나, 배합사료 대신 잔반사료를 먹이는 가정사육 돼지는 돼지열병 바이러스의 토착화로 올해도 상황이 결코 나아지지 않았다"며, "북한의 시군 단위마다 1개씩 있는 가축 방역소에 따르면 돼지를 집으로 들이는 10 가구 중 절반은 돼지가 죽어나갔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지난해에 돼지가 워낙 많이 죽어서 새끼돼지를 구하기도 어려운데, 간신히 새끼돼지를 구해서 키우면 도중에 열병에 결려 죽어서 주민들이 많이 힘들어 했다"는 것이다.
"돼지열병으로 죽은 돼지를 도축해 장마당에 몰래 유통시키는 일이 빈번해지다보니, 최근에는 살아 있는 돼지를 장마당에서 직접 도축해 팔지 않는 한 돼지고기를 사가지 않는 관행이 굳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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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신문이 지난 2월 23일 "돼지들 속에서 이상한 증상, 갑작스러운 죽음이 나타나는 경우 즉시 수의 방역기관에 통보해야 한다", 3월 3일자에 "축산에서는 방역이자 곧 생산이라는 것을 깊이 명심해야 한다", 7월 2일자에 "수의방역 사업은 축산업에서 생명과 같다"며 지속적으로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도 확산세가 계속되고 있음을 뜻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돼지열병에 이어 코로나19 엄습 타격 유엔의 대북제재에 따른 내핍경제 속에 돼지열병에 이어 올 초부터는 코로나19가 닥쳤다. 이에 북한은 지난 1월 말부터 중국과 러시아 등 모든 국경을 봉쇄했다. 국경봉쇄가 장기화되면서 이달말로 벌써 6개월이다.
그 결과 지난 5월까지 대중수출은 80.1%, 대중수입은 68.1%나 감소했다. 수출이 대폭 감소하니 달러 등 외화 사정이 악화됐고, 수입 통로 차단되면서 상품 유통이 타격을 받았다.
특히 2월과 4월에 쌀과 휘발유 등 물가와 환율이 급등락을 했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소득 감소에 따라 식품 및 소비재 수입이 줄면서 평양시민을 포함해 상류층 및 국영부문 중심으로 생활수준이 하락했다"고 평가했다.
◇300만 인구밀집 대도시 평양은 더 위험돼지열병과 코로나19 등 전염병과 관련해 특히 눈길을 끄는 곳이 바로 평양이다.
북한은 지난해 5월 자강도의 돼지열병 발병 사례를 국제기구에 보고했지만, 실제로는 지난해 3월 평양 보통강 구역에서 돼지 열병이 처음 발병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평양은 300만 명의 주민들이 사는 인구밀집 지역이다. 게다가 북한 사회에서 특권층에 해당하는 평양시민들은 다른 지역 주민들보다 오히려 중국 등 외국 왕래 기회가 더 많다. 중국을 다녀온 평양 거주 여성의 코로나19 확진설이 지난 2월초 제기된 것도 아예 근거가 없지는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북한 당국은 인민반 조직 등을 통해 평양 등 전국의 코로나19 발병 여부를 소상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코로나19 확진이 없다면 전 주민이 마스크를 쓸 이유는 없는 것이다.
평양의 내 상점들. (사진=연합뉴스/자료사진)
◇평양 민심 동요를 보여주는 현상 '사재기'대북제재와 전염병이 겹친 평양 민심을 잘 드러낸 것이 바로 '사재기'현상이다.
국정원은 지난 5월 국회 정보위에 "수입식료품 가격급등에 따른 불안 심리로 평양시민들이 사재기에 나서며 백화점에 인파가 몰리고 줄서기 현상이 발생했고, 북한 내각의 보안성 중심으로 매점매석 단속 등 다양한 물가 안정화 조치를 시행해 다소 진정되는 양상"이라고 보고한 바 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월 29일, 4월 11일, 7월 3일 등 세 차례에 걸쳐 정치국 확대회의를 주재했다. 회의의 최대 이슈가 바로 코로나19와 돼지열병 등 전염병 방역 대책과 평양주민 생활안정 문제였다.
평양 살림집 보수공사, 옥내 상수도관 교체 등 생활용수 공급, 채소 공급을 위한 관수체계 복구 등 평양시민 생활보장 방안은 무엇보다 핵심 지지층인 평양시민들의 민심을 고려한 조치로 풀이된다.
북한이 남측을 대적관계로 규정하고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라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한 것도 대북제재와 전염병의 장기화에 따른 주민들의 불안 심리와 피로감을 외부로 돌려 해소하기 위한 목적도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평양 시찰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자료사진)
◇김정은 위원장이 평양을 더욱 각별히 챙기는 이유는?김여정 제1부부장은 북미정상회담과 관련한 지난 10일 담화에서 "조선반도의 비핵화를 실현하자면 우리의 행동과 병행하여 타방의 많은 변화, 즉 불가역적인 중대 조치를 동시에 취해져야만 가능하다"고 밝혔다.
대북제재를 풀기위한 비핵화 협상이 아니라 핵보유국 간 핵군축 협상을 하자는 뜻이다. 협상의 문턱이 높아진 상황에서 북미정상회담으로 승부를 보려면 강고한 체제결속이 필요하다. 게다가 정면 돌파전의 장기전략 수행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민심 동요를 차단해 오랜 기간 버터나갈 태세가 되어야 한다.
북한이 그 어떤 경제건설 성과보다도 전염병 차단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이다. 이것이 바로 북한이 강조하는 '인민중심주의'이다.
김영수 서강대 교수는 "대북제재에다 돼지열병과 코로나19 등 전염병이 겹쳐 민심이 나쁘지만 아직은 충분히 감내할 수준으로 본다"며, "다만 이 상태로 계속 가면 최악의 사태가 빚어질 수 있다는 북한 지도부의 통치감각이 평양시민 등 핵심 지지층 챙기기로 나타난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