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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협 창립멤버 "30년 '위안부 운동' 정신까지 훼손돼 억장 무너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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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5-31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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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정신대 조사단'부터 활동한 김혜원 선생 인터뷰
"위안부 쉬쉬하던 사회에서 국제적인 운동으로 만들어내"
"일부서 위안부 운동 폄훼·매도해 참담하고 가슴 무너져"
"수요집회 중단은 안돼…피해 할머니들 성장한 장이기도"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창립 멤버인 김혜원(85) 선생이 지난 27일 자택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사진=서민선 기자)

 

"할머니들이 처음 수요집회 나왔을 때는 머리도 못 들고 그랬는데, 나중에는 '창피한 것은 우리가 아니고 가해자 일본 너희다!' 이렇게 외칠 수 있게 됐잖아요. 할머니들도 당당해진 거지. 그랬는데 '30년 동안 끌고 다니면서 이용만 당했다' 이렇게 얘기하시니 억장이 무너지죠"

지난 27일 자택에서 만난 김혜원(85) 선생은 최근 정의기억연대(정의연)를 둘러싸고 터진 논란에 대해 한숨을 쉬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지금까지 선배들이 헌신과 열정을 다해 여기까지 올려놓은 이 여성인권평화운동을 폄훼하고, 매도하는 이런 사태에 참담하고 가슴이 무너진다"고 호소했다.

김 선생은 1990년 11월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발족 당시 '서기'를 맡았던 창립 멤버다. 당시 이화여대 교수였던 윤정옥(96) 선생이 '대표', 김신실 선생이 '회계' 담당이었다. 이 3명은 1988년 '정신대 조사단'을 꾸려 일본을 답사한 뒤, 이를 토대로 위안부 문제를 국내에 처음으로 알렸다.

◇"30년 전 사무실도 없이 시작…'국가 망신 그만시켜라'는 따가운 시선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비' 동상 제막식에서 이용수 할머니가 제막된 동상을 얼싸안고 있다(사진=박종민 기자/자료사진)

 

"1988년 소수의 교회 여성들이 모여 이 운동을 처음 시작했죠. 인간은 여성과 남성을 막론하고 하나님의 존귀한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인데, 국가 권력에 의해 짓밟히고 존귀함을 잃어간다면 이건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그런 뜻에서 이 운동을 시작했죠."

여든이 넘은 나이에, 백발이 성성한 모습이었지만 김 선생은 30년 전 처음 위안부 운동에 뛰어들게 된 당시를 또렷이 기억했다. 그는 "지금은 정의연이 큰 기구 같아 보이지만 시작은 정말 미미했다"면서 "사무실도 없어서 변호사 하는 우리 남편 사무실에 처음 몇 달간 얹혀살기도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러면서 "그때는 우리 사회가 이 문제를 은폐하고 쉬쉬하는 분위기였다. 강제로 끌려가 징용·징병갔던 사람들은 돌아와 당당하게 '내가 이렇게 가서 고생했다'고 말하는데, 끌려갔던 여성들은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어 "왜 그랬겠나. 당시 우리 사회는 여성의 몸이 그렇게 착취 당한 것은 더렵혀진 것으로 알고, 이걸 얘기하는 것은 집안의 망신이자 국가적 망신으로 여겼기 때문"이라면서 "그래서 우리에게 '왜 다 지나간 얘기를 끄집어내서 국가 망신을 자처하느냐' 이런 분위기였다"고 기억했다.

처음에는 '위안부'라는 용어도 존재하지 않았다. 김 선생은 "당시에는 위안부라는 용어가 우리 사회에 알려지지 않아 정신대라는 포괄적인 명칭을 사용했다. 명칭만 그럴 뿐 어디까지나 위안부 문제에 집중해왔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용수 할머니가 '정신대라는 만두껍질 속에 위안부가 들어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맥락에는 근로정신대 문제 속에서 위안부는 피해 배상과 사죄를 제대로 받지 못했고, 결국 이용만 당했다 주장하시는 것 같다"며 "일부 오해가 있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국제적인 여성인권평화운동이 된 것에 자부…실수·오류 있다면 바로잡아야"

정의기억연대(정의연) 회계 부정의혹 등을 받고 있는 윤미향 더불어민주당 당선인(사진=윤창원 기자/자료사진)

 

1990년 11월 16일 발족한 정대협은 37개 여성·시민·종교·학생단체들이 모여 만든 연합단체다. 주요 활동은 일본 정부에 '위안부 강제연행 인정', '진상 규명', '공식 사죄', '법적 배상', '책임자 처벌', '역사교과서 기록', '추모비·사료관 건립'의 7대 요구 사항을 관철하는 것이다.

정대협 활동으로 92년 우리 정부는 피해자 지원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했고, 일본에서도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진상규명 움직임이 시작됐다. UN(유엔) 인권이사회에서는 '위안부 해결 촉구' 보고서를 채택하기도 했다. 김 선생은 이 같은 성과가 정대협 활동가를 포함한 수많은 운동가와 시민들의 지지, 그리고 무엇보다 피해자들의 용기 있는 증언 덕분이라고 강조했다.

김 선생은 "이 운동이 국제적인 여성인권평화운동으로 격상이 됐다. 지금은 전 세계가 공감하는 이슈가 됐다"면서 "어느 인권 단체도 이만한 공을 이룰 수가 없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더욱 최근 일어난 사태를 보며 마음이 아팠다고 한다. 김 선생은 "존귀한 존재인 우리 여성이 국가 권력에 의해 몸이 짓밟히고, 사죄와 진실을 드러내지 못하고 오히려 누군가는 왜곡해 '돈 벌러 갔다, 매춘 여성이다'며 인권을 유린하고 명예를 짓밟는 상황을 보고 분연히 떨쳐 일어났던 것"이라면서 "우리가 처음 시작했던 그런 정신이 다 훼손되니까 가슴이 아프다"며 눈물을 흘렸다.

김 선생은 "여러 단체가 연합한 것이지만, 사실 각자 본인들 단체 일이 바쁘다 보니까 정대협 일에는 집중을 못 하는 것도 있다. 실무차원에서는 상근대표가 여러 사업을 앞서서 추진해 나갔을 것"이라면서 "그 과정에서 민주적인 의견 수렴이 좀 소홀히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할머니들과의 소통이 막히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이 지금의 할머니와의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았나 싶다"고 조심스레 의견을 내놨다.

그러면서 위안부 운동이 지속되기 위해서라도 이번 사태를 계기로 드러난 일부 행정상의 실수나 회계상의 오류는 바로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제기된 여러 의혹에 대해서는 철저히 조사하고 밝혀서 책임져야 할 사람은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다.

◇"수요집회 중단엔 동의 못해…전쟁반대 평화운동으로 나아가야"

지난 1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후원금 논란 이후 처음으로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 가 열리고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자료사진)

 

김 선생은 이용수 할머니와의 개인적인 인연도 깊다. 초기 정대협에서 복지위원장을 맡으면서 피해 할머니들의 삶을 보살피고 지원해왔기 때문이다.

그는 "95년도에 이용수 할머니를 모시고 일주일가량 일본 각지를 돌며 증언집회를 다녔다. 할머니 모시고 다니며 행여나 할머니가 자존심에 상처는 받지 않을까, 다른 심리적인 문제는 없을까 살피면서 극진히 모셨다"며 "함께 고통과 기쁨, 보람을 나누면서 함께 성장하는 동지였다"고 이 할머니를 기억했다.

이어 "할머니가 서운하고 오해가 있었다면 우리와 좀 더 논의하고 대화를 해서 이 문제를 풀었어야 했다"면서 "할머니가 우리와 함께 걸어 왔던 그 동반자 관계 또는 동지의 관계를 이제는 파기하시려고 하는 거 같아 너무나 안타깝고 섭섭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김 선생은 할머니가 언급한 '수요집회 중단'과 '정대협 해체'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수요집회는 지켜가야 한다. 그곳에서 할머니들이 모자를 벗고 얼굴을 드러내며 일본을 향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면서 "남녀노소, 직업·계층·국적 상관없이 모여 공감대를 유지하고 목소리를 내왔다. 그곳은 연대의 장이자 교육의 장, 교류의 장이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할머니들이 계시지 않는 수요집회를 이제 우리가 연구해야 한다. 물론 영원히 수요집회를 할 수는 없겠지만, 아직 관철되지 않은 7대 요구 사항을 계속해서 이슈화하고 청소년과 시민들을 교육하기 위해 당분간은 지켜가야 한다"면서 "시민의식과 평화의식이 성장하는 장을 지속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김복동 할머니는 늘 '전쟁이 있어서는 우리 같은 피해자가 또 나온다. 그래서 전쟁 없는 사회가 돼야한다'는 말씀을 하셨다"면서 "평화 운동에 초점을 맞춰 우리 후배들을 교육하고 전쟁에 반대하는 '전쟁반대 평화운동'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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