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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택시운전사'로 5.18을 기억하는 광주 청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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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5-17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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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뜨거웠지만 참혹했던 1980년 5월의 광주
40년 전 민주화운동에 대한 생생한 증언
신군부 세력의 주장만 믿을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기억
밀레니얼이 생각하는 민주화운동이란?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40년이 흘렀다. 40년 전 광주에서 신군부 세력에 맞섰던 세대들이 기억하는 당시의 모습은 어땠는지, 광주가 아닌 지역에서는 이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그리고 민주화운동 이후 태어난 밀레니얼에게 민주화운동이란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5시 18분. 시계탑은 알고 있다' 5.18 민주화운동의 정신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옛 전남도청 앞 시계탑.

 

◇ "밤마다 총소리가 '피융'…6.25보다 더 무서웠제"

"많이 무서웠제. 살벌하고. 그때는 다 마음이 그랬을 것이야. 진짜 무서웠제."

40년 전 기억을 떠올린 홍명숙(73) 할머니의 표정은 이내 어두워졌다. 긴 시간이 지났지만 당시 경험한 참혹함은 그의 머리와 가슴 한편에 고스란히 자리 잡고 있었다.

광주 대인시장에서 40년을 넘는 세월 동안 어물전을 하는 홍 할머니. 고향은 서울 광진구 자양동이지만 결혼과 동시에 삶의 터전이 된 광주는 홍 할머니에게 '제2의 고향'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곳이다.

1980년 5월 18일 민주화운동 당시에도 시장에서 장사를 하고 있었던 홍 할머니에게 그날의 광주는 어땠을까.

'40년 전 기억이 생생하제' 1980년 5.18 당시에도 광주 대인시장에서 어물전을 하던 홍명숙 할머니.

 

"학생들이 (군인들에게) 잡히면 막 두들겨 맞고, 겁나 무서웠제. 그때는 집에서도 저녁이면 이불 덮어쓰고 있었어. 솜이불은 (총이) 못 뚫는다고 해서 애기들도 다 솜이불 덮고 가만히 있었지. 밤이면 '피융 피융' 소리가 막 났어. 총알 날아다니는 소리가. 그리고 젊은 여자가 '다 나와달라'고 소리치며 다녔지. 시민들 좀 나와달라고 했는데 무서워서 못 나갔지."

실제 솜이불이 총을 막을 수는 없지만 홍 할머니에게 솜이불은 광주를 폭력으로 물들인 신군부 세력으로부터 자신과 가족을 보호해줄 최소한의 보호막이었던 것이다. 그만큼 당시의 광주 시민들은 힘든 시간을 보냈다는 의미도 담겨있다.

"우리 어머니들도 6.25 전쟁 때보다 더 무서웠다고 했어. 아무에게나 총을 쏘니까 그때보다 더 무섭다고 하제. 그때는 너무 암담했지. 어디다가 연락도 못하고 무서움만 있었어. 도청 앞에 사람들이 모이면 총알 날아다니는 소리가 났어. 여기 시장 사람들도 다 겪었지."

민주화 운동 이후에도 두려움은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그리고 그 아픔은 40년이 지난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마음이 뒤숭숭했어. 어수선하고 편하지도 않았지. 도청에도 많이 갔는데 그때 시체도 많이 봤어. 학생들이 운동했던 곳도 가보고 전두환 (인형) 끄실리는 거 있어 화형식 한다고, 그것도 다 보러 다녔지. (전두환이) 어디 저수지에다 데모하던 사람들 빠뜨려 죽였니 저쨌니 얘기도 나와서 무서웠어. 전두환이 밉지. 그렇게 젊은 사람들을 많이 죽였는데 안 미울 수가 없지."

옳은 소리를 내고도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던 광주. 홍 할머니는 이런 광주를 그 누구보다 사랑한다고 전했다.

"지금은 광주가 너무 좋아. 살기도 좋고. 여기서 자식들 키우고 살았는데 미울 일이 없제. 그때는 진짜 무서웠는데 지금은 좋아. 또 광주가 피해가 없어. 코로나19 없고, 태풍불고 해도 큰 문제가 없고 모든 것이 사는 데 좋아."

◇ "폭동이라고만 알려줘서 그런 줄 알았어요"

경기도 안산에서 온 전하득(57), 김화숙(58) 부부는 5.18 민주묘지를 천천히 돌아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40년이 지났지만 경상도 출신인 이 부부에게 민주화운동은 새로운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때는 폭도로 알고 있었어요' 광주 5.18 민주화운동 당시 경상도에 있던 두 부부는 잘못된 정보를 바로 알고자 광주를 둘러보며 민주화운동 40주년을 다시 돌아봤다.

 

"1980년 당시 고등학생이었는데 민주화운동에 대해 거의 몰랐어요. 폭도(暴徒) 정도로만 들었기 때문에 그런 줄 알았죠."

언론을 탄압하고 광주 시민들을 폭동을 일으키는 단체로 규정해버린 당시 신군부 정권. 이에 광주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 소식을 접한 사람들 대부분은 그렇게 잘못된 정보에 속아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고 지낼 수밖에 없었다.

당시 정권은 사람들을 그렇게 만들었다. 이 부부 역시 그랬다.

"옛날 박정희 때는 너무 뭘 몰랐던 것 같아요. 대학시절에도 사실 겁이 많아서 적극적으로 (민주화운동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점점 어른이 되어갈수록 너무 모르고 살았던 게 찔리더라고요."

시간이 지나고 거짓이 아닌 사실에 눈을 뜨게 되자 광주라는 도시는 이 부부에게 다른게 다가왔다.

"책 등을 찾아보고 (민주화운동에 대해) 자세히 알고 꼭 광주를 가보자 했는데 40주년이 돼서야 오게 됐어요. 직접 눈으로 보고 싶어서 왔어요. 그래서 일부러 이번 여행을 '5.18 여행'으로 이름을 붙였어요. 도청과 상무대, 양동시장도 갈 예정이에요."

광주에 연고가 하나도 없는 경상도 출신 부부지만 광주는 이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 장소가 됐다.

"광주는 민주화의 성지랄까,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얘기하려면 5.18 광주를 빼놓으면 이상하다고 생각해요. 광주를 제대로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 너무 편하고 좋은 도시 같아요."

◇ '택시 운전사'가 밀레니얼에 전한 메시지

1980년 5월 18일에 일어난 민주화운동. 이 시대를 겪어보지 못한 밀레니얼(1982년~2000년 사이에 태어난 세대) 세대는 과연 민주화운동을 어떻게 의식하고 받아들이고 있을까.

광주에서 만난 젊은이들과 민주화운동을 겪은 세대의 연결고리에는 영화 '택시 운전사'가 있었다. 민주화운동 얘기를 담아낸 이 영화는 1200만 관중을 동원하며 광주에 대한 관심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데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다시 광주를 젊은이들이 기억하다' 5.18 민주화운동을 겪지 않은 밀레니얼 세대들도 그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끊임없이 공부하고 노력하고 있다.

 

전남대학교에 재학중인 김수빈(21) 학생도 "학교에서만 배운 내용을 토대로는 민주화운동에 대해 얘기할 것이 딱히 없었는데 '택시 운전사'를 통해 본 당시의 광주는 충격적이었다"고 전했다.

동신대학교를 다니는 박민호(24) 학생 역시 "영화를 통해 민주화운동을 많이 보게 됐는데 당시 시민들이 얼마나 아픈 기억을 갖고 있었는지 공감이 됐다"고 말했다.

'겪지 않았기 때문에 모를 것'이란 시선도 존재하지만 적어도 광주의 밀레니얼 세대는 아니었다.

"5.18에 대해 관심을 갖고나서 책을 찾아보거나 사람도 만나러 다녀봤어요. 엄마 역시 당시 광주에 계셨었고 그 기억을 갖고 계신데 아마 이런 분들이 꽤 많은 것 같아요. 광주에서 태어나면 자연스럽게 민주화운동에 대해 생각을 하고 기억하지 않을까요" (전하선·24)

"서울, 경상도 지역 친구들을 만나 얘기해보면 민주화운동을 자세히 배우지 않고 현장학습도 없으니 쉽게 '폭동'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럴 때마다 제가 자세히 설명해줘요. '폭동이 아니라 안타까운 사건이다. 이상한 걸 믿고 얘기하면 안 된다'고 조언했어요" (정승우·22)

지금의 광주를 있게 한 40년 전의 민주화운동을 잊지 않은 밀레니얼 세대. 이들은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그날의 광주를 잊지 않고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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