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영화사 삼순 제공)
※ 스포일러 주의두려움에 딸을 버린 엄마는 세월이 지나서도 여전히 두려웠다. 자신을 버린 엄마를 만난 딸 역시 담담하게 엄마가 밉지 않다고, 괜찮다고 하면서도 두려움까지 괜찮지는 않았나 보다. 그런 두 사람이 밑바닥에 숨겨둔 마음을 꺼내 놓고 서로를 진심으로 보듬게 된다. 영화 '바람의 언덕'은 이러한 화해를 통해 사람들의 마음에 따뜻한 바람을 불어넣는다.
'바람의 언덕'(감독 박석영)은 엄마가 되는 것이 두려워 새 삶을 찾아 나섰던 여자 영분(정은경)과 엄마가 지어준 이름처럼 씩씩하게 살며 외로움을 이겨내던 딸 한희(장선)의 서로 다른 인생이 교차하며 시작되는 클래식 드라마다.
5년을 함께한 윤식이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나자 영분은 자신의 짐 하나만 챙겨 홀로 고향인 태백으로 돌아온다. 모든 걸 뒤로 하고 새롭게 시작하고자 햇빛모텔에 자리 잡고 모텔 청소를 하며 살아간다. 내 고향에서 새 출발을 하고자 하는 게 영분의 마음이다.
영분은 자신이 버린 딸 한희가 태백에서 필라테스 강사로 지내고 있음을 알게 됐다. 딸이 자신을 보고 싶어 한다고 들었지만, 쉽사리 찾아갈 수 없다. 결국 딸이 보고 싶은 마음에 다리 밑으로 던져버린 명함을 겨우 찾아 딸이 하는 필라테스 학원을 찾는다. 어렵게 찾아갔지만 거기까지다. 차마 자신이 엄마라고 하지 못한다. 딸도 엄마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렇게 얼떨결에 영분은 딸과 수강생과 강사로 인연을 시작한다.
어긋난 모녀가 필라테스로 인연을 다시 시작한다는 건 흥미롭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누구보다 친밀하게 접촉하며 서로에게 다가간다. 균형이 맞지 않는 영분의 몸을 잡아가며 영분과 한희의 어긋난 사이도 조금씩 맞춰져 가는 것처럼 보인다.
엄마라고 드러내놓고 말하진 못했지만 영분은 한희를 살뜰하게 챙기려 한다. 한희 몰래 태백 곳곳에 필라테스 전단을 붙이며 다니고, 호떡을 사 들고 가는가 하면, 딸을 위해 잠옷 선물을 준비하면서 설렘을 느낀다.
(사진=영화사 삼순 제공)
둘이 조금씩 서로를 향해 다가가는 중에도 카메라가 그들의 외로움을 따라가며 강사와 수강생의 관계에서 표면화되지 않은 각자의 내면 깊숙한 곳을 조명한다. 영화는 각자의 모습, 타인과 함께하거나 서로가 마주한 모습을 통해 영분과 한희의 심리를 차곡차곡 쌓아내며 관객에게 깊이 있게 보여준다.
홀로된 후에야 겨우 딸의 이름을 불러보던, 전단 속 딸의 사진을 보듬으면서 눈물을 쏟아내던 영분은 한희가 자신이 엄마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모질게 군다. 엄마를 만난 딸에게 네가 밉다고, 억울하다고 온갖 가시 박힌 말을 한희에게 던진다. 그런데도 한희는 괜찮다고, 그냥 자신의 곁에 있으라고만 한다. 미움이나 원망보다 괜찮다는 한희를 뒤로하고 영분은 자기도 살고 싶다며 떠난다.
그렇게 끝날 것 같던 영분과 한희가 재회한 곳은 영화 내내 불어오던 바람 소리가 어느 곳보다 선명한 조그마한 언덕에서다. 한희는 거센 바람을 온몸으로 느끼며 홀로 오른 바람의 언덕에서 홀로 앉아 있는 엄마 영분을 발견한다.
한 차례 거칠게 마음을 토해내고, 그 거친 마음을 온몸으로 받아낸 영분과 한희가 미처 꺼내지 못한 두려움을 고백한다. 두려움을 드러낸 후에서야 아슬아슬 간신히 잡아둔 둘 사이가 제대로 균형을 맞춘다. 그리고 비로소 편해진 표정으로 바람을 맞으며 함께한다.
마음 가장 안쪽에 감춰둔 두려움을 꺼내놓을 수 있었던 것은 외로움과 두려움을 끌어안고도 자신을 지켜내 왔기에, 다가가고 감싸 안고자 한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렇기에 매서운 한겨울 태백의 언덕에서 맞이한 바람이 영분과 한희에게는 맑은 날 불어오는 하늬바람이 됐는지도 모른다.
둘의 모습을 보자면 화해의 의미를 다시금 깨닫고, 희망이라는 것을 찾게 된다. 영화가 차곡차곡 쌓아 올리며 응축한 감정은 마지막 장면에서 터져 나옴을 느낄 수 있다.
'바람의 언덕'은 '들꽃', '스틸 플라워', '재꽃' 등 꽃 3부작으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작가주의 감독 반열에 오른 박석영 감독이 연출했다. 감독은 두 여성의 이야기를, 엄마와 딸의 화해를 따뜻하고 희망적으로 그려냈다. 그리고 영분과 한희를 배우 정은경과 장선이 섬세하면서도 안정적으로 표현하며 몰입을 높인다.
4월 23일 개봉, 107분 상영, 전체 관람가.
(사진=영화사 삼순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