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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12일 새벽 쿠팡 소속인 40대 비정규직 배송 노동자가 숨진 채 발견되면서 배송 노동자들의 '휴식권'이 도마 위에 올랐다. 배송 노동자들은 코로나19 사태 장기화로 배송량이 폭증해 과로에 시달리고 있다며 '쉴 권리'를 보장하고 고용 안정성을 높여 건강한 배송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촉구했다.
◇ "물량 밀어넣고 '알아서 쳐내라'는 식…코로나탓 물량 늘어 더 힘듭니다"쿠팡 배송 노동자인 '쿠팡맨'들은 사측의 주문대로 배송 물량을 배정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입을 모았다.
지역, 캠프마다 상황이 다르지만, 쿠팡맨 1명에게 할당되는 목표 물량 평균치는 130~135가구. 코로나19 사태 장기화로 배송 물량이 폭증하면서 수도권 일각에선 주간 배송 물량이 180가구까지 치솟았고, 야간 배송은 150~160가구에 이르렀다. 코로나19 확진환자가 가장 많은 대구 지역의 경우 300곳 넘는 가구에 배송한 쿠팡맨도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공항항만운송본부는 이달 11일 기준 배송 물량이 지난해 8월보다 22% 증가했다고 밝혔다.
쿠팡맨 A씨는 "당초 기본 물량이 정해져 있지만, 현장에 있는 관리직 'CL(캠프리더)'들도 회사 윗선의 눈치를 보다 보니 물량을 밀어 넣는 식"이라고 말했다. 1년 8개월 차인 비정규직 쿠팡맨 B씨는 "쿠팡맨들이 배송해내면, 이게 '왜곡된 데이터'가 돼 평균 물량으로 잡히고 요구치가 계속 높아진다"고 지적했다.
신입 쿠팡맨들의 물량도 예외는 아니다. 쿠팡 측은 신입에게 50%의 물량만 배정한다고 밝혔지만, 현장에선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물량이 늘면서 하루 100가구 배송을 소화해야 하는 신입 쿠팡맨들도 많다. A씨는 "신입의 경우 입사 일주일에서 한 달 안에 75%까지 담당 물량이 올라오기도 한다"며 "수치상으로는 50%여도 가구 수로 따지면 적어도 6~70가구라 신입이 감당하기 쉽지 않은 물량"이라고 설명했다.
쿠팡이 새벽 배송을 강점으로 내세우면서 단계별로 도입하고 있는 '트루 돈(true dawn)' 시스템으로 야간 배송을 하는 쿠팡맨들은 오후 10시에 출근해 다음 날 오전 7시까지 2차례에 걸쳐 배송한다. 1차 배송을 마친 뒤 새벽 3~4시쯤 다시 캠프로 돌아와 신선 상품 등을 싣고 배송을 이어가는 식이다.
최근 새벽 배송 주문량이 늘면서 업무 강도가 더 높아졌다. 실제 배송에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이 더 빠듯해졌기 때문이다. 배송 노동자들은 "한 집당 3분꼴로 배송해야 하는 시간"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캠프로 다시 와서 2차 물량을 받는 데에만 1시간 가까이 걸린다"며 "짧은 시간에 배송하려면 속도를 높일 수밖에 없다. 쉬지 못하고 심리적 압박감에 시달리다 보니 여러모로 힘들다"고 토로했다.
홈플러스, 이마트 등 마트 배송 노동자들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특수고용 노동자인 이들은 사고를 당하거나 아파서 쉬더라도 대신 배송할 차량(용차)을 직접 구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코로나19 사태로 배송 물량이 증가해 용차 수요가 늘면서 용차 비용에만 80만원을 썼다는 노동자도 있다.
◇ "평가 대상인 비정규직 노동자의 안전·휴식은 뒷전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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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량 쳐내기' 행태가 이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배송 노동자들의 고용이 불안정하기 때문이라는 게 현장의 목소리다.
쿠팡맨들은 "1년 단위로 계약하는 비정규직으로 사측에서 나온 관리직들의 평가를 받아야 하다 보니 기본 물량을 넘어선 물량을 배정받아도 따를 수밖에 없다"며 "많은 물량을 배송하지 못하면 '노멀'에서 '라이트'로 내려가라는 무언의 압박을 받기도 한다"고 털어놨다.
쿠팡맨은 크게 '라이트' 레벨과 '노멀' 레벨로 나뉘는데, 근로 시간은 같지만 노멀 레벨이 물량 100을 배송한다면 라이트는 75를 배송한다. 기본급 40만원 가량이 차이 난다. 쿠팡맨들은 △배송량 △CL(캠프리더) 평가 △고객 경험 점수 등 5가지 항목에 따라 분기별로 평가를 받는다. 이를 토대로 포인트가 쌓이고 1부터 9까지 레벨을 부여받는다.
배송 노동자들의 안전이 뒷전으로 밀렸다는 지적도 나왔다. 신입 쿠팡맨들은 입사 첫날 캠프에 잔류해 교육을 받고, 둘째 날 선배의 차에 동승해 교육을 받는다. 보통 3일 차부터 현장에 투입된다.
1년 8개월 전 입사한 쿠팡맨 B씨는 "입사 당시만 해도 운전 교육을 2~3일 동안 받았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없다. 동승 교육 기간도 3일에서 하루로 줄었다. 예전만큼 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며 "최근 신입들 사고가 매우 많아졌다"고 지적했다. 한 가구당 주문한 물량이 많지만, 기사들 대부분이 배송 시간을 줄이기 위해 한꺼번에 많은 물량을 들고 계단을 오른다. 쿠팡맨 C씨도 지난해 새벽 배송을 하다가 발을 잘못 디뎌 인대가 파열돼 6개월 휴직 기간을 가졌다. 아파도 계약 해지나 정규직 전환 실패를 우려해 배송을 이어가는 이들도 있다.
노동자들은 '휴식권'과 '고용 안정성' 보장을 촉구했다. 이들은 "휴식은 법적으로 보장됐는데 왜 눈치를 봐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적정 물량을 배정해 '건강한 배송'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전문가들 "살인적 노동 거부하기 어려운 시스템…적정 임금 보장·처우 개선해야"전문가들은 임금 보장과 적정 노동시간 규제 등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김성희 연구교수는 "현재 시스템 하에선 일정 임금 수준을 충족하기 위해 장시간 노동을 할 수밖에 없다"며 "살인적 노동을 거부하기 어려운 시스템"이라고 꼬집었다.
김 교수는 "기본 급여가 일정 수준 보장돼야 장시간 노동을 유도하지 않는 시스템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며 "버스 운전 업무와 같이 생명·안전을 다루는 영역 등에선 노동 시간 규제를 하고 있는데, 다른 배송 영역에서도 적절한 방식이 도입될 필요가 있다.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고용노동행정개혁위원장을 지냈던 중앙대 사회학과 이병훈 교수는 "쿠팡이 처음에는 정규직을 고용하는 방식으로 배송 노동자를 운용하겠다고 하다가 '쿠팡 플렉스' 등 일반인들도 배송에 참여하는 식으로 전환하면서 배송 인력의 처우 개선에 제대로 된 지원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노사가 함께 개선책을 지속적으로 논의하고 사회 안전망 등 여러 제도를 손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쿠팡 측은 "업계에서 유일하게 배송 인력을 직고용하고 주 5일, 52시간제를 준수하고 있다"고 밝혔다. 쿠팡 관계자는 "쿠팡맨 개인 역량과 지역 여건 등을 고려해 업무량을 배정하고 있다"며 "최근 늘어난 주문량은 '쿠팡 플렉스' 인력을 늘려 감당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