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와 연구는 하나…'디지털의 아버지' 섀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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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2-25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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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글러, 땜장이, 놀이꾼, 디지털 세상을 설계하다' 번역 출간

MIT에서 강의하는 클로드 섀넌 (사진=곰출판 제공)

 

스티브 잡스나 빌 게이츠만큼 일반 대중에 익숙하지는 않지만 많은 공학자가 오늘날 정보기술(IT)을 가능케 한 위대한 선구자로 꼽는 인물 가운데 미국 천재 수학자 클로드 섀넌(1916~2001)이 있다. 미국 언론인 지미 소니와 작가 로브 굿맨이 지은 '저글러, 땜장이, 놀이꾼, 디지털 세상을 설계하다'(원제 A Mind at Play·곰출판)는 정보의 현대적 의미를 제시함으로써 오늘날 정보혁명의 토대를 닦은 섀넌의 일대기다.

섀넌은 불과 20세에 '20세기 가장 중요하고 가장 유명한 석사학위 논문'으로 불리는 '계전기와 스위치 회로의 기호학적 분석'에서 0과 1의 2진법, 즉 '비트(bit)'를 이용해 문자는 물론 소리·이미지 등 정보를 전달하는 방법을 제시해 디지털시대의 기초를 마련했다.

그 이전에도 '정보'는 존재했지만, 정보를 아이디어, 측정 가능한 양, 자연과학에 적합한 대상으로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섀넌 이후에야 비로소 전화 통화 한마디, 모스 부호로 작성한 전보 한 토막, 탐정소설 한 페이지는 모두 공통의 부호로 전환됐다.

미국 미시간주 작은 마을에서 나고 자란 섀넌은 어릴 때부터 타고난 '땜장이' 기질을 보여 가시철망을 이용해 전신선을 만드는가 하면 헛간에 간이 승강기를 설치하고 뒤뜰에서 쓸 개인용 수레를 만들었다.

그의 뛰어난 재능을 눈여겨본 바네바 부시는 자신이 일하던 MIT로 섀넌을 데려가 미분해석기라는 집채만 한 크기의 아날로그 컴퓨터 유지·보수를 맡겼다. 그의 석사 학위 논문이 나온 것은 여기서였다.

이후 바네바 부시는 물론 앨런 튜링, 존 폰 노이만과 같은 시대의 개척자들과 교류하며 협동 연구를 했고 암호작성술, 컴퓨터 제어 포격술과 같은 군사 분야 연구에 참여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루스벨트와 처칠을 연결한 대서양횡단 암호화 전화선에 관한 비밀연구를 수행하기도 했다.

전쟁 말기 벨연구소에 합류한 그는 여기서 '통신의 수학적 이론'이라는 또 하나의 기념비적 논문을 내놓는다. 전자들이 표상하는 아이디어가 객관적으로 측정되고 조작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증명함으로써 디지털화한 정보가 '오류 없이' 전송될 수 있음을 확인한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전화, 컴퓨터, 위성TV 회로는 섀넌의 통찰이 있었기에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섀넌의 생애는 천재다운 '엉뚱함'으로 점철됐다. 자신에게 쏠린 이목을 부담스러워해 은둔하다시피 하면서 전자 생쥐를 이용해 미로 문제를 풀거나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는 거북 모양 전자 장난감, 체스 컴퓨터, 최초의 웨어러블 컴퓨터, 맞춤형 외발자전거 같은 것을 만드는 데 몰두했다.

벨연구소를 거쳐 모교 MIT에서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에도 두 손을 이용해 공이나 접시 따위를 연속적으로 공중에 던지고 받는 묘기인 '저글링'을 좋아해 틈만 나면 저글링을 즐겼을 뿐만 아니라 저글링에 관한 논문을 쓰기도 했다.

수십 년 동안 전 세계 최고의 대학, 학회들로부터 명예박사 학위나 상장, 메달을 받은 그는 명예박사 학위와 함께 받은 박사모가 너무나 많아 회전식 넥타이 걸이에 걸어둘 정도였다. 그렇듯 명성과 명예를 대단치 않게 생각한 그였지만 라틴어 식으로 '매사추세츠 저글링 대학(MASSACHVSSETTS OF JVGGLOLOGY)'이라고 새긴 그리스 신전 모형 앞에서 피에로가 저글링을 하는 모습을 담은 상패는 소중히 여기고 아꼈다고 한다.

이런 세계적인 명성에도 불구하고 섀넌은 1959년 물리학상 후보로 오른 적이 있을 뿐 노벨상을 받지는 못했다. 엄밀히 말해 그는 물리학자가 아니라 수학자였고 수학은 노벨위원회가 시상하는 분야가 아니었다.

명석한 섀넌도 1980년대 초부터는 익숙한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짧은 시간 기억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1983년 의사를 찾은 그는 알츠하이머 '초초기'라는 진단을 받았고 그 후 병세는 점점 악화해 1993년이 되면 과거의 일을 질문받고는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답할 정도에 이른다.

그가 선도한 디지털 시대가 활짝 열렸지만, 섀넌에게는 그것을 기뻐할 감정도, 그것을 평가할 지적 능력도 남아있지 않았다. 1993년 넘어져 고관절이 손상되는 바람에 병원을 거쳐 요양원에 입소한 섀넌은 결국 그곳에서 세상을 떠난다.

저자들은 "섀넌은 평생 호기심 가득한 얼굴과 신중한 자세로 놀이에 전념했다. 디지털 회로를 개척하는 동안에도, 손에 잡히는 재료를 이용해 저글링 로봇이나 불을 뿜는 트럼펫을 후다닥 만들어내고 흐뭇해하는 희귀한 과학 천재였다. 연구는 놀이처럼 재미있게, 놀이는 연구처럼 진지하게 했으며 연구와 놀이의 차이를 전혀 인식하지 않았다"고 썼다.
양병찬 옮김. 476쪽. 2만2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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