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여성 감독들의 '즐거운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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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주목할 여성 감독 ②]
자기 능력을 의심하고, 네트워크 부족 문제로 막막함 느껴
선의의 경쟁자이지만 서로 작품 추천하고 격려
포럼-합동 GV 통해 고민과 작품 감상 나누기도

영화진흥위원회 한국영화성평등소위원회가 2009년부터 2018년까지 10년 동안 개봉작 감독 성별을 조사한 결과 여성 감독은 평균 9.7%에 그쳤다. 여성 감독은 여전히 '소수'이며, 한 작품과 다음 작품의 사이도 남성 감독보다 길고, 상업영화에 안착하는 경우가 드문 것이 현실이다. 이 같은 상황이 너무 오래된 탓에, 여성 감독은 너무 쉽게 '여성 감독'이라는 틀 안에 묶이고 만다. 그래서 이 기획은 '여성 감독'이라는 범주보다는 '지금 주목할'에 방점을 찍고자 했다. '보희와 녹양' 안주영 감독, '밤의 문이 열린다' 유은정 감독, '우리집' 윤가은 감독, '벌새' 김보라 감독, '메기' 이옥섭 감독, '아워 바디' 한가람 감독 등 관객들에게 자기 세계를 펼쳐보인 여섯 명의 '신예' 여성 감독을 들여다본다. 그들이 연출한 작품, 각자 가진 고유한 개성, 앞으로 펼치고자 하는 작품 세계에 관해. [편집자 주]

올해는 어느 때보다 독립·예술영화계에서 여성 신예 감독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윗줄 왼쪽부터 안주영 감독의 '보희와 녹양', 유은정 감독의 '밤의 문이 열린다', 윤가은 감독의 '우리집', 김보라 감독의 '벌새', 이옥섭 감독의 '메기', 한가람 감독의 '아워 바디'. 윤 감독만 '우리집'이 두 번째 작품이고 나머지는 모두 장편 데뷔작이다. (사진=각 제작사 제공)

 

"지금도 많은 여성 감독들이 작업을 하고 있어요. 근데 남자 감독님들 독립영화가 나왔다고 해서, 영화가 많이 나왔다고 해서 그걸 특별히 얘기하진 않죠. 너무 여성 감독들의 영화가 적었기 때문에 그런 얘기가 나왔던 것 같아요. 꾸준히 노력하고 있었는데 지금 딱 어떤 시간과 그런 노력이 쌓여서 지금 기류를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저도 2009년부터 꾸준히 단편영화 작업해 와서 2019년에 개봉한 것처럼, 다른 분들도 꾸준히 작업하고 있었는데 앞으로 이게 좋은 영향을 미칠 것 같아요. 저도 앞세대 감독님들 보고 영화 하고 싶다고 마음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제 아래 친구들이 또 '벌새'나 '우리집'이나 '메기'를 보고 '나도 찍을 수 있을지 몰라'라는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이 기류가 태풍이 돼서 (웃음) 휘몰아쳤으면 좋겠어요. 이미 '우리집'이나 '벌새'에 되게 많은 관객이 찾아주고 계시잖아요. 호감을 만들어주신 것 같아요. 저희 '메기'도 호감을 갖고 봐주실 거라고 믿어요." _ 2019년 9월 17일, '메기' 언론 시사회 당시 이옥섭 감독

올해 8~9월은 독립·예술 영화 가운데 여성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 활발하게 개봉한 시기였다. 유은정 감독의 '밤의 문이 열린다'(8월 15일 개봉), 김보라 감독의 '벌새'(8월 29일 개봉), 이옥섭 감독의 '메기'와 한가람 감독의 '아워 바디'(모두 9월 26일 개봉)까지 4편의 영화가 관객들을 찾았다. 그보다 조금 앞선 5월 29일에는 안주영 감독이 첫 장편영화 '보희와 녹양'을 내놨고, '우리들'로 놀라운 성취를 보여준 윤가은 감독이 두 번째 작품 '우리집'을 8월 22일 개봉했다.

각각 관객들을 만나고 평가받아야 하는 여성 감독들은 어찌 보면 '경쟁자' 관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다채로운 작품이 극장에 걸리게 된 것을 반가워하며, 타 작품도 거리낌 없이 언급하고 나아가 격려와 지지의 뜻을 보냈다. 합동으로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해 배우와 감독이 서로 감상을 나누기도 했다.

◇ '여성 감독'들이 영화를 만들며 간절히 바랐던 것 '연결'

지난 6월 21일, 서울독립영화제 2019 집행위원회는 사전 토크 포럼 '올 어바웃 퍼스트 피처 필름(All About First Feature Film)-우리는 어떻게 첫 장편영화를 완성했는가'를 열어 네 명의 여성 감독을 초대했다. '보희와 녹양' 안주영 감독, '밤의 문이 열린다' 유은정 감독, '벌새' 김보라 감독, '아워 바디' 한가람 감독이 모여 첫 장편 영화를 만드는 과정을 청중과 공유했다.

이날 토크는 '보희와 녹양', '밤의 문이 열린다', '벌새', '아워 바디'라는 개별 작품에 관한 더 자세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한 명의 창작자로서 한 편의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거쳤던 과정, 여기에 '여성 감독'이라서 조금 더 특수했던 상황 등을 고루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더 귀한 시간이었다. 여성 감독들의 경험담을 종합하면, 이들은 보고 따를 롤 모델이, '연결되어 있다'는 안정감이, 한편으로는 본인 작품에 대한 '확신'이 필요했다.

'벌새' 김보라 감독은 "대학 동기 중에서 저 혼자 데뷔했다. 제가 잘나서가 아니다. 동기들이 아름답고 빛나는 단편 만들었던 걸 기억한다. (저는) 감사하게 운 좋게 장편 만들기까지 견뎠다고 생각한다"라며 "영화 만드는 사람(여성) 자체가 없다. 롤 모델을 찾을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이어, "여성 감독들은 너무 재능이 많은데도 의심의 끝으로 몰아간다"라며 "내면의 불확실이 저를 가장 힘들게 했다"고 털어놨다.

지난 6월 21일, 서울 종로구 관수동 인디스페이스에서는 서울독립영화제2019 사전 토크 포럼 '우리는 어떻게 첫 장편영화를 완성했는가'가 열렸다. 안보영 프로듀서 사회로 진행된 행사는 유료였음에도 객석에 빈자리를 찾기 어려웠다. '벌새' 김보라 감독, '보희와 녹양' 안주영 감독, '밤의 문이 열린다' 유은정 감독, '아워 바디' 한가람 감독이 참석했다. (사진=김수정 기자)

 

'밤의 문이 열린다' 유은정 감독은 "제가 들은 어떤 말이 떠올랐다. 여성영화제는 갈 수 있겠네. 근데 상업(영화) 가려면 진짜 잘 찍어야 하는데 할 수 있겠어?' 실습작 가져갔을 때 그러더라"라고 운을 뗐다. 유 감독은 "제가 가장 난처했던 건 네트워크였다. 나를 지지하고 나와 같이 영화 만들 사람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항상 주저하게 됐다. '내가 사교적이지 않아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던 것도 있다"라며 "영화를 잠깐 쉬었던 것도 나의 네트워크에서 벽을 느꼈던 것(이유)도 없지 않았다. (이게) 내가 여성이라는 것과 아예 무관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라고 밝혔다.

'보희와 녹양' 안주영 감독은 "저도 사람한테 다가가지 못하는 게 있고 네트워크에 대한 고민이 있어서 학교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해도 모자란 느낌이 들었다"라며 "장편 찍는 데까지 전체적인 길이로 보면 되게 오래 걸렸는데, 어쨌든 지금 감독님과 다른 동료들 만나서 많이 배우고, 배운 걸 가지고 (한국영화)아카데미 가서 동기들과 주변에서 영화 찍는 친구들한테 또 많이 배웠던 것 같다. 같이 영화를 하는 사람들이 생기면서 심리적 안정감이 생겼다고 할까"라고 돌아봤다.

◇ 좋은 영화 같이 보고 이야기 나누고, 호감을 드러내며 '지지'하기

'영화'라는 공통 분야가 있는 비슷한 또래의 여성 감독들은 같은 링 위에 경쟁자로서가 아니라, 긍정적인 자극과 영감을 주는 '동료'로서 새로운 시도를 하기 시작했다. 지난달부터 본격화된 합동 GV(관객과의 대화)가 대표적이다. 지난달 6일과 11일 두 차례 진행된 '우리집'X'벌새' GV는 '우리집'과 '벌새'의 두 감독이 공동 참석해 이야기를 나눴다. 예매가 열리기 전부터 큰 관심을 모았던 행사는 금세 매진됐다.

'우리집' 윤가은 감독은 영화 '벌새'에 관해, '벌새' 김보라 감독은 영화 '우리집'에 관해 느낀 점을 한 명의 관객이자 연출자로서 풍성하게 나눴다. 덕분에 관객들은 김 감독이 '우리집'을 시작하게 된 원형적인 이미지가 무엇인지, 하나(김나연 분)의 한숨이 디렉션의 결과인지 등을 궁금해하고 아이들이 싸우는데도 맑고 아름다워 보여서 좋았다든가, '왜 나를 낳았냐?'는 찬(안지호 분)의 대사에 공감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벌새'를 보고 난 윤 감독은 6년 가까이 한 이야기를 오롯이 붙잡고 가는 김 감독의 의지에 감탄하면서도 혹시 이 시기 가장 크게 다가온 위기가 무엇이었는지, 또 영화 개봉 후 힘이 된 말은 어떤 것이었는지 궁금해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동료 창작자로서 '벌새'에 놀랐던 지점을 터놓기도 했다.

"저한테 가장 놀라웠던 지점은… ('벌새'는) 굉장히 많은 여성 감독들이 꿈꿨던 이야기의 형태라고 할까요. 사실 영화라는 게 시간 예술이고 특정한 시간 동안 기승전결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죠. 어떤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려가고 하나의 펀치 라인이 있고 하나의 주제에 대해서 말하기도 벅차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영화를 쓸 때 이걸 다 담고 싶지만 쳐내야 되는 경우가 있어요. 내공의 문제일 수도 있고요. 어떤 하나를 선택하기도 급급한 마음인 거죠. 소문을 이미 듣고 영화를 본 상태에서도 저한테 가장 놀라웠던 건 그냥 그 어떤 순간에 중학생 소녀가 겪는 삶 자체를 다루고 있는 느낌이랄까요? 한 편의 영화가 인간의 삶을 희로애락을 다 담고 있지? 이게 놀라운 지점이라고 느꼈어요. 산문, 시집 같은 문학에서 본 적은 있지만 영화의 형태로 한 사람의 삶으로, 결국 모두의 삶을 대변하는 구조의 이야기는 처음 만나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지난달 23일 저녁, 서울 종로구 관수동 인디스페이스에서 영화 '밤의 문이 열린다'와 '벌새'의 '함께 인디토크'가 열렸다. 왼쪽부터 김현민 영화 저널리스트, 김보라 감독, 한해인, 박수연, 전소니, 이승연, 유은정 감독 (사진=김수정 기자)

 

합동 GV는 '밤의 문이 열린다'X'벌새'로도 이어졌다. '밤의 문이 열린다' 유은정 감독은 "'벌새'는 하나의 용기였던 것 같다. 만드는 사람, 관객으로서의 저한테도 하나의 용기가 되어주었다"라며 "저한테 '벌새'가 하나의 용기인 것은 너의 부분들이 소중하고 가치가 있다고 말해주기 때문이다"라며 "이 이후에 영화를 만들거나 (여러 형태로) 창작하시는 분들이 분명히 '벌새'의 좋은, 긍정적인 영향을 받을 거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김 감독은 "사실 저는 한국영화 중 20~30대 여성을 제대로 그린 영화를 많이 못 본 것 같다. 드라마에서 그려지는 것도 너무 비현실적이고. 그런데 '밤의 문이 열린다' 보고 굉장히 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라고 밝혔다. 이어, "혜정을 좋아하는 남자분이 혜정이 묵묵히 일하는 모습이 너무 좋고, 자기도 삶의 의미를 찾았다는 얘기를 하는데 진짜 제가 생각했던 가장 로맨틱한 장면이었다고 생각한다"라며 "민성의 고백을 보고 너무 로맨틱해서 소름 끼쳤다. '네가 예뻐서, 상냥해서, 귀여워서 좋아해'가 아니라 일하는 모습을 좋아한다니. 어떤 영화에서도 쉽게 들어보지 않은 고백이었다. 그리고 샤방샤방한 관계 이어짐이 아니라 영화가 끝난다는 게 되게 좋았다"라고 감상을 전했다.

지난달 24일에는 메가박스 아트나인에서 여성 감독 네 명의 단편을 모은 특별전이 열리기도 했다. 김보라 감독의 '리코더 시험', 윤가은 감독의 '콩나물', 이옥섭 감독의 '4학년 보경이', 한가람 감독의 '장례난민'이 상영됐다. 올해 장편 데뷔작과 두 번째 작품(윤가은 감독 '우리집')으로 관객들을 만난 여성 감독들이 단편에서 보여준 개성을 한 자리에서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 각자 자리에서 치열하게 작업한 결과 나타나 반가워

여성 감독들의 영화가 연이어 개봉하는 최근의 흐름을, 당사자들 역시 반가워했다. 김보라 감독은 지난 8월 CBS노컷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자기를 작게 두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가 가능성이 많고 나눠야 할 이야기가 많은 만큼, 서로 여성들끼리 힘을 모아서 좀 새로운 물결을 만들 수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이어, "정말 최근에 영화 '우리집', '아워 바디', '밤의 문이 열린다', '메기' 등이 나와서 너무너무 기쁘고 같이 뭔가를 해나갈 수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되게 감사하다. 많은 영화가 한꺼번에 개봉하는 것을 관객들도 좋아하는 게 보인다"며 "정말 잘되기를 응원하고, 함께 물결을 바꾸는 그런 해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전했다.

이옥섭 감독과 한가람 감독도 최근 CBS노컷뉴스와의 서면 인터뷰를 통해 응원과 지지의 뜻을 전해왔다. 이 감독은 "각자의 자리에서 꾸준히 치열하게 작업해 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는 서로를 격려하고 응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지금도 끊임없이 작업 중인 여성 감독들이 많다는 것도 알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최근 여성 감독의 작품을 주목하는 것은 서로 비슷한 시기에 작품이 발표되어 더 눈에 띄었을 것이다. 여성 감독의 영화가 더 이상 여성 감독의 영화라고 칭해지지 않을 날까지 우리는 계속 영화를 만들 것이다. 앞으로 무수히 많은 감독들의 영화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해줄 것이다. 이 좋은 기운들을 받을 수 있어 기쁘다"고 말했다.

지난달 24일에는 서울 동작구 사당동 메가박스 아트나인에서 김보라, 윤가은, 이옥섭, 한가람 감독의 단편영화를 모아보는 특별전이 열렸다. (사진=아트나인 공식 트위터)

 

한 감독은 "여성 감독님들의 영화가 연이어 개봉하는 것을 보면서 왠지 반갑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 감독들의 활동에 대한 언론 기사들을 보면서 문득 고등학생 때가 떠올랐는데 그 당시 청소년 영화제에서 똑같은 반응이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에 비해 여학생들의 작품이 많이 출품되고 수상도 많이 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는데 그때 친구들이 자라서 현재 영화를 왕성하게 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한 감독은 "'아워 바디'를 공개한 후 여성 스태프가 많고 등장인물의 상당수가 여성이라는 것에 주목을 많이 받았다. 그동안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가 그만큼 드물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성 스태프가 많다는 것이 특이사항이라는 말에는 좀 속상했다. 남자 감독, 남자 PD, 남자 조감독이 함께 일하는 모습은 당연한데, 이 세 사람이 모두 여성이 될 수 있었던 과정에 대해 질문을 받는다는 것이 의아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여성 감독이나 여성 주인공도 여성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의 독립된 주체로서 무슨 이야기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아카데미에서 수업을 들을 때 한 감독님께서 여성들이 감독으로 일하기에 영화계의 현실이 어려운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몇 년이 더 지난 후에는 감독의 성별이 주목받지 않을 만큼 더 많은 여성 감독들이 여러 장르에서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었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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