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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에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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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0-12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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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사건에서 드러난 대한민국 국가 공권력의 '야만성과 폭력성'

사진=연합뉴스 제공

 

이춘재가 '화성연쇄 살인의 8차 사건도 내가 저절렀다'고 자백한 직후인 10월 7일 오전 일찍 후배와 함께 당시 사건 현장인 경기도 화성시 진안동으로 차를 급히 몰았다.

사건 현장을 직접 찾아보고 8차 사건 진범으로 검거돼 20년간 옥살이를 했던 윤성여씨의 행방을 수소문하기 위해서였다. 그 시점에서는 윤 씨에게 직접 억울한(?) 옥살이 실상을 듣는 것이 다급했다.

먼저 도착한 곳은 1989년도 7월 검거 당시 윤 씨가 일했던 농기구 수리센터가 있던 곳이었다. 지금 수리센터 흔적은 일체 사라졌고 빌딩이 들어서 여러 가게가 영업을 했다.

30년이 지난 동안 그때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것은 극소수의 화성 주민을 제외하면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인근에서 토박이로 살고 있는 서예원 사장님을 먼저 만났다.

"윤성여는 지금 화성에 살지 않는다. 지금 어디 사는지도 모른다. 그 당시 살던 사람들 화성을 떠나고 남아 있는 사람 몇없다. 고아이고 다리를 절어 마을 사람들이 그 사람을 안쓰러워했다. 제대로 걸을 수가 없는 애였다. 성격도 착했고 나쁜 짓 할 아이가 아니다. 잡혀가는 날에도 그날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도 이상하게 생각했다. 이춘재가 자백하니까 가족들이 이제야 나오는데 그 당시에는 가족 없이 혼자 살았다. 윤성여가 일했던 농기구센터는 사거리에 있는데 현재는 그 가게가 없고, 그 사장님 가족도 안성으로 갔다는 말은 있는데 모르겠다."


마침 구 농기구센터 인근에서 오토바이를 수리하는 사장님도 만나 봤다.

"윤성여를 잘 안다. 잡혀가는 날도 봤다. 걔는 그런 짓 할 애가 아니다. 그 당시에 웬만한 남자들은 다 경찰에 잡혀갔다. 가서 맞고 오고 그랬다. 나는 안 잡혀갔다.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 건물에 농기구센터가 있었다.

거기서 먹고 자면서 일했다. 그 사장이 안쓰러워 해서 챙겨줬다. 윤성여 가족도 없이 살았는데 이제야 누구라고 나타나니 이상하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윤 씨 흔적을 찾아 계속 수소문했지만 연결되지 않고 헛수고 였다.

농기구센터가 있던 자리에서 불과 5백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이춘재 가족이 살고 있는 아파트가 있었다. 그 거리가 그 거리였다. 이춘재가 자라고 돌아다닌 동네. 한 주민은 "이춘재 가족이 최근에 이사한 것으로 안다"고 귀띔했다.

8차 화성사건은 1988년 9월 15일 23시 경에 발생했다. 수원지방법원 1심 판결문을 읽어봤다. 판결문 내용은 채 두 쪽 분량도 되지 않았다. 내용이 너무 빈약하다. 당시로서는 아무리 명백한 살인 사건이라고 하지만 판결문이 겨우 두 쪽 밖에 안된다는 것이 매우 놀랍고 새삼스럽다.

기자들은 오늘날 경찰이 검찰에 신청한 '구속영장 서류'를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기자의 초년 시절에는 검찰이 청구한 구속영장 신청서를 법원에서 보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1심 법원의 판결문은 당시의 구속영장 신청서나 별반 차이가 없었다.

'무기징역'이라는 사형 다음의 엄벌을 처하면서 법관은 어쩌면 판결문을 이리도 단순하게 구성할 수 있었을까?

이춘재의 청주 처제살인사건과 화성 8차 살인사건의 판결문에 나오는 정보를 토대로 당시 변호인과 검사들을 찾아 나섰다. 그들의 행방을 찾는 것 또한 쉽지 않았다. 대개는 70대 후반이나 80세의 연세를 넘긴 분들이었다.

두 사건 변호인들은 모두 국선변호인들 이었다. 이춘재 처제살인의 대법원 판결에 이름을 올린 국선변호인 가운데는 전직 법무장관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 "이춘재 이름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사건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30년의 세월과 함께 기억도 날아갔을 것이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당시 사법시스템에도 큰 구멍이 있었다. 이춘재나 윤성여씨 모두 국선변호인들을 쓸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당시 국선변호인 제도는 '사건에 변호인 이름만 올리는 맹탕제도'였던 것 같다. 제도는 '인간의 얼굴'을 가진 것이었지만 허울 좋은 인권 보호 수단'에 불과했다.

윤성여 씨의 2심 재판 판결문에는 N 국선변호인이 등장한다. 그러나 N 당시 변호인은 "내가 그날 서울고등법원에 있는데 갑자기 윤 씨의 항소심 결심 공판에 참석하라는 연락을 받고 급히 갔다"고 말했다.

N 판사는 항소심을 진행했던 윤 씨의 이전 국선 변호인을 만난 적이 없다고 말했다. 결심 공판에 나섰지만 누구로부터도 항소심 진행과정을 설명 듣거나 자료를 인계 받지도 않았다고 한다. 재판은 형식적인 국선변호인제 아래에서 살인의 동기나 정황,직접증거, 간접증거에 대한 논란없이 일사천리로 진행됐을 것이다.

화성 8차 사건 재심을 맡은 박준영 변호사는 JTBC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수사 과정에서 위법도 충격적이었지만 이분이 가난했고 배우지 못했습니다. 초등학교를 나오지 못했거든요. 게다가 소아마비 장애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분, 이런 사회적 약자에게는 제대로 된 변호인의 조력이 필요한데 윤 씨의 진술에 의하면 1, 2, 3심 재판 과정에서 국선변호인의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분은 2중의 불이익을 받았다라고 볼 수 있는데 이게 안타까웠습니다"


이춘재와 윤성여 사건은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 한국 사법제도의 비인권적 실상을 적나라하게 투시하고 있다.

화성 8차 사건의 '진실'을 찾아 나선 경찰 관계자의 탄식을 들어보자.

"검찰도 당시에 내용을 그대로 기소해서 유죄를 받았으니 경찰이나 검찰이나 법원이 다 한통속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경찰이 수사하면 검사가 걸러주고 문제가 있으면 가혹행위를 했다든지 이렇게 했으면 그걸 인용을 하지 않고 해야 하는데….

법원에서도 자백의 임의성이 인정된다고 해버렸고 검사도 보니까 조금. 경찰이 그때당시 가혹행위를 하고 (밤샘조사를 하고) 그런게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런거를 뭐 그냥 용인해 버린 거죠. 검사도 알면서 검사도 현장에도 나오고 그랬던 것 같은데….

그래서 그런 상황들이 저희가 다른 정황이나 증거에 의해서 새롭게 맞춰야 하니까, 그것이 어렵죠"


화성으로 출발하기 이전부터 화성에서 돌아오는 오후 내내 줄가차게 '비'가 내렸다. 가늘게 기복없이 내리는 '비'였다. 때로는 옅은 안개도 내렸다. 화성 사건도 이렇게 비·안개속에 묻혀버린 것이 아닐까.

과학수사 기법의 발달은 30년 전 대한민국 국가 공권력의 '무지함'과 '야만성'을 민낯처럼 들춰 내고 있다.

경찰은 그 날의 진실을 찾기 위해 '퍼즐'을 다시 맞춰 가고 있다. 하지만 생존해 있는 국가 공권력의 당사자들은 "최선을 다했고, 가혹행위도 없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당시 관점에서 보면 '최선을 다했다'는 그들을 타박하는 것도 부질없는 일인지 모르겠다.

화성에서 비가 오는 날,

국가공권력의 '폭력성'을 거듭 질문해 본다. '가혹행위, 형식적 국선변호인제'는 사라졌지만 또다른 국가 공권력의 야만성이 지금은 사라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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