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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시국치안이 키운 살인마 이춘재…경찰 사과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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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연합뉴스)

 

지금은 어엿한 신도시로 평가 받고 있는 경기도 화성.

성폭행과 살인의 도시로 오명을 뒤집어쓴 적이 있는 도시가 화성이다.

화성은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한적한 농촌의 모습을 지녀 곳곳에 야산과 농로가 즐비한 곳이었다.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까지 숱한 사건사고 현장을 다닌 기자들조차도 밤에 화성에 취재를 가라고 하면 꺼리는 곳이었다.

이유는 화성연쇄살인사건이었다.

7차(1988년 9월 7일), 8차(1990년 11월 15일), 9차(1991년 4월 3일) 화성연쇄살인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짧게는 2주일에서 길게는 2개월가량 취재를 했던 곳이라 화성이라는 단어만 나와도 긴장되면서 '또~'라는 말이 나왔다.

8차와 9차 사체 유기 현장과 희생자의 이름 등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할 정도로 화성연쇄살인사건은 당시 취재 기자들에겐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은 사건이었다.

영화 [살인의 추억]을 보지 않고서도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다.

연쇄살인범이 DNA 추적을 통해 이미 구속된 이춘재로 드러나자 30년의 체증이 내려가는 안도감을 느끼면서도 당시 경찰 수사의 문제점이 스멀스멀 도리질을 하듯 떠오른다.

당시의 경찰 수사는 순전히 형사들의 감각과 그동안의 경험에 의존한 수사였다.

화성에서 일곱 번째의 살인사건이 발생했다며 취재 지시를 받고 득달같이 달려가서 처음 접한 경찰의 브리핑은 범행수법이 6차까지의 화성사건과 같은 것 같기도 하고 다른 것 같기도 하다는 것이었다.

기자들은 누가 봐도 동일범의 소행으로 보이는데도 경찰은 애써 기존의 화성연쇄살인사건과 다른 자가 저지른 모방범죄 쪽에 무게를 두는 듯했다.

그리고 2년 2개월 뒤인 90년 11월 8차 사건이 터졌다.

충격 그 자체였다. 희생자는 여중 2학년생이었다. 범행도 엽기적이었다.

기자들이 당시 경찰 책임자에게 요구했다. 화성 전 지역 곳곳에 경찰의 초소를 설치해 전투경찰을 배치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화성에서 밤길을 다닐 수가 없는데도 경찰 고위층들은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시국이 너무 어수선했다.

이춘재가 첫 범행을 저지른 지난 86년 9월부터 6차까지의 87년 5월은 전두환 정권 퇴진을 위한 시위가 들불처럼 번지던 시절이었다.

이른바 경찰이 국민들의 안전을 지키는 '민생치안'은 뒷전이고 독재 정권 퇴진을 막기 위한 '시국치안'에 총동원되고 있었다.

군 복무 대신 전투경찰관으로 병역의무를 하고 있는 전경들은 민생치안 현장에선 찾아볼 수가 없었고 길거리의 시위 진압에만 투입됐다.

'백골부대'라는 시위진압 전담 경찰들이 우대받던 때였다.

당시 치안본부장(현 경찰청장)은 수사와 강력 사건통인 민생치안을 전담했던 출신이 아닌 정보와 경비라는 시국치안에 몸담았던 자들이 맡았다.

능력과는 무관하게 전두환 노태우 정권과 연이 있는 특정 지역 출신들이 교대로 임명됐었다.

희대의 살인마 이춘재가 시국치안에 모든 걸 걸고 있는 전두환.노태우 군부 정권의 경찰 속성을 비웃기라도 한 듯 7차, 8차, 9차 범행을 노태우 정권에서 저질렀다.

경찰이 이춘재가 연쇄살인사건의 용의선상에 올랐던 6차 사건(1987년 5월 9일)을 해결했다면 그 이후 발생한 40건 안팎의 성폭행 살인과 강간, 강간 미수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경찰은 6차 이전 사건에서 확보한 증거물을 통해 추정한 용의자의 혈액형(B형)과 이춘재의 그것(O형)과 달랐고 발자국이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용의자 리스트에서 제외했다.

그 때 경찰의 증거물이라는 혈액형과 족적은 경찰이 금과옥조처럼 여기던 범인의 증거물로 추정할 뿐이었기 때문에 발상을 전환했다면 이춘재는 용의자 권에서 벗어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목격자는 최근 30년이 지났는데도, 이춘재의 고교 시절 사진만 보고 "범인이 맞다"고 지목했으니 당시 경찰의 수사 방식이 얼마나 주먹구구식이었는지 알 수 있다.

(사진=연합뉴스)

 

경찰은 20대 중반의 나이와 키를 포함한 범인 인상 착의를 담은 몽타쥬를 배포했으면서도 몽타쥬 속의 얼굴과 실제 이춘재의 얼굴과 많이 닮았음을 인식하지 못했을까?

이춘재를 용의선상에서 배제한 것은 당시 경찰의 수사 역량이 한심했음을 여실히 보여준 것이다.

혈액형과 발자국만으로 용의자들을 하나둘씩 제외하다 보니 이춘재는 그 어떤 성폭행 사건 수사에서도 살아남아 청주에서까지 처제를 성폭행하고 죽이는 악행을 저질렀다.

7건의 연쇄 성폭행 사건과 지난 1987년 12월과 1989년 7월 수원 여고생 성폭행.살해 사건도 화성 연쇄 성폭행 살인 사건과 너무 흡사했지만 경찰은 쉬쉬했다.

수원여고생 살인 사건은 화성연쇄살인사건 지역으로부터 10㎞ 거리 내 위치한 곳이다.

화성과 수원의 성폭행 살인사건을 동일범으로 보고 수사를 벌였다는 흔적이 없다.

만약 경찰이 동일범의 소행으로 수사를 벌였다면 이춘재가 수원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는 사실도 부각됐을 텐데 아쉬운 대목이다.

1980년대 후반 수원의 두 차례 여고생 성폭행 살인 사건은 화성연쇄살인사건과는 전혀 별개의 살인 사건으로 처리됐다.

경찰의 사건 은폐, 축소, 조작은 사실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에서까지 남아 있는 고질적인 병폐였다.

민심이 요동칠까 두려운 나머지 큰 사건이 일어났다 하면 일단 감추고 보는 게 경찰의 습성이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도 은폐 조작하다 눈덩이처럼 커진 것이다.

당시에 경찰이 용의자들을 미행하지 않은 것도 문제였다.

이춘재(56)는 화성과 청주 처제살인 등 15건의 연쇄 성폭행 살인 사건 이외에 30건의 성폭행 범행을 추가로 저질렀다고 자백했지만 미행을 당했다거나 미행했다는 경찰의 기록도 없다.

자금의 경찰 수사에서는 CCTV나 혈흔, DNA 등은 가장 명백한 물증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정황과 범인의 인상착의, 주변 인물들의 동향 등도 과학적 수사 기법에 의한 물증 못지않게 중요한데도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수사는 물증도 아니었던 혈액형(B형)과 족적에만 의존한 수사였음이 밝혀진 것이다.

근래 들어 이춘재의 자백에 대한 브리핑을 하는 경기남부경찰청도 당시엔 DNA기법 수사가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야 살인마를 찾을 수 있었다는 투다.

책임 회피에 다름 아니다.

수고한 선배들의 수사 한계에 대해 뭐라 말하기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당시 수사의 허술함과 문제점을 짚어야 한다.

조국 사태에 가려서 그런지, 경찰은 화성연쇄살인사건을 포함해 이춘재의 악행들에 대해 전혀 책임이 없는 듯하다.

20~30년이 지난 다른 사건에 대해서는 과거사조사위원회를 구성해 착착 진상 조사를 하던 경찰청이 유독 화성연쇄살인사건에 대해서는 오불관언이다.

경찰청장은 사과해야 한다.

19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살인마 이춘재를 잡지 못해 억울하게 희생되었거나 성폭행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 피해자들, 그 가족들, 치안 불안에 떤 국민, 특히 밤길이 두려웠던 화성과 수원 시민들에게 사과해야 하지 않을까.

시국치안에 너무 매몰돼 민생치안을 소홀히 했던 책임은 전두환 정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닌 당시 경찰 수뇌부는 말할 것도 없고, 수사팀에게도 있으리라.

작금의 경찰 수뇌부들도 그 시절 경찰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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