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경기도 파주시 당하동의 한 양돈농가 통제초소 앞으로 오염 방지를 위해 뿌린 생석회가 두껍게 쌓여있다. (사진=고태현 기자)
지난 17일 국내에서 처음으로 아프리카돼지열병(ASF)이 발병한 이후 9건의 확진 판정이 나오는 등 ASF 사태가 장기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정부는 방역초소 증설, 살처분 범위 확대 등 ASF 확산을 막기 위해 차단 방역에 사활을 걸고 있지만 그만큼 일선 방역현장을 지키는 담당자들의 피로감도 높아지고 있다.
잔존물 처리를 위해 가축 분뇨 냄새가 진동하는 축사 안에서 끼니를 해결하고, 흩날리는 석회가루를 들이마시며 통제초소를 지키는 등 고충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비상근무를 마치고도 편히 쉴 수도 없다. 휴식시간은 보장돼 있는데도 산적한 업무로 인해 곧바로 사무실로 복귀해 밀린 업무를 처리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몸은 천근만근 무겁고 지치지만 "힘들다"라는 말도 할 수 없다. 국가재난에 준하는 비상사태를 막기 위해 그저 묵묵히 방역현장을 지킬 뿐이다.
◇분뇨 냄새, 석회가루 들이마시며 방역에 사활"흩날리는 석회가루로 목도 칼칼하고, 분뇨 냄새로 배가 고파도 입맛이 없어요.…비상근무를 마치고 사무실로 복귀해 밀린 업무를 처리하다 보면 몸은 녹초가 됩니다."27일 오전 경기도 파주시 당하동의 한 양돈농가. 파주시의 협조로 도착한 농장통제초소 주변 도로는 오염 방지를 위해 뿌려둔 하얀 석회가루로 뒤덮여 있었다.
방역복을 입고 마스크로 무장한 방역요원은 농장 출입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었고, 생석회가 두껍게 쌓인 초소에 다다르자 돼지 분뇨 냄새가 코를 찔렀다. 심지어 어지럽기까지 했다.
비상근무에 투입된 새내기 공무원 정모(여·9급)씨는 흩날리는 석회가루와 분뇨 냄새로 인해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지난 9일부터 공직생활을 시작했다는 정 씨는 "정부 방침에 따라 생석회를 5㎝ 이상으로 많이 도포하다 보니 지나가는 차량으로 석회가루가 많이 날려 목이 칼칼하다"라고 말했다.
이어 "마스크를 쓰고 있지만 아무래도 농가 옆이어서 분뇨 냄새도 많이 난다"면서 "8시간 동안 냄새를 맡다 보면 입맛도 떨어져 음식 생각도 나지 않는다"라고 털어놨다.
한편에 마련된 컨테이너 사무실 안에는 방역요원을 위한 물과 음료수, 과자와 컵라면 등이 박스째로 수북이 쌓여 있었지만 포장이 뜯겨진 박스는 1~2개에 불과했다.
예방적 살처분이 진행된 파주시의 한 양돈농가에서 작업자들이 잔존물 처리를 마친 축사시설에 오염 방지를 위해 생석회를 뿌리고 있다. (사진=파주시 제공)
◇간부 공무원도 예외 없어…비상근무 '솔선수범'비상근무는 간부급 공무원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파주시 한 인허가 부서의 나모(남·5급) 과장은 예방적 살처분이 진행되는 양돈농가의 잔존물 처리 작업에 투입된다.
작업이 한번 시작되면 끝날 때까지 축사를 빠져나올 수 없어 분뇨 냄새가 진동하는 축사 안에서 용역업체 직원들과 함께 미리 준비해 간 음식으로 끼니를 때운다.
나 씨는 "축사 안에서 음식을 먹는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체력 소모가 많다 보니 억지로라도 먹어야 버틸 수 있다"며 "잔존물 처리에 투입된 직원들은 혹시 모를 확산 방지를 위해 농장에서만 근무하게 된다"라고 말했다.
그는 소속 부서 직원들의 피로감은 더욱 높다고 했다. 인허가 부서의 특성상 담당자 외에 다른 사람이 업무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 씨는 "직원들의 경우 오전 8시부터 오후 4시까지 비상근무를 하고 곧바로 사무실로 복귀해 밤늦게까지 일하는 것이 반복되고 있다"며 "직원들의 사기를 생각해 나 자신부터 더 솔선수범 해질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파주시에 설치된 통제초소는 84곳으로 24시간 3교대로 운영된다. 직원 한 명 당 3일에 1번꼴로 근무가 돌아온다. 매일 380여 명의 공무원이 투입되며 경찰·군인·민간인 등을 포함하면 하루 900여 명이 방역현장을 지키고 있다.
지원 부서에서 근무하는 강모(남·6급) 팀장은 "ASF 발병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지만 파주에서 처음으로 발병한 것에 모든 직원들이 부담을 느끼고 있다"며 "큰 일교차와 체력 저하 등 악조건 속에서도 전 직원들이 힘들다는 말 한마디 없이 책임감을 갖고 방역작업에 참여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병역 담당자들이 파주시 한 양돈농가를 방문한 가축위생방역지원본부 차량 구석구석에 소독약을 뿌리고 있다. (사진=파주시 제공)
◇'행정 공백' 우려…인력 부족 해결돼야
돼지농장이 밀집해 있는 양주시와 포천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확진 농가는 없지만 ASF 유입되면 모든 것이 끝이라는 심정으로 차단 방역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포천시는 163곳의 통제초소를 운영하며 매일 700여 명을, 양주시는 37곳의 통제초소에 하루 평균 180여 명의 방역인력을 각각 투입하고 있다.
가축농가에 대한 방역관리는 오롯이 지자체의 몫이다. 경찰과 군부대의 협조로 인력을 지원받고는 있지만 공무원들이 집중 투입되면서 '행정 마비'라는 부작용도 나타나고 있다.
당장 다음 달부터 내년도 사업계획과 예산 수립, 복지와 교육 등 각종 수요 조사를 진행할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한 지자체 관계자는 "지금은 필수 인력을 제외한 모든 공무원을 투입해 방역작업을 벌이는데 문제는 없지만 사태가 장기화될 경우 업무 공백은 커질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이어 "자원봉사자 등 민간인 참여도 강제할 수 없는 만큼 정부가 나서 인력 부족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며 "조만간 ASF 차단을 위해 민간인을 고용해야 하는 시점이 오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다른 지자체 관계자는 "경기도는 지역 전담제와 재난관리 기금 지원 등 방역대책을 추진하고 있지만 일선 방역현장에 대한 인력 지원은 전무하다"면서 "이는 지역에서 알아서 하라는 식인데 지금이라도 거점 소독시설만이라도 도청 인력을 배치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