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라 감독의 단편영화 '리코더 시험'은 리코더 시험을 잘 보면 부모님을 모시고 연주회를 한다는 담임 선생님의 말에 시험을 잘 치르기 위해 리코더 연습을 열심히 하는 아홉 살 소녀 은희의 이야기다.
확대이미지
개봉 전부터 전 세계 유수 영화제 25관왕이라는 화려한 기록을 쓴 영화 '벌새'는 김보라 감독의 첫 장편영화다. 1994년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 사는 열다섯 살 중학생 소녀 은희(박지후 분)가 맞이하는 아주 보편적이고 가장 찬란한 기억의 이야기를 담았다. 한 소녀의 시선에서 시작하지만, 당시 한국사회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꼼꼼하게 살필 수 있다.
김 감독이 2011년 만든 단편 '리코더 시험'은 '벌새'의 바탕이 되는 작품이다. 배경은 1988년이다. 부모님이 방앗간을 한다는 점, 공부에 흥미가 없는 언니, 걸핏하면 은희(황정원 분)를 때리는 오빠, 좀처럼 은희에게 관심과 사랑을 주지 않는 가정 등 얼개가 비슷하다. 리코더 시험을 잘 보면 부모님을 모시고 연주회를 할 수 있다는 담임 선생님 말을 듣고, 열심히 리코더를 연습하는 은희의 이야기다.
지난 9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교동 KT&G 상상마당 시네마에서 제13회 대단한 단편영화제 김보라 감독 특별전이 열렸다. 김 감독의 단편 '계속되는 이상한 여행'(2002), '빨간 구두 아가씨'(2003), '귀걸이'(2004), '리코더 시험'(2011) 네 편이 상영됐다. 영화 상영 후, 김현민 영화 저널리스트의 사회로 김보라 감독이 참석한 관객과의 대화가 진행됐다. 이날 나온 이야기 중 '리코더 시험'과 관련한 부분만을 옮긴다.
이날 상영한 네 편의 작품은 모두 필름이다. 2011년 만든 '리코더 시험'도. 김 감독은 "아무래도 88년도 이야기이기도 하고, 그 정서를 살리기 위해선 필름이 맞겠다 싶었다"라고 말했다. 김 감독은 "'리코더 시험'을 만들었을 때, 사람들이 은희 삶에 공감해주고 은희를 캐릭터로서가 아니라 실제 사람으로서 대하는 느낌이 들었다. 실제로 '리코더 시험'이 끝나고 많이 질문하시더라. 은희가 어떻게 성장했는지 궁금하다고. 그 질문이 '벌새'라는 장편을 만든 계기가 되었다"라고 밝혔다.
이어, "아이가 엄마(박명신 분)에게 무언가 기대했는데 실망하는 그 감정으로 ('리코더 시험'을) 시작했다. '벌새'도 엄마한테 약간 거절당하는 듯한 느낌으로 시작하는데, 그 두 개(오프닝)가 결과적으로 비슷하게 됐다"라고 전했다.
영화에 나오는 오래된 아파트는 김 감독, 조수아 프로듀서, 연출팀이 재개발 아파트를 돌아다니며 발견한 장소다. 연출팀에서 조감독을 한 강유가람 감독이 재개발 아파트 지역에 관심이 많아 엄청난 자료를 갖고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서울에 있는 재개발 아파트 지역을 열심히 돌아다녔다는 게 김 감독의 설명이다.
은희의 집으로 나오는 아파트는 지금은 허물어진 정릉 스카이아파트다. 김 감독은 "어디를 찍을지 고민하다가 가가호호 띵동 (벨을) 눌러서 (예전) 인테리어를 여전히 갖고 계신 할머니를 만난 거다. 30~40년 동안 인테리어를 안 바꾸신 할머니 집이 있었고, 그분을 설득해서 찍었다"라며 "재밌는 거는 할머니 집의 문짝 하나는 좀 신식(새것)이었던 거다. 문짝을 제작하기엔 좀 비쌌다. 그래서 문짝을 빌려서 찍었다"라고 말해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
'리코더 시험'은 많은 부분 '벌새'와 비슷한 설정을 공유한다. 은희의 아빠 역은 '리코더 시험'과 '벌새' 두 편 모두 배우 정인기가 맡았다. 극중 부모가 방앗간을 운영하는 것도 같다. 은희 아빠는 은희가 미술 시험 100점 맞아왔을 때 맛있는 걸 사 먹으라며 천 원짜리 지폐를 내미는데, 거기엔 고춧가루가 묻어있다. 한 관객은 이 장면을 언급하며 디테일에 놀랐다고 감탄하기도 했다.
'리코더 시험' 속 은희는 방앗간집 딸로 삼 남매 중 막내다.
확대이미지
김 감독은 "다른 분들도 좋아했던 부분이다. 저희 집이 고추방앗간, 떡방앗간도 하고 그랬다. 유년 시절을 기억나게 하는 것 중 하나가 아버지 옷에 묻은 고춧가루와 이명처럼 남아있는 기계 소리다"라며 "노동이란 건 (그 흔적을) 집안까지 가져오더라"라고 말했다.
나이 차이가 한두 살밖에 나지 않으면서 은희에게 함부로 대하는 오빠도 '벌새'의 오빠와 크게 다르지 않다. 바로 자기 옆에 있는 연필깎이를 가져달라고 하는가 하면, 시험을 준비하느라 리코더를 부는 은희에게 하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고, '재수 없어!'라는 말 한마디에 이성을 잃은 듯 은희에게 불같이 화를 낸다.
그러나 '리코더 시험'에서도 '벌새'에서도 직접적인 폭력 장면은 거의 묘사되지 않는다. 김 감독은 "저도 되게 고민을 많이 했다. 폭력을 묘사하는 걸 보여주기 싫었던 것 같다. '리코더 시험'에서도 마찬가지로 (오빠가 은희 방) 문을 두드리는 격정적인 순간까지 보여주고 컷을 했는데, 그 이유는 그게(구체적인 폭력 묘사) 불필요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라고 답했다.
이어, "'벌새'에서는 오빠가 때리는 걸 보여줄 수밖에 없는 맥락이 있었다. (거기서도) 첫 번째 폭력은 생략된다. 많은 폭력, 강간 장면 같은 게 너무나… 이렇게 소비된다는 게 싫었던 것 같다. 그걸 굳이 보여주지 않아도 이야기가 다 되고, 사람이 아픔을 다 느낄 수 있는데 (보여주는 건) 쉬운 선택, 게으른 선택이란 생각을 해서 제 영화에선 잘 안 보여주려고 했다"라고 부연했다.
'리코더 시험'의 은희는 실수하지 않고 리코더를 부른다. 그 이후의 상황은 나오지 않는다. 그것으로 끝을 맺는다. 이 같은 엔딩을 의도했냐는 물음에 김 감독은 "(리코더 시험을) 끝까지 다 해냈을 때의 아이 표정이 실제로도 허무함 같은 느낌을 줬던 것 같다. 끝냈다는 안도감도 있고. (선생님이) '잘했어~ 다음'이라고 하는데 그 말을 듣는 표정이 되게 중요했던 것 같다, 저한테"라고 답했다.
김 감독은 "이게 잘 부른 거냐고 질문하는 분들이 많았다. 패스를 했지만 이게 엄청나게 잘 부른 것도 아니고 그렇지만 못 부르는 것도 아니지 않나. 그런데 '다음'이라고 말했을 때 이 아이 표정에서 오는 굉장히 복잡했던 걸 담아내고 싶었다"라고 밝혔다.
또한 김 감독은 "전 '리코더 시험'이 너무 따뜻하다고 생각했다. (그땐) 어딘가 모르게 제가 용감하지 못했던 부분이 있었다고 느꼈다. '리코더 시험' 끝나고 나서 다음 영화는 좀 서늘한 걸 찍고 싶다고 생각했다"라며 "'벌새'에서는 이 아이의 세계를 서늘하게 그리고 싶었다. 사회의 부조리, 이해할 수 없는 걸 담고 싶었고, 당연히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갔으니까 세계가 확장되지 않나. 학교-가족 갈등도 확장되고. '리코더 시험'은 응축, 단순화돼 있다면 '벌새'는 좀 더 복잡하고 첨예해지는 걸 목표로 했다"라고 설명했다.
지난 9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교동 KT&G 상상마당 시네마에서 제13회 대단한 단편영화제 김보라 감독 특별전이 열렸다. 왼쪽부터 모더레이터를 맡은 김현민 영화 저널리스트, 김보라 감독 (사진=김수정 기자)
김 감독은 감독 특별전 소개 글에서 "저는 영화 만들기가 좋았지만, 쉽사리 그 애정을 드러낼 수도 인정할 수도 없었습니다. 좋아하는 것은 늘 달아날 것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라고 썼다. 지금은 영화를 사랑한다는 걸 시인한 상태일까.
"네. 사랑을 시인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웃음) 왜 그렇게 부끄러워했는지 모르겠어요. '영화를 만들 거야'라는 말도 최대한 아꼈던 것 같고, 유학 갈 때도 '영화 만들고 싶으니까'가 아니라 '강의를 할 수도 있으니까'라는 핑계를 댔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소중한 걸 좀 함부로 말할 수 없었던 것 같은 느낌? 다른 분들은 안 그러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웃음)
진짜 진짜 민망했어요. 이 모자란 단편들을 보여주는 게. 그래도 희망을 주는 의미에서… (웃음) 이렇게 오랫동안 하면서 뭔가 변화하고 발전하는 걸 보여주는 것도, 꼭 좋은 것만 내놓는 것보다는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오늘 잘 관람하셨길 바라고 지금 개봉 중인 영화 '벌새'도 많이 사랑해 주셨으면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