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냈다' 조명우가 8일 2019 LG U+ 3쿠션 마스터스 결승에서 우승을 차지한 뒤 환하게 웃으며 팬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하남=대한당구연맹)
터키의 마술사는 자포자기한 듯 눈을 감았다. 상대의 샷이 연속 성공하며 리드가 벌어졌다. 자신보다 34살이나 어린 선수가 무려 12점을 잇따라 따내자 푸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당구 신동' 조명우(21·실크로드시앤티)가 마침내 세계를 제패했다. 그것도 3쿠션 최고수들만이 모인 최대 상금이 걸린 최고의 대회에서다. '당구 황제'와 '당구 천재' 등 정상급 선수들을 모두 꺾고 이룬 우승이라 더 값졌다.
조명우는 8일 경기도 스타필드 하남에서 열린 '2019 LG U+ 3쿠션 마스터스' 결승전에서 세미 세이그너를 40 대 16으로 제압했다. 경기 시작 약 55분, 17이닝 만에 완승을 거두고 우승컵과 함께 상금 8000만 원을 거머쥐었다.
세이그너는 세계 랭킹 5위이자 2003년 세계선수권, 월드컵 6회 우승에 빛나는 베테랑. 특히 예술구 일인자로 불리지만 신동을 막지 못했다. 세이그너는 앞선 4강전에서 국내 최강으로 꼽히는 조재호(서울시청·세계 7위)를 격파한 상승세였다. 조재호도 초구에 10점을 쳤지만 곧바로 19점을 연속으로 때린 세이그너에 막혔다. 조재호는 10이닝 동안 35점, 평균 3.5점의 엄청난 기록을 냈지만 세이그너는 40점을 때리며 4.0의 경이적인 애버리지를 냈다.
그런 세이그너도 조명우의 공세에 무너졌다. 둘은 결승이라 긴장한 듯 8이닝까지 평균 2점이 안 되는 페이스로 탐색전을 펼쳤다. 그러나 9이닝째 조명우가 하이런 12점을 몰아치며 승부를 걸었다. 그 사이 세이그너의 초조한 표정은 포기로 바뀌었다. 브레이크 타임 이후에도 조명우는 기세를 멈추지 않고 허둥댄 세이그너를 24점 차로 눌렀다.
순한 표정의 조명우는 그러나 경기 때는 냉정한 승부사로 바뀐다.(사진=대한당구연맹)
이번 대회 신동의 기세는 심상치 않았다. 조명우는 예선에서 '당구 황제' 토브욘 브롬달(스웨덴)과 2017년 대회 우승자 마르코 자네티(이탈리아), '당구 천재' 김행직(전남연맹·LG유플러스) 등 강자들을 모두 꺾는 기염을 토했다. 8강에서도 세계 6위 에디 먹스(벨기에), 4강에서도 타이푼 타스데미르(터키)를 완파했다. 그러더니 마침내 일을 낸 것이다.
조명우는 8살 때부터 당구장을 운영하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큐를 잡았다. 학생부를 주름잡은 조명우는 2016년과 지난해 세계주니어선수권대회를 제패하며 신동으로 주가를 높였다. 2017년부터는 성인 무대로 옮겨 쟁쟁한 고수들과 겨루며 실력을 높였다.
지난 6월 대한당구연맹(KBF) 슈퍼컵 3쿠션 토너먼트에서 조명우는 김행직을 꺾고 우승하며 5000만 원의 상금을 획득했다. 7월 베트남 베카멕스컵에 초청 선수로 나가 정상에 오른 조명우는 마침내 세계 당구계에 이름을 확실히 각인시켰다. LG U+컵은 세계 랭킹 상위 8명의 외국 선수와 국내 최고수 8명 등이 모인 명실상부한 왕중왕전이다. 특히 총상금 2억4000만 원으로 세계캐롬연맹(UMB)도 공인 대회 중 최대 상금을 자랑한다.
세계 최고 대회에 신동이 우뚝 선 것이다. 조명우는 경기 후 인터뷰에서 "아직도 믿기지 않고 큰 대회 출전만으로도 영광인데 우승까지 해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행복하다"고 벅찬 소감을 밝혔다.
'당구 신동'이라는 별명에 대해 조명우는 "너무 영광이었고 좋으면서도 별명에 걸맞게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면서도 "이번에 우승해서 그래도 별명을 맞게 지어주신 것 아닌가 싶고 그분들께 보답해드린 것 같다"고 환하게 웃었다. 이어 "4강에서 세이그너가 19점을 친 것을 보고 '사람인가?' 놀랐다"면서도 "그러나 결승에서는 나도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임했다"고 당찬 모습을 보였다.
결승에서 선전을 펼친 선수들이 악수를 나누는 모습.(하남=대한당구연맹)
신동은 또 효자이기도 하다. 조명우는 "아버지 때문에 당구를 시작했고, 언제나 대회에 함께 해주시는 등 큰 힘이 된다"면서 "사실 아버지께서 간암 수술을 받고 5년 완치를 앞둔 가운데 '아들이 잘 하면 덕분에 몸이 좋아지는 것 같다'고 하시는데 내가 더 잘 하면 악화되시진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4강전 뒤 눈가가 이미 붉어지셨는데 결승전 뒤 포옹을 하면서 '너무 자랑스럽고 고맙다. 너무 행복하다'고 하셨다"고 덧붙였다.
더 큰 목표가 남아 있다. 조명우는 "아직 이루지 못한 월드컵 우승을 해보고 싶다"면서 "당구를 시작한 초등학교 때부터 꿈꿨던 세계선수권대회 우승도 해보고 싶다"고 당찬 각오를 밝혔다. 조명우는 다음 달 세계주니어선수권에 챔피언 자격으로 출전하는 데 이어 11월 세계선수권에 나선다.(인터뷰 중간 브롬달과 다니엘 산체스(스페인) 등 3쿠션 4대 천왕들이 조명우에게 축하한다며 인사를 건넸다.)
신동은 "이제 조명우 시대가 온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이런 성적이 몇 년 동안 유지되면 그런 말이 감사하겠지만 지금은 열심히 할 뿐"이라고 말했다. 현재 조명우는 자신의 상금을 모두 저축하는 아버지에게 한 달 40만 원의 용돈을 받는다. 이런 마음들이 모여 신동을 세계 정상에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