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연합뉴스)
오스트리아의 거장 만프레트 호네크(61)가 지휘하는 말러를 생생하게 감상할 공연이 열린다. 호네크는 5일 서초구 예술의전당, 6일 송파구 롯데콘서트홀에서 말러 교향곡 1번을 들려준다.
리허설을 마친 호네크와 4일 세종문화회관 예술동에서 마주 앉았다. 이번이 첫 내한인 그는 "말러는 오스트리아의 음악적 성취의 절정"이라고 한국 관객과 만나게 돼 기쁘다고 했다.
호네크는 1958년 오스트리아와 스위스 사이의 자그마한 시골 마을 넨칭(Nenzing)에서 태어났다. 험준한 알프스 산자락 우체국 직원이던 아버지는 가난했지만 음악을 사랑했다. 아내가 세상을 뜨자 자녀들을 데리고 무작정 수도 빈으로 향했다. 호네크는 "방 두 개짜리 아파트에 8명이 북적이며 살았다"고 그때를 회고했다.
아버지의 결단은 알찬 결실로 돌아왔다. 맏형 오토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오페라단 지휘자로 활약하다 은퇴했으며, 동생 라이너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악장으로, 누나 시빌레는 빈 폴크스오퍼 첼로 단원으로 활동 중이다.
"아버지는 단순한 분이었어요. 돈이 없었지만 아이들에게 최고의 음악교육을 받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 하나로 무작정 빈으로 이주하셨습니다. 아버지가 그렇게 하지 않으셨더라면 저는 오늘 이 자리에 있지 못했겠죠. 아버지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용기를 일깨워준 분이에요." 음악의 도시 빈은 소년에게 무한한 영감을 불어넣었다. 한 집 건너 하이든이 머물던 카페, 모차르트가 기댄 담벼락이 있었고 브루크너 발자취를 느낄 수 있었다. 이탈리아 출신인 비발디도 빈에서 말년을 보냈다. 호네크는 "이런 환경에서 살다 보니 자동으로 예술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며 싱긋 웃었다. 고국에서 활동한 거장들의 이름을 읊는 얼굴에선 자부심이 묻어났다.
빈 음악원에서 공부한 그는 1983년 빈 필하모닉 비올라 단원으로 취직했다. 1991년 취리히 오페라하우스 지휘자로 전업 지휘의 세계에 발을 들이면서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빈 필하모닉 등 유수의 단체를 지휘했다. 현재는 미국 피츠버그 심포니의 수장이다.
그는 이번 내한공연에서 '말러 교향곡 1번'을 지휘한다. 협연자는 서울시향 올해의 음악가인 독일 출신 바이올리니스트 크리스티안 테츨라프다. 말러에 대한 호네크의 애정은 각별했다. 특히 말러 교향곡 1번을 가리켜 "당대의 규칙을 해체해버린, 가장 혁명적인 교향곡"이라고 극찬했다.
"이 교향곡을 작곡할 때 말러는 한 여자를 사랑했지만 거절당했고, 두 번째로 고백한 여자와도 성사되지 못했대요. 1악장 '지옥에서부터'를 들어보면 그런 절망감이 잘 드러나요. 2악장에선 오스트리아 민초들의 민요를, 3악장에선 유대인의 장송곡을 느낄 수 있죠. 4악장에선 자연에 대한 감사함이 배어나요. 이 위대한 교향곡에서 어떤 악장을 제일 사랑하냐고 묻는다면… 오, 나는 대답할 수 없어요." 지난 2일 서울에 도착한 호네크는 이날까지 두 차례 서울시향 단원들과 리허설을 가졌다. 그는 단원들의 음악성이 높고 기술적으로도 탁월했다면서 "제 조국의 전통음악을 함께 연주하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촘촘한 연습 일정 탓에 아직 서울을 많이 둘러보진 못했다. 대신 전날 명동성당에서 열린 미사에 참여했다. 그는 공연을 올리기 전 기도하는 습관이 있다. 동료 음악인들이 한국의 맞춤양복점을 극찬했다면서 광화문 인근에서 양복도 맞출 계획이라고 했다.
"말러나 브루크너도 인간이 왜 태어났으며 죽음 뒤에는 무엇이 있는지 매일 고민했다고 하죠. 개인적으로 저는 신을 믿으면서 답을 찾았습니다. 여러분도 좋은 친구에게는 가끔 전화하잖아요. 저는 기도를 통해 연락하는 거죠. 때로는 답을 못 얻지만요.(웃음)" 인터뷰를 매듭지으면서 호네크는 관객들에게 이런 메시지를 전해달라고 했다.
"저는 리허설에서 서울시향 단원들 내부의 아름다움과 강렬한 힘을 느꼈습니다. 여러분 앞에서 펼칠 콘서트는 정말 멋질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