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 기념식 방송 화면
"엄마가 생전에 하시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끝까지 싸워다오. 사죄를 받아다오. 그래야 죽어서도 원한 없이 땅속에 묻혀 있을 것 같구나. 이 세상에 다시는 전쟁이 없어야 해. 다시는 나 같은 아픔이 없어야 해."배우 한지민이 14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을 맞아 피해자 유족 이야기를 바탕으로 쓰인 편지를 낭독하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한지민은 이날 서울 용산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 기념식에 참석해 해당 편지를 차분한 목소리로 읽어내려갔다. 이 과정에서 그는 감정이 북받치는 듯 눈물을 참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은 지난 1991년 8월 14일 고(故) 김학순 할머니가 피해 사실을 처음으로 공개한 일을 기리는 국가기념일이다.
아래는 한지민이 낭독한 해당 편지 전문.
엄마가 일본군 위안부로 있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저는 너무나 어린 나이였습니다. 그래서 그게 뭔지 무슨 일을 겪으신 건지 저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1942년, 그러니까 엄마 나이 열일곱. 전쟁 때 다친 사람들을 간호하러 가신 게 아니구나, 누군가에게 강제로 끌려가 모진 고생을 하신 거구나,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이었습니다.
뼈가 튀어나올 정도로 다친 어깨와 허리 때문에 팔을 들어 올리지도 못하시는 엄마를 보면서도, 무엇을 하다 그렇게 심한 상처를 입으신 건지 엄마한테는 차마 물어보지 못했습니다.
겁이 났습니다. 그런 일들이 있었다는 것이 무섭기만 했고,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필이면 우리 엄마가 겪은 일이라는 게 더 무섭고 싫기만 했습니다. 혹시라도 내 주변 친구들이 이런 사실을 알게 되면 어쩌나 그저 두렵기만 했습니다.
엄마는 일본말도 잘하시고 가끔은 영어를 쓰시기도 하셨지만, 밖에 나가서 이야기를 하실 때는 전혀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디 가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엄마 얘기를 절대 해서는 안 된다며 제게도 항상 신신당부하시곤 했었죠. 그렇게 세월이 흘렀습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아니, 어쩌면 저는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애써 외면했습니다. 제가 알게 된 엄마의 이야기를 모른 체하고 싶었습니다. 철없는 저는 엄마가 부끄러웠습니다.
가엾은 우리 엄마. 미안하고 죄송합니다. 그 깊은 슬픔과 고통을 안고 얼마나 힘드셨을지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 옵니다.
엄마, 엄마가 처음으로 수요 집회에 나갔던 때가 떠오릅니다. 처음에는 어디 가시는지조차 몰랐던 제가 그 뒤 아픈 몸을 이끌고 미국과 일본까지 오가시는 것을 보면서 엄마가 겪은 참혹하고 처절했던 시간들에 대해 하나씩 하나씩 자세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엄마가 생전에 하시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끝까지 싸워다오. 사죄를 받아다오. 그래야 죽어서도 원한 없이 땅속에 묻혀 있을 것 같구나. 이 세상에 다시는 전쟁이 없어야 해. 다시는 나 같은 아픔이 없어야 해.
엄마는 강한 분이셨어요. 그러나 엄마는 그렇게 바라던 진정한 사죄도, 어린 시절도 보상받지 못하시고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살아있는 모든 순간이 고통과의 싸움이었을 엄마를 생각하며 저는 울고 또 울었습니다.
엄마, 끝내 가슴에 커다란 응어리를 품고 가신 우리 엄마. 모진 시간 잘 버티셨습니다. 이런 아픔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저희가 이어가겠습니다. 반드시 엄마의 못다한 소망을 이루어내겠습니다. 이제 모든 거 내려놓으시고 편안해지시길 소망합니다.
나의 어머니. 우리 모두의 어머니.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