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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관람 등 '여성서사 밀어주기', 여성 창작자들 생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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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언니네트워크X연분홍치마 15주년 행사 '여성주의, 스토리텔링을 질문하다'
오혜진 문학평론가, 박민정 소설가, 정주리 감독, 들개이빨 웹툰 작가, 손희정 문화평론가 참석
벡델 데스트부터 여성 쿼터제까지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 나눠

지난 4일 저녁, 서울 마포구 상암동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 2관에서 '여성주의, 스토리텔링을 질문하다' 행사가 열렸다. 왼쪽부터 오혜진 문학평론가, 정주리 영화감독, 박민정 소설가, 손희정 문화평론가 (사진=김수정 기자)

 

2004년, 여성주의 운동·창작 활동에서 빼놓고 설명할 수 없는 두 단체가 설립된 시기다. 여성친화적 환경 형성·여성주의 네트워크 확장을 통해 모든 종류의 성적 차별과 억압이 사라진 새로운 사회를 구현하겠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언니네트워크가 하나다. 다른 하나는 여성주의를 바탕으로 연대와 인권이라는 가치를 중심에 두고 활동하는 인권운동단체이자 제작집단인 연분홍치마다.

같은 해 출발한 두 단체가 함께 모여 '이야기 나누는 판'을 만들었다. 지난 4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동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 2관에서 두 단체가 기획한 '여성주의, 스토리텔링을 질문하다'라는 토크 포럼이 열렸다.

손희정 문화평론가가 사회를 본 이날 행사에는 문학평론가, 소설가, 영화감독, 웹툰 작가 등 각자 영역에서 활동 중인 '여성 창작자' 4인이 패널로 나왔다.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을 쓴 오혜진 문학평론가, '아내들의 학교'를 쓴 박민정 소설가, '도희야'를 연출한 정주리 영화감독, '먹는 존재'를 그린 들개이빨 웹툰 작가는 벡델 테스트부터 여성 쿼터제까지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다음은 이날 나온 주요 내용을 키워드별로 정리한 것이다. 들개이빨 작가는 실시간 온라인 메신저로 대화에 참여했다.

◇ 여류 작가, 여성 감독… '여성' OO이라는 호명

정주리 감독 : 저는 그냥 단순하게 그렇게 생각한다. 드물기 때문에 굳이 붙는 거라고 생각한다. 저는 특히 영화를 만드니까 여성 감독이라는 말이 그렇게 언짢지는 않다, 사실이니까, 너무 드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업계는 그럴 수밖에 없는 형편이 있는 것 같다. 아마 이제 좋아지지 않을까. 예전에는 시나리오 영역에서도 대부분 '여성 작가'라고 대부분 불렸다. 지금은 여성 작가가 되게 많아서, 시나리오 작가에게 따로 '여성 작가'라고 (이름) 붙이는 일은 많이 없어진 것 같다. 아직 연출이나 다른 기술 스태프에겐 쓴다. 계속해서 양(종사자 수)이 많아지면 결국에는 (그런 말 쓰는 비율이) 떨어지지 않을까. 예전엔 '여류 소설가'라고 했는데 요새 누가 쓰나.

박민정 소설가 : 지금도 쓰는 분들이 가끔 있더라. (일동 웃음) 여러 다른 작가님들이랑 같이 기사가 나왔는데 기사 '여, 여, 여', 한자로 '여풍'(女風) 이렇게 나갔더라. 내용도 조금… 요즘 여성 작가들이 나댄다? (기사) 보고 굉장히 놀랐다. '여류'라는 게 여성 작가가 가진 여성성이라는 부분을 굉장히 폄하하듯이 쓴 말인데, 그 말을 쓰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으면서도 어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그게 되게 '새겨진' 건가? 싶다. 저는 문예창작학과를 나왔고 등단해서 이른바 문단이라는 곳에서 활동하는데 (이곳은) 생물학적으로 여성 작가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20~30대를 젊은 층이라고 한다면, 소설을 가장 활발히 쓰는 사람들도 20~30대이고 주류에 가까운데도 여성 작가라는 말을 들으면 항상 뭔가 다른 종류로 분류되는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 생물학적 여성으로 글을 쓴다는 것, 여성의 이야기를 쓴다는 것, 여성주의적 탐구로서 글을 쓴다는 게 조금씩 다르거나 같다고 볼 수 있는데 ('여성 작가'란 말로) 한꺼번에 퉁치는 그런 것도 있는 것 같다. 많은 복잡한 생각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호칭이다.

2004년 설립돼 올해 15주년을 맞은 언니네트워크, 연분홍치마 (사진=각 홈페이지) 확대이미지

 

들개이빨 웹툰 작가 : 앞에 '여'가 붙는 호칭이 유쾌한 경우는 별로 없다. 하지만 이런 경향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기도 하고 저도 이젠 크게 개의치 않는다. '여'자를 붙이는 게 너무 지겨워서 더 이상 쓰지 않을 때까지 실컷 쓰든지 말든지 맘대로 하셨으면 하는 마음이다. (일동 웃음)

오혜진 문학평론가 : 평론계는 사실 여성 평론가의 비율이 현저히 적다고 할 순 없지만 제가 그걸 실감하게 된 건 책을 내고 나서였다. 저를 인터뷰하겠다고 마음먹은 분들이 대부분 여성 기자들이었다. 제 글도 꼼꼼히 읽어주시고 호의적인 평을 써주면서, 여성 평론가가 단행본을 냈다는 걸 응원하고 지지해주고 싶다는 말씀하셨다. 처음에는 제가 이 책을 600페이지 썼는데 이 책의 매력보다 내가 여성이기 때문에 올려치기 당하는 건가 하고 약간 마음이 복잡하고 찜찜했다.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에 나는 아무 노력도 안 했는데. 그런데 여성 평론가, 여성 저자를 지지한다는 건 진짜 생물학적 여성성을 지지한다기보다는, (성비가) 불균등한 출판 단행본 시장에서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지표를 가지고도 끊임없이 책을 낸다는 것에 대해 응원해주시는 것 같다. 제가 가진 여성주의에 대한 관심을 지지해주신다는 거로 이해할 수 있었고, 그 이후로는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다.

◇ 벡델 테스트
※ 이름을 가진 여성이 2명 이상 등장하고, 둘이 대화하는 장면이 나오며, 대화 소재가 '남성'이 아닐 것

정주리 감독 : (이걸 보고) 이런 매뉴얼대로 써 봐라 이런 건가? (일동 웃음) 처음에 저도 벡델 테스트라는 기준을 접했을 때 굉장히 놀랐다. 아, 정말 (벡델 테스트를 통과하는 작품이) 별로 없었구나. (웃음) 그게 딱 숫자로 이렇게 지표화되어서 나타나니까 정말 충격적으로 느껴졌다. 근데 모르겠다. 그냥 그런 게 자꾸 거론되고 쓰는 사람들도 보는 사람들도 자꾸 의식해서, 다양한 이야기들이 더 다양한 방식으로 나왔으면 좋겠다는 건 마음속에 있다. 하지만 내가 뭔가를 쓸 때 지금 이 기준을 가지고 일단 여기를 통과해서 가야 한다는 것까진 잘 모르겠다.

들개이빨 : 사실 여성서사 판별기라고 보기엔 헐겁지 않나 생각한다. 거실에선 남자들이 놀고 있고 부엌에선 이름을 가진 여자 둘이 나와 게장 담그는 법에 대해 20분간 얘기해도 벡델 테스트를 통과하지 않나? (일동 웃음) 하지만 규칙이 단순해서 외우기 좋고, 또 이 테스트조차 못 통과한 영화를 놀려먹기에는 좋은 기준인 것 같다.

오혜진 문학평론가가 쓴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 박민정 소설가의 '아내들의 학교' (사진=각 출판사)

 

◇ 여성 쿼터제

정주리 감독 : (여성 쿼터제는) 지금으로서는 절대 상상할 수 없는 일일 것 같은데 이런 일이 생긴다면, 진짜 너무 좋을 것 같다! 와~ (일동 웃음) 일단은 제가 영화를 찍었을 때가 2013년이었다. 상당히 오래 전이다. (웃음) 그때만 해도 제 현장에는 다른 상업영화나 규모가 큰 영화 현장보다 여성 비율이 높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비율을 따지면. 여성 쿼터제가 들어와서 (스태프의) 50%는 무조건 여자가 해야 한다고 하면 간단하게 해결될 문제일 것 같다. 지금은 너무나 요원한 일이지만… 제가 몇 년 전에 해외 영화제 갔다가 인터뷰했는데 스웨덴 같은 나라는 이게(여성 쿼터제가) 있다고 한다. 반드시 (여성이) 40% 이상 되어야 영화를 만들 수 있다고 하더라. 저한테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보는데, 그땐 도대체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을까 했다. 규약이 있고 현장에서 탁아시설 등 제반 사항이 함께 준비된다고 하더라. 불가능하다고만 할 게 아니라 자꾸 이런 상황으로 한발 한발 다가갈 수 있도록 나도 어디 가서 목소리 내야겠다 하는 생각을 한다.

◇ '영혼 관람' 등 여성서사 밀어주기
※ 사정상 영화를 보러 갈 수 없을 때 표만 구매하는 행위로, 자리는 비어있지만 영혼은 가 있다는 의미에서 '영혼 관람'이란 이름이 붙었다. 주로 여성 감독, 여성 배우의 작품이나 여성서사를 바탕으로 한 작품을 응원하기 위해 이루어진다.

정주리 감독 : 찬성합니다! (일동 웃음) 지지해 주십시오. (일동 웃음)

오혜진 문학평론가 : 저는 찬성하지 않는다. (웃음) 여성서사 밀어주기의 맥락은 알고 있다. 감독이나 배우가 여성인데, 밀어주지 않으면 다음 작품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없으니까, 티켓 파워로서 그 여자들의 커리어와 명맥을 보장해야 한다는 데는 이의가 없다. 그러나 여성이 만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지지해야 한다는 건 한편으로 여성혐오적으로도 느껴진다. 오히려 여성이 어떤 상상을 할 수 있는지 그것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사고했으면 한다. '여성이 만들었기 때문에 무조건 다 옳아. 우리가 돈 써줘야 돼'라고 얘기한다면 많은 여성의 잠재력을 보지 않고, 거기에 관심 없겠다는 뜻으로 들린다. 여성 창작자가 정당하게 평가받을 판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그래서 저는 (영혼 관람은) '유보적인 지지'다.

정주리 감독 : 이런 건 어떤가? 한시적으로 하는 거다. (일동 웃음)

정주리 영화감독이 연출한 영화 '도희야', 들개이빨 웹툰 작가의 '먹는 존재' (사진=각 제작사, 출판사)

 

들개이빨 웹툰 작가: 여성서사 밀어주기에 대한 생각은 기본적으로 오혜진 선생님과 같다. 그런데 사람 지갑에서 돈 꺼내게 하는 게 얼마나 힘든데 상황이 오죽 빡치게 돌아가면 그럴까 싶다. 밀어주기라는 것은 여성서사를 향한 비합리적 공격에 비합리적 소비로 대응하는, 어찌 보면 지극히 합리적인 현상이라고 본다.

박민정 소설가 : 소설은 정말 많이 안 보시기 때문에… (웃음) 어떻게 해서라도 ,무슨 짓을 하더라도 봐주셨으면 해서 정 감독님 말에 공감한다. 여성 작가가 쓴 이야기에 관심을 두고 지지하면서 많이 읽고 싶다는 마음, 그건 굉장히 소중한 마음이고 동의한다. 하지만 굉장히 다른 작품을 썼는데 작가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비슷하게 라벨링 됐을 땐 되게 생각이 복잡해지더라. 저는 정주리 감독님과 오혜진 선생님 (생각의) 중간 정도다.

손희정 문화평론가 : 저는 영혼 관람하시라고 권장하는 편이다. 여성 감독 작품, 여성 서사가 너무 평가절하당하는 경우가 많다. 저도 '걸캅스'를 보고 아쉬운 점이 되게 많았다. 아쉬움의 상당 부분은 예산 문제에서 왔을 거라고 생각한다. 왜 여성 주인공 두 명이 나오는 영화는 중저예산으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나? 질문할 수 있다. 저는 정 감독님의 '한시적으로 밀어주기' 제안에 한 표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다.

◇ 여성 창작자가 보고 싶은 여성 캐릭터

오혜진 문학평론가 : 전 좀 더러운 여자. 안 씻고 그런 여자를 봤다. 넷플릭스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에서. 쾌감이 있었다. 지금까지 (문화 콘텐츠에서) 노상 방뇨하는 여자 본 적이 없다. 배설 자유롭게 하는 여자 본 적이 없고. 근데 그걸 한다. (일동 웃음)

정주리 감독 : 글쎄요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왼쪽부터 오혜진 문학평론가, 정주리 영화감독, 박민정 소설가, 손희정 문화평론가 (사진=김수정 기자)

 

객석의 답 : 사이코패스 여자주인공, 주식으로 돈 날리는 여자, 리더인 여자

들개이빨 웹툰 작가 : 존재감만으로 너무 무섭고 지능적이고 위협적인 여자, 자신의 추함과 불결함에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 여자를 보고 싶고 가능하면 그려보고 싶다.

손희정 문화평론가 : 슈퍼파워 여성 영웅. 엑스맨의 진처럼 폭주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힘의 이유, 목표를 정확히 아는 캐릭터.

오혜진 문학평론가 : 보고 싶다기보다 본 적 없는 캐릭터라고 생각한 게 이경미 감독 영화에 나오는 맹한 여자들이다. '왜 나는 미친 여자는 견디면서 멍청한 여자를 못 견딜까?' 생각하기도 했다. 맹해서 생각도 잘 못 하고 엉뚱한 행동하는 여자들이 궁극적으로는 굉장히 희한한 웃음을 유발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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