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과 의회정치에 대해 국민의 준엄한 평가가 내려졌다고 하면서 왜 그 일을 청와대가 송구스러워하지?"
청와대 국민청원게시판에 게시된 자유한국당과 더불어민주당 정당해산 청원에 대한 청와대 강기정 정무수석의 답변 영상을 본 한 지인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기자를 쳐다봤다.
정치권 인사도 아니고 평소 정치에 관심도 없던 지인인 탓에 정치부 기자로서 무언가를 답해줘야 할 것 같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맞는 말이기 때문이다.
'30일 동안 20만 이상의 추천을 받은 청원에 대해서는 정부 및 청와대 책임자가 답하겠습니다'라는 원칙에 기해 답변에 나선 강 수석은 정당해산 청원에 대한 명확한 청와대의 입장을 정하는 대신 정당해산 청구와 관련한 헌법 조문과 역사에 대한 설명을 한 후 여의도 정치권에 대한 감상과 평론에 나섰다.
"답변을 준비하면서 참으로 송구스럽다는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정당 해산 청원에 짧은 시간에 이렇게 많은 국민이 참여했다는 것을 보면, 우리 정당과 의회정치에 대한 국민의 준엄한 평가가 내려졌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국민들은 눈물을 훔치며 회초리를 드시는 어머니가 되어 위헌정당 해산청구라는 초강수를 두셨다고 생각합니다"
'국민들께서 오죽 답답하셨으면 정당해산 청원까지 하셨겠느냐'는 강 수석의 답변에는 공감과 이해의 마음이 담겼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던 그의 답변서는 국회의 현 상황을 지적하기 시작하면서 갑자기 여당식 '꾸짖음 모드'로 변했다.
강 수석이 거론한 4월 임시국회에서 통과된 법안이 '0건'인 점, 국회법상 열게 돼 있는 6월 임시국회가 열리지 않고 있는 점, 추가경정예산이 48일째 심사조차 되지 않고 있는 점 등은 민주당이 한국당 때문에 국회가 파행되고 있다고 주장할 때 사용하는 '레퍼토리'와 똑같다.
아울러 이 내용을 정당 해산의 요건인 '민주적 기본질서에 해악을 끼칠 수 있는 행위'를 설명한 후 곧바로 언급함으로써 마치 '한국당이 주도한 국회 파행은 민주적 기본질서를 해치는 행위이므로 한국당은 해산해야 할 정당'이라는 뉘앙스마저 느끼게 했다.
그러면서도 정작 청원에 대해 청와대가 어떻게 응답할지에 대한 내용은 언급하지 않은 채 "정당에 대한 평가는 주권자인 국민의 몫"이라며 "국민은 선거를 통해 주권을 행사한다"고 애매한 답을 내놨다.
'청와대가 직접 정당해산을 제소할 정도로 심각한 내용은 아닌 것 같으니 마음에 안 드시는 정당은 총선을 통해 심판해 주십시오'라는 셈이지만 내년 총선까지 기다릴 수 있었다면 청원자가 정당해산 청원을 제기했을까? 하나마나 한 답을 한 셈이다.
여기에 한국당을 비판한 내용 뒤에 '선거로 심판하라'고 말했으니 굳이 이번 답변에 대한 한국당 지도부의 비난을 빌리지 않더라도 '여당을 찍어달라'고 말한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간 다소 민감한 사안에 대한 답을 맡았던 언론인 출신 정혜승 뉴미디어센터장 대신 3선 국회의원 출신인 강 수석이 답변에 나선 점도, 먼저 답변 요건이 완료된 '버닝썬 VIP룸 6인 수사' 청원과 '진주 방화 및 살인 범죄자 무관용 처벌' 청원보다 정당해산 청원에 대한 답이 더 빨리 나온 점도 이해가 쉽지 않은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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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는 행정부의 최고기관이다. 3권분립의 원칙에 따르자면 정부 소관인 경찰 수사와 관련된 내용을 먼저 답했어야 옳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입맛에 맞는 청원부터 답을 한 것이다.
이같은 청와대의 불필요한 적극성에 국민청원 답변 전반에 대한 문제제기 또한 재조명되고 있다.
행정부의 소관이 아닌 입법적, 사법적 영역에 대한 청원은 게시를 제한하고 답변 여부 또한 신중하게 결정돼야 하지만 청원 분야에는 '정치개혁' 등이 별도의 청원 섹션으로 분류돼 있다.
강 수석의 답변 후 하루 만에 국회의원 국민소환제 청원에 대한 응답에 나선 청와대 복기왕 정무비서관은 국민소환법에 대해 "그것이 공정하고 정의로운 나라를 바라는 국민의 열망에 답하는 유일한 길"이라며 청와대의 대응방안을 언급하는 대신 법안 처리를 담당하고 있는 입법부를 강하게 압박하는 모습만 보였다.
이러다보니 청와대가 답을 할 수 없는 각종 영역에 대한 청원이 넘쳐나면서 게시판 당초의 취지와 다르게 논쟁의 장이 되고 있다는 비판마저 나오고 있다.
이와 더불어 '재판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 답변에 한계가 있다' 등의 이유로 제대로 된 답을 하지도 못하면서도 20만이 넘으면 답을 하겠다는 약속 때문에 무조건 답변에 나서야 하는 현 시스템도 문제점으로 거론되고 있다.
억울함을 호소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공간은 마련돼야 한다.
그러나 해결할 수도 없는 종류의 청원마저 무분별하게 수용해 답을 하고, 답변의 순서 또한 입맛에 맞춰 조정하는 청원은 올바른 국민과의 소통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