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 방 송 : FM 98. 1 (18:15~18:55)
■ 방송일 : 2019년 6월 7일 (금요일)
■ 진 행 : 정관용 (국민대 특임교수)
■ 출 연 : 심용환 (성공회대 외래교수)
◇ 정관용> 문재인 대통령이 현충일 추념사에서 약산 김원봉 선생을 언급했죠. 지금 정치적 공방이 커지는 한편 도대체 이분이 어떤 분인가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어떤 분인지 역사학자의 시선으로 자세히 짚어봅니다. 성공회대학 외래교수이시죠. 심용환 교수 안녕하세요.
◆ 심용환> 안녕하세요, 심용환입니다.
◇ 정관용> 영화 ‘암살’에서 “나 밀양 사람 김원봉이오” 이렇게 했던 그분 맞죠?
◆ 심용환> 네, 그분 맞습니다.
◇ 정관용> 그러니까 밀양 출신 맞아요?
◆ 심용환> 밀양 출신이 맞고요. 지금 가보면 이제 생가터라고 해야 되나 그게 좀 제대로 돼 있지는 않지만 생가터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정관용> 어떤 활동을 하신 분이죠?
◆ 심용환> 김원봉은 일단은 의열단을 만들어서 1920년대 때 의열활동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투쟁 방식을 열었고요. 그래서 그게 나중에 김구의 한일애국단 그러니까 윤봉길, 이봉창 의사의 활동과 유사한 활동을 먼저 했다고 볼 수 있겠고 나중에는 임시정부와 경쟁하면서 민주혁명당을 이끌기도 하고 임시정부에서 중요한 역할도 하셨고요. 나중에는 결국 남한에서 임시정부가 2차 귀환할 때 들어왔다가 결국은 월북해서 북한에서 정치활동을 하다가 50년대 후반에 생을 마감했죠.
◇ 정관용> 처음에 의열단 단장을 맡았었잖아요. 의열단이 그러니까 무장투쟁단체였죠?
◆ 심용환> 그러니까 그냥 우리가 이제 의열활동이라고 표현을 하게 되는데 적은 수의 사람과 총과 폭탄을 바탕으로 안중근 의사가 의거를 하듯이 일제의 주요 기관과 일제의 주요 사람들을 사격하는 활동들을 1920년대 때 최초로 열었던 분입니다. 그때 특히 1920년대가 일제식민지 지배체제가 워낙 안정되고 항일운동을 하기에 굉장히 힘든 상황에서 그런 활동을 했기 때문에 굉장히 인상적이었죠.
◇ 정관용> 그다음에 조선의용대 광복군으로 이어졌다면서요, 활동이.
◆ 심용환>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서 중국에서 거의 최초의 조선인 항일 무장투쟁 정규부대를 만들었고요. 최초의 승전도 울렸고 나중에는 사실 좀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임시정부와의 주도권 다툼도 있었고 또 국민당 정부나 중국 공산당 정부와의 갈등 속에서 사실은 많은 세력, 기존의 본 세력을 잃은 상태에서 40년대 때 이제 임시정부로 들어와서 임시정부 군무부장 같은 것도 역임을 하기도 하셨고요.
◇ 정관용> 문재인 대통령은 우리 국내 뿌리를 설명하면서 약산 김원봉 선생을 언급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보는 건 합당한 거예요, 그렇지 않은 거예요?
◆ 심용환> 글쎄요. 그런데 어찌 됐건 우리나라에서 현재 우리의 독립군의 역사를 기준으로 본다라면 신흥무관학교 이후에 광복군, 광복군 전단기로서 이제 김구가 만들었던 낙양 군관학교의 군인이라든지 김원봉의 조선혁명간부학교의 군인 같은 것들이 한국 광복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건 사실이거든요. 그러니까 우리 역사의 독립운동사에서의 무장투쟁으로 국군을 해석하겠다는 것 자체는 틀렸다고 할 수는 없겠죠.
◇ 정관용> 그리고 이제 해방을 맞아서 귀국할 때쯤 되면 독립운동가들 가운데 김구, 이승만 등등과 서열 거의 4위, 5위 이랬다면서요.
◆ 심용환> 그건 사실은 만들어낸 얘기라고 할 수 있겠고요.
◇ 정관용> 그래요?
◆ 심용환> 다만 그냥 저명했던 독립운동가로서 임시정부 요인으로 2차 귀환팀에 와서 귀환했다 정도로 보면 되고 그렇게 서열 이런 건 정말 나중에 만들어낸 얘기고요. 그렇습니다.
약산 김원봉 (사진=자료사진)
◇ 정관용> 그래서 해방 후에 건국 과정에서는 어떤 역할을 담당했습니까?
◆ 심용환> 사실은 이제 그 당시 워낙 좌우 갈등이 심했고 그 상태에서 좌우 갈등의 해소를 위한 노력은 많이 하려고 했었고 분단이 가시화가 되니까 김구 등과 함께 남북 협상이라고 결국은 어떤 분단을 막는 통일로 나아가는 과정을 위해서 노력을 하다가 결국에는 그냥 김구나 김규식 같은 분들은 남한에 내려와서 남한의 양심 세력으로 존재했다라면 김원봉 같은 경우는 북에 남아서 북의 일종의 건국 세력이 되는 거겠죠. 그래서 북의 정부 수립에 참여해서 실제로 북한 정권에서 일을 하게 됩니다.
◇ 정관용> 그러니까 북한 정권이 수립되기 이전 단계에서는 조금 아까 말씀하신 좌우 합작, 좌우 간의 이견 해소 또 남북 협상 이런 데 있었다는 얘기는 약산 김원봉 선생이 철저한 공산주의자나 사회주의자라기보다는 중도적, 민족주의적? 어떻게 봐야 됩니까?
◆ 심용환> 그건 사실은 입장이 해결된 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국민당 정부로부터 지원도 받았고 중국 공산당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기도 했고 아나키스트로 표방하고 활동했던 적도 있고 사회주의자라고 표방했던 적도 있기 때문에 좋게 보면 유연하게 민족 해방을 위해서 했다고 말할 수 있지만 반대로 표현해서 보면 정체성이 모호하지 않냐라고 얘기하는데 사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각자가 기대하는 바를 갖고 이야기할 뿐이지 어떤 정확한 결정을 내리기에는 힘듭니다.
◇ 정관용> 그리고 귀국한 후에 악질 친일 경찰 노덕술한테 무슨 수모를 당했다는 얘기는 뭡니까?
◆ 심용환> 그런 얘기가 거의 전설처럼 내려오고는 있는데 뺨을 맞았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며칠간 괴로워하다가 월북을 결심하게 됐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있는데 사실 입증된 얘기는 전혀 아니고요. 여러 기록들이 있기는 하지만 노덕술한테 직접, 친인 경찰 노덕술한테 고문을 받았거나 했던 역사적 근거는 없습니다. 다만 여러 회고를 보고 상황을 봤을 때 친일파들 때문에 너무 힘들어하고 힘들었다는 것 정도만 우리가 추정할 수 있고 실제로 북한에 남게 되는 건 이제 어떻게 보면 판단인 거죠. 그러니까 더 이상 어떤 중재가 힘들고 나는 결국 북한에서 뭔가 해 보겠다라는 정치적 의지와 결단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 정관용> 북한에서는 북한 정권에서 중책을 맡고 이랬다면서요.
◆ 심용환> 맞습니다. 초기에는 검열상 그러니까 감사원장 같은 역할을 했었고요. 나중에는 노동부 장관 역할도 했었고 또 6. 25 전쟁 당시에 어떤 공로로 수상을 했던 적도 있고요. 그래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그때 이제 강제로 납북 당하셨던 안재홍, 김규식 같은 남한의 양심적 민족주의자들과 함께 중립화된 통일 방안을 해 보면 어떻겠냐라는 창의적인 시도들도 하고 약간 뭐랄까요, 적극적으로 북한 정권에서 노력하는 모습도 있고 한편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타협과 대단결을 도모해 보자라는 노력도 있고. 참 어떻게 보면 좀 애매한?
◇ 정관용> 여러 모습이네요, 여러 모습.
◆ 심용환> 그렇죠, 그렇죠. 그렇습니다.
◇ 정관용> 그러다가 숙청당한 게 언제죠?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6일 오전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제64회 현충일 추념식에서 추념사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가고 있다. (사진=윤창원기자)
◆ 심용환> 58년 정도로 보고 있고요. 사실은 56년에 먼저 숙청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살아남고 다시 재건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은 58년에 옛날에 국민당의 지원을 받았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장제스. 그러니까 즉 타이완 총통이죠, 타이완 총통의 후원을 받은 국제 간첩이다라는 식으로 몰려서 결국은 숙청을 당하게 됩니다.
◇ 정관용> 그리고 북한에서 목숨을 잃었나요?
◆ 심용환> 그렇죠. 처형을 당했고. 그런데 정확하게 어떻게 이분이 돌아가셨는지. 청산가리 먹고 자결했다는 얘기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지만 현재로서는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 정관용> 김원봉 선생이 월북한 이후에 남한에 남겨진 가족이나 친지들의 삶은 아주 비극적이었다면서요?
◆ 심용환> 너무 비극적이고요. 형제분들 네 분은 총살을 당하셨고 거의 그렇게 돌아가셨고 아버지 죽음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피신했다가 굶어 죽었다는 얘기도 있는데 아시다시피 한국전쟁이 일어난 다음에 과거 좌익 경력을 가졌던 사람들에 대한 대거 숙청이 있었잖아요. 그래서 그런 숙청 과정 속에서 희생을 많이 당하셨죠.
◇ 정관용> 그러니까 분명한 것은 독립운동에 혁혁한 공을 세운 것, 이건 분명하죠.
◆ 심용환> 그건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 정관용> 또 그다음 북한 정권의 운영과 6.25전쟁, 한국전쟁까지도 거기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것 또한 분명하죠.
◆ 심용환> 그것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 정관용> 그런데 북한 정권으로부터 숙청당한 것도 분명하고요.
◆ 심용환> 그것도 분명합니다. 그래서 이런 부분들이 너무 뭐라고 해야 되나. 우리가 단순하게 이 사람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이냐라고 할 수 없는 어떻게 보면 독립운동사의 독특한 모습이라고 볼 수 있겠고요. 너무 정치적 잣대로 이 사람을 한쪽으로 평가하기에는 좀 복잡한 부분이 있습니다, 사실.
◇ 정관용> 그래요. 어느 한쪽으로 평가하기에는 복잡하다는 말씀까지만 듣도록 하겠습니다.
◆ 심용환> 알겠습니다.
◇ 정관용> 고맙습니다.
◆ 심용환> 감사합니다.
◇ 정관용> 성공회대학 심용환 외래교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