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청와대 민정 수석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이 18일 "우리 사람 되기 힘들어도 괴물이 되진 말자"고 한 것을 읽고 나도 모르게 웃었다.
헛웃음이었는데, 말이 재미있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어색해서 모호한 기분이 들었다.
일견 반가움은 영화 때문이었다. 한때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제법 진지하게 봤던 추억이 있다. 그래서 '생활의 발견'을 다시 보게 됐다.
또 봐도 즐거웠다. 예술의 영역에 한 발 걸치고 사는 등장인물들, 삼각관계, 음주 후 즉흥적인 입맞춤. 홍 감독의 작품들에서 변주되는 익숙한 장면들이 이어졌다.
가장 좋은 것은 가벼움이었다. 요즘처럼 늦봄, 초여름에 가벼운 외투가 편하고 멋스러움을 주듯이 경쾌함이 홍상수 미학(美學)의 미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벼운 정서는 대사 중 반복되는 농담에서 비롯된다. "괴물이 되지 말자"는 말은 허언 비슷한 발언이다.
주인공 경수(김상경)는 배우다. 출연했던 영화가 실패했는지 감독은 경수에게 다음 작품에 출연할 수 없다며 해고를 통보한다. 기분이 상한 경수는 당초엔 고사하기로 돼 있었던 출연료를 우격다짐으로 받아낸다. 돈을 건네면서 염치없음을 꼬집은 감독의 말이 "우리 사람이 되기는 힘들어도 괴물이 되진 말자"는 것이다.
경수는 돈을 들고 선배가 있는 강원도 춘천으로 간다. 그리고 춘천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자신이 들은 말을 반복해서 써먹는다. 함께 마신 술값을 전가하는 선배에게, 자신과 잠자리를 한 바로 다음 날 선배와도 관계를 갖겠다는 무용가(예지원)에게 "괴물이 되지 말라"고 충고한다.
짝사랑했던 무용가를 후배에게 빼앗길 뻔 했다가 되찾은 선배는 '여성과의 관계'에 대해 미처 몰랐다며 '이해해 달라'는 경수에게 들었던 훈계를 되갚는다. "사람에게 사람 이상의 것을 기대하지 말라"는 말로 바꿔서.
등장인물들은 왠지 폼 나 보이지만, 곱씹으면 시시할 뿐인 타인의 발언을 모방한다. 충고의 형식에 비난의 의미를 담는 외교적 수사(修辭)를 동원해서. 왜 그런 언행을 선호할까. 훈계하는 역할과 위치가 주는 우월감에 우쭐해지기 때문 아닐까.
영화는 짐짓 돈독한 척 하지만 이면에 적대감이 깔려있는 관계의 덧없음, 창의적인 것 같지만 남을 모방한 것에 불과한 말과 생각의 상투성을 들춘다. 클리셰(cliché)로 가득한 생활을 발견하고 있는 셈이다.
조국 수석이 '5‧18을 폄훼하는 망발을 일삼는 자들'에게 보낸 메시지는 홍상수 식의 위트를 담고 있다. '사이코패스', '한센병 환자', '달창' 등 막말에 가까운 험한 말들이 오가는 정치권에서 그나마 양질의 표현을 택했다고 믿고 싶다.
하지만 정치는 일상처럼 가볍지 않다. 조 수석의 발언은 "독재자의 후예" 발언이 있었던 문재인 대통령의 5‧18 기념사를 평가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대통령의 연설을 들은 소감에 대해 "나 역시 목이 메고 콧등이 찡하여 입술을 깨물었다"고 했다.
조 수석의 대사 인용이 재밌지만, 어색한 느낌을 줬던 이유는 이 대목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5‧18의 자식"이라는 비장함과 블랙 코미디를 연상시키는 "괴물이 되지 말자"는 농담의 부조화.
오히려 패스트트랙 이후 아예 일손을 놓고 있는 국회의 상황을 매일 지켜보고 있는 입장에서 "지금 농담이나 할 정도로 한가한 상황인가"라고 되묻고 싶다.
더욱 아쉬운 것은 서로에 대한 적대로 일관 중인 여야의 관계다. 5‧18이 북한의 기획이라는 음모론에 귀를 기울이는 한국당의 퇴행적 역사인식과 현 정부가 '좌파 독재'라는 규정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보수정당의 대표가 참석한 기념식에서 들으라는 식으로 '독재의 후예'를 지적할 필요가 있었을까. 결국 황교안 한국당 대표는 도둑이 제 발 저리듯 "내가 왜 독재자의 후예인가. 진짜 독재자의 후예(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할 말을 못하니까 여기서 대변인 짓을 하고 있지 않느냐"고 되받아쳤다.
진보든 보수든 서로를 향해 "너희들이야말로 진짜 독재"라며 싸우는 황당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상대방을 독재로 규정하며 존재 자체를 인정치 않는 배경에는 자기 진영을 결집하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이 깔려 있다.
내부집단의 단결을 위해 외부집단과의 갈등을 이용하는 것은 흔한 정치의 기술이다. 군사독재는 명맥을 이어가는 수단으로 색깔론과 상시적인 대북 위기론을 활용했다.
기술이 장인의 경계를 넘어서면 예술이 된다고들 한다. 정치의 기술도 예술처럼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지금 정치에서 클리셰는 적대다. 대화와 설득 같은 타협이든, 제3의 대안이든 창의적인 정치를 보고 싶다.
※ 노컷뉴스의 '뒤끝작렬'은 CBS노컷뉴스 기자들의 취재 뒷얘기를 가감 없이 풀어내는 공간입니다. 전 방위적 사회감시와 성역 없는 취재보도라는 '노컷뉴스'의 이름에 걸맞은 기사입니다. 때로는 방송에서는 다 담아내지 못한 따스한 감동이 '작렬'하는 기사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