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도읍 한양을 둘러싼 한양도성에는 흔히 큰 문 네 개와 작은 문 네 개가 있었다고 한다. 이를 줄여 '사대문'(四大門)과 '사소문'(四小門)이라고 지칭한다.
그러나 공식 문헌을 살펴보면 조선 왕조가 도성 성문을 8개로 인식하기는 했지만, 사대문과 사소문은 용례가 적고 실체가 불명확하다는 주장이 나왔다.
조선시대사 연구자인 홍순민 명지대 교수는 서울역사편찬원이 펴내는 학술지 '서울과 역사' 최신호에 게재한 논문 '조선후기 도성문 관리 방식의 변동'에서 조선이 한양도성 성문을 어떻게 규정하고 관리했는지 분석했다.
태조실록에 따르면 한양도성을 축조한 뒤 지은 문 이름은 정북문이 숙청문(肅淸門), 동북문이 홍화문(弘化門) 속칭 동소문, 정동문이 흥인문(興仁門) 속칭 동대문, 동남문이 광희문(光熙門) 속칭 수구문(水口門), 정남문이 숭례문(崇禮門) 속칭 남대문, 숭례문 바로 북문이 소덕문(昭德門) 속칭 서소문, 정서문이 돈의문(敦義門), 서북문이 창의문(彰義門)이었다.
홍 교수는 "사대문이라는 용어는 실록이나 법전에서 드물게 찾아볼 수는 있으나 네 대문에 해당하는 것이 어떤 문인지 밝힌 경우는 거의 없다"며 "남대문, 동대문 외에 '서대문'이나 '북대문'이라는 말은 거의 쓰이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이어 "돈의문은 속칭으로라도 서대문으로 불렀다는 실록 기사가 전혀 없지는 않으나 의미를 두기 어려울 정도로 드물다"며 "숙정문(숙청문)은 처음부터 북대문으로 인식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사소문은 사대문보다 용례가 더 적다. 홍 교수는 "소문은 혜화문-동소문과 소의문-서소문뿐, 창의문과 광희문을 북소문과 남소문으로 기록한 사례는 찾기 어렵다"며 "조선 초기 남소문은 국립극장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있던 문인데 1469년 폐쇄했고, 숙종 연간에는 광희문과 이 문을 혼동하기도 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홍 교수는 조선 후기가 되면 '대문'과 '소문' 대신 '정문'(正門)과 '간문'(間門)이라는 개념이 등장했다고 소개했다.
그는 정조 11년(1787) 승정원일기 기사에 정문과 간문이 나타났고, 정조 대에 편찬한 법전인 '대전통편'(大典通編)에서는 성문을 사대문과 간문으로 구분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분류는 고종 4년(1867)에 만든 법전 '육전조례'(六典條例)에서 더욱 명확해져 정문은 숭례문·흥인문·혜화문·돈의문, 간문은 창의문·숙정문·소의문·광희문으로 명시했다.
홍 교수는 "혜화문이 정문, 숙정문이 간문에 들어간 점이 주목된다"며 "정문과 간문은 관념적인 분류가 아니라 실제 출입하는 사람의 수효 등 현실적 관리의 중요도에 따른 것으로 이해된다"고 주장했다.
이어 "문의 위상에 따라 갖고 가는 증표와 관원의 직책이 달랐다"며 정문보다는 간문을 열 때 가볍게 처리했다고 전했다.
그는 "사대문과 사소문이라는 말이 여전히 널리 쓰이는 원인에는 학계 연구 부족이 있다"면서 "도성문 관리 실상에 대한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