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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년 전 기관총 든 청년 시민군의 유령이 떠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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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시민군의 어제, 그리고 오늘 ③]
흑백사진 속 무장 시민군에 관한 기억
"그가 죽고 내가 살아"…"한동네 김군"
지만원은 "北 특수부대 제1광수" 지목
"사회 가장 약한 고리로 스러져간 존재"
그 시절 10·20대 직접 교감 나선 청년들
"시민군들 직접 만나며 '나'로 감정이입"

1980년 5·18민중항쟁 현장 사진에 포착된 한 시민군을 추적하는 다큐멘터리 '김군'. 이 영화 연출자 강상우(36) 감독은 당시 시민군에 몸담았던 100여 명을 접한 시대의 목격자다. 그와의 인터뷰로 5·18 시민군의 어제와 오늘을 3회에 걸쳐 짚어본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5·18 서사 생명력은 왜 지만원의 차지가 됐나
② "그들은 5·18을 찰나의 첫사랑처럼 회고했다"
③ 39년 전 기관총 든 청년 시민군의 유령이 떠돈다
<끝>


※ 이 기사에는 영화 '김군'에 관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 '김군' 스틸컷(사진=영화사 풀 제공)

 

열일곱 살이던 1980년 5·18 시민군으로 활동했던 최진수 씨는 흑백사진 속 기관총을 든 무명의 시민군을 알 것 같다고 했다.

그는 "툇마루에서 이렇게 먼저 발을 내디뎠으면 제가 먼저 죽었을 텐데, 그 생각만 저는 수십 년 동안 하고 산다"고 영화 '김군'에서 증언했다.

최 씨는 5·18 당시 순찰을 나갔다가 11공수여단에 체포될 때 바로 앞에서 계엄군 총에 맞아 숨진 시민군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자신을 대신해 죽은 그 청년이 바로 사진 속 인물이라는 것이다.

강상우 감독은 "최진수 선생에게 그 시민군은 예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이 아니다. 그날 함께 트럭을 타고 순찰을 나갔던 10명 안팎의 시민군 가운데 1명이었고, 계엄군을 피해 민가로 함께 숨어든 일행 중 한 사람이었다"며 말을 이었다.

"최진수 선생이 기억하는 것은 계엄군에게 발각돼 툇마루에서 발을 내리던 그 짧은 순간이다. 그 순간 머뭇거리던 자신 앞에서 먼저 발을 내디딘 시민군이 있었기에 자신은 살고 그분은 돌아가셨다는 죄책감을 안고 살아 온 것이다."

◇ 더는 잃을 것 없던 그들…"항쟁에 더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었다"

영화 '김군'을 연출한 강상우 감독(사진=영화사 풀 제공)

 

최진수 씨에 앞서 사진 속 시민군을 알아본 사람이 있다. 5·18 당시 시민군에게 줄 주먹밥을 만들어 나른 주옥 씨다. 그는 사진 속 무장한 청년을 "김군"이라고 불렀다.

강 감독은 "주옥 선생으로부터 사진 속 인물이 고아였고, 넝마주이 청년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그리고 얼마 뒤 극우논객 지만원 씨가 똑같은 사진 속 인물을 북한군 특수부대의 대표 인물인 '제1광수'로 지목했다"고 설명했다.

"지만원 씨 주장에도 해당 인물이 나타나지 않은 근거가 주옥 선생의 말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분이 고아였으니 사라졌다 하더라도 실종신고를 하거나 찾아나설 혈연 가족이 없었을 테다. 그렇게 그분의 죽음은 공식 기록에서 실종자나 사망자를 기록한 숫자의 일부로 남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사진 속 그분의 존재가 사회에서 가장 약한 고리로서 스러졌기 때문에, 북한군 특수부대원으로 지목돼 온라인에서 그 이미지가 유령처럼 떠도는데도 나타나지 않은 셈"이라며 "당시 보육원 등 시설 출신 시민군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공통적인 증언은 '잃을 것이 없었기 때문에 더 적극적으로 앞에 나설 수 있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군' 제작 과정에서 만난, 1980년 5월 금남로에서 구두닦이를 했던 서한성 씨 역시 "혈혈단신의 몸으로 챙겨야 할 가족이 없었기에 항쟁에 투신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 "죄책감 덜어낸 직접 소통…공감 부르는 서사의 새 생명력"

영화 '김군' 스틸컷(사진=영화사 풀 제공)

 

1983년생인 강 감독은 "저는 학교와 뉴스 등 제도권 안에서 5·18에 대해 피상적으로 배운 세대"라며 "5·18을 다룬 '꽃잎' '박하사탕'과 같은 영화를 봤을 때 정서적으로 이해하기 힘들었다. 작품 속 울분이 나를 튕겨낼 만큼 감정 이입이 쉽지 않았다"고 전했다.

그러나 '김군' 제작 과정에서 수많은 시민군을 만날 때는 달랐다. 시민군들의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와중에 그들을 '아버지' 할아버지'가 아닌 온전한 '나'로서 감정 이입하게 됐다는 것이다.

김 감독은 "'나 역시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뿐이었다"며 "프레임 바깥의 맥락들을 온전히 지워서 없앤, 39년 전 사진들에 포착된 당시 10대, 20대 청년들의 생생한 이미지는 이 작업을 끌고 갈 수 있도록 해준 중요한 동력이었다"고 설명했다.

"사실 영화 '김군'은 5·18에 대해 전혀 모르는 세대의 태도에서 출발한다.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차근차근 그 역사적 사건에 다가가는 방식을 택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피해자를 넘어 주체로서 발견된 생존 시민군들의 증언과 일상 등을 통해 그간 드러나지 않았던 5·18의 순간들을 길어 올릴 수 있었다."

그는 "우리가 벌인 작업의 차별점은 당위가 없다는 점이다. 책임감·죄책감·사명감이 빚어내는 5·18에 대한 선입견 없이 출발한 작업"이라며 말을 이었다.

"하나하나 우리가 직접 보고 확인한 것들을 바탕으로 결과물을 차곡차곡 쌓아올렸다. 그 덕에 진영논리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고 본다. 우리는 5·18 이후 죄책감을 지닌 채 5·18 서사를 재생산해 온 386세대, 그 후배인 90년대 학번과는 결이 다르다. 탁한 필터를 경유하지 않고 '당사자들과의 직접 교류' '영구적으로 포착된 사진'이라는 두 요소를 적극 활용한 덕이다."

그는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중간 매개 과정을 덜어낸, 덜 탁한 서사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며 "불필요한 죄책감에 기댄 서사를 덜어내고 5·18 당시 소년 소녀였던 선생들과의 직접적인 교류가 있었기에 지금 청년 세대로부터 더 큰 공감을 얻을 것으로 믿는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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