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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청년들의 멋과 흥으로 유주 땅을 뒤흔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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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27년의 기록 ⑧] 유주시기 1938.11~1939.04
3.1운동 20주년을 맞은 임정과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

※이 글은 100년전 임시정부의 발자취를 각종 문헌과 기록, 인터뷰에 기반해 시간순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1919년부터 1945년까지 27년간 임시정부가 중국내 8곳의 도시를 전전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가상의 주인공 '나'를 앞세워 내러티브 방식으로 재구성했습니다.[편집자주]

글 싣는 순서
①100년 전 상해 임시정부는 어떻게 수립됐나
②100년전 4월 혁명의 거점 상해에선 무슨일이
③상해 떠난 임정, 각박한 생활 속 빛난 조력자들
④중일전쟁 발발로 풍전등화의 처지 임정
⑤내부의 적이 쏜 흉탄에 갈등의 골만
⑥위태로운 임정에 가해진 네 발의 총격
⑦지독히도 임시정부를 괴롭힌 일본군의 폭격
⑧한국 청년들의 멋과 흥으로 유주 땅을 뒤흔들다


유주로 이동하는 배 안에서 정정화 선생은 나에게 "중국에는 소주에서 낳고, 항주에서 살며, 광주에서 먹고, 유주에서 죽는 것이 소원이란 말이 있다"며 지친 나를 위로했다.

정정화 선생

 

방직 공장이 많은 소주는 옷을 입기 좋고, 풍경이 좋은 항주는 삶을 즐기기 좋고 열대과일과 요리가 좋은 광주는 음식이 좋고, 아름드리나무가 많은 유주는 심지어 관을 잘 만들기도 유명해 삶을 마무리하기에도 좋다는 것이다.

유주에 도착하고 난 뒤 일주일 정도가 지났을 무렵 또 공습경보가 울렸다.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대다 나는 일단 여인들과 어린 아이들을 이끌고 지역 사람들이 방공호로 쓴다던 동굴에 몸을 숨겼다.

동굴에 몸을 숨기자마자 폭격기의 작탄이 작렬하는 굉음이 진동했다. 이윽고 몇 시간이 지났을까? 폭격이 멈췄고 동굴 바깥으로 나가자 참혹한 풍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여기저기 파인 웅덩이에 시체가 널부러져 산을 이루고 있었다.

민간인들을 이토록 학살한 일제의 만행은 역사가 기억하리라.

하지만 계속 슬퍼할 수도 없었다. 우리는 안전한 곳을 계속 찾았고 낙군사라 불리는 곳에 임시정부 터를 잡았다. 중국 관리는 우리에게 이곳이 원래 버스터미널로 지었던 곳인데 새로 수리를 해서 호텔로 쓰였던 곳이라고 설명했다.

낙군사는 우리 임정 식구들이 들어오기 전 장개석 선생 등 유명인사들이 많이 머물었던 곳이라 시설면에서 굉장히 고급스러웠다.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가 유주를 떠나면서 중국의 각 단체대표들과 기념촬영한 사진

 

유주에서는 임정 청년들을 중심으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가 설립됐다. 애초의 목적은 유주의 중군군 병사들을 위로하는 공연을 통해 항일전선을 고취시키려는 선전이었다. 우리 청년들이 어찌나 노래와 춤을 잘 추던지, 청년들은 중국 국민들의 관심과 호감까지 이끌어 냈다.

3.1운동 20주년 기념 공연

 

1939년 3월 우리는 관내 용성중학에서 3.1운동 20주년 기념식을 거행했고, '한국독립선언 20주년 기념선언문'도 발표했다. 청년공작대의 애국가, 유주의 고위 인사들의 연설로 분위기는 고조됐고, 장내에는 눈물을 보이는 사람들도 이따금씩 보였다.

"첫째 정치적으로 완전한 해방을 향유하여 사람마다 평등한 기본권을 갖는다. 둘째 경제적으로 완전한 해방을 향유하여 사람마다 평등한 생활을 할 권리를 갖는다. 셋째 교육적으로 완전한 해방을 향유하여 사람마다 평등하게 교육받을 권리를 갖는다."

우리들은 일본의 공습이 빗발치는 속에서도 곧 광복이 올 것을 확신하며 '공화정' 국가로서의 독립을 염원했다.

그 즈음 장개석 주석을 만나러 중경으로 가 있던 김구 선생의 연락이 닿았다. 선생은 유주가 본인이 머물고 있는 중경과 거리가 멀고, 직접적 지시가 닿기 어려우니 중경으로 올수 있는 계획을 세우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일단 유주는 일본군의 공습에 안전하지 않으니 기강으로 이동할 것을 요청했다.

며칠 뒤 우리는 여섯 대의 버스에 나눠 탄 채 기강으로 향했다.

※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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