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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히도 임시정부를 괴롭힌 일본군의 폭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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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27년의 기록 ⑦] 광주시기 1938.07~ 1938.10
군관의 도시에 머물다

※이 글은 100년전 임시정부의 발자취를 각종 문헌과 기록, 인터뷰에 기반해 시간순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1919년부터 1945년까지 27년간 임시정부가 중국내 8곳의 도시를 전전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가상의 주인공 '나'를 앞세워 내러티브 방식으로 재구성했습니다.[편집자주]

글 싣는 순서
①100년 전 상해 임시정부는 어떻게 수립됐나
②100년전 4월 혁명의 거점 상해에선 무슨일이
③상해 떠난 임정, 각박한 생활 속 빛난 조력자들
④중일전쟁 발발로 풍전등화의 처지 임정
⑤내부의 적이 쏜 흉탄에 갈등의 골만
⑥위태로운 임정에 가해진 네 발의 총격
⑦지독히도 임시정부를 괴롭힌 일본군의 폭격


1938년 7월 호남성 장치중 주석의 배려 덕분에 우리는 광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기차를 타고 가는 와중에도 일본 비행기의 공습은 지독히도 우리를 괴롭혔다. 공습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면 기차를 멈추고 잠시 풀숲에 몸을 숨겼다.

다시 잠잠해지면 기차로 돌아와 이동을 반복했다. 기차는 만 3일만에 광주에 당도했다.

황포군관학교에서 수학하던 군교육생들

 

우리가 도착한 광주는 손문의 광주봉기가 일어나 국공합작을 한 곳이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광주는 당시 손문이 소련 코민테른의 자금을 받아 중국 최초의 군대식 군관학교인 황포군관학교를 설립한 곳이기도 했다.

손문

 

그리고 친숙한 대상인 조선혁명당 김원봉 선생도 이곳을 졸업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나에겐 그야말로 묘한 감정을 주는 도시였다.

약산 김원봉

 

우리는 이미 광동성 주석 오철성에게 임시정부 청사와 임시정부 식구들의 거처를 부탁해놓아 큰 시름거리 없이 광주에서 생활을 시작했다.

임시정부 청사는 이전부터 중국 군사방면에 복무하던 이준석, 채원개 두 사람의 소개로 '동산백원'을 청사로 하고, 식구들을 인근 아세아여관에 묵게 했다.

광주임시정부청사로 쓰인 광주의 동산백원

 

그러나 우리가 광주로 이동한 지 채 3개월도 되지 않아 일본군이 광동성 인근까지 진격해 온다는 소식이 들렸다. 포격에 대한 공포, 불안, 불면. 나는 차라리 일본군의 폭격을 온 몸으로 맞고 저승에서 대한의 독립을 돕고자 하는 맘도 들 정도로 피폐해졌다.

결국 김구 선생은 나에게 임시정부 요인과 함께 이동할 것을 명했고 그는 조성환, 나태섭 선생과 함께 중경의 장개석 선생에게 도움을 요청하러 길을 떠났다.

나는 100여명에 달하는 임정 식구들을 이끌고 기차역으로 향했다. 국민당 정부에서 기차 한 칸을 통으로 내어준다는 소식을 들었기에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식구들과 내가 역에 도착할 무렵 귀신같이 일본군의 폭격이 시작됐다. 일본군의 폭격 소리가 들리자 기차역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혼란스러운 상황은 역사의 중국 군인들이 임정 식구들을 기차 안에 먼저 들여보내면서 일단락 됐다. 어렵사리 출발했지만 이동 중 폭격은 끊이질 않았다.

결국 중간에 두 번이나 배를 갈아타고 40여일의 천신만고 여정 끝에 유주에 도착했다.

※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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