끔찍했던 일제의 탄압 "만세 외치는 사람 보는 즉시 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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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
1919년 3월 8일 대구 만세운동서 폭력적 탄압 잇따라

대구 남산교회에 새겨진 만세운동 참여 애국지사 벽화.

 

"나는 한 장교가 소리치며 명령 내리는 것을 들었다. '만세를 외치는 사람을 보는 즉시 쏴라'" - 재한 선교사 보고자료 中

100년 전 조국 독립의 염원이 가득했던 한반도. 뜨거웠던 열기만큼 일제의 탄압은 가혹했다.

대구에서 만세운동이 본격화됐던 3월 8일. 당시의 기록을 보면 처참하게 짓밟히면서도 만세를 외치던 애국지사들의 '타는 목마름'이 담겨 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마련한 '3.1운동 데이터베이스' 가운데 재한 선교사 보고자료에는 이런 상황이 그대로 묘사돼 있다.

한 선교사가 적은 "(만세 운동을 벌인 사람들은) 마치 돼지처럼 묶여서 던져졌고 기마병은 '죽여라'고 계속 외쳤다"는 내용이 대표적이다.

또다른 외국인 목사의 보고에는 "한 사람이 어째서 무장하지 않은 사람에게 발포했는 지 항의하자 그를 총으로 내리쳤다"는 폭행에 관한 내용도 나온다.

그는 또 "그의 형이 항의하자 옆구리에 총을 맞았고 다시 한 번 항의하다 목에 총을 맞았는데 총을 쏜 것은 일본인 상인이었다고 한다"고 썼다.

이외에도 당시에 남겨진 각종 자료에는 일제가 총칼을 휘두르며 만세운동에 동참한 이들을 무차별적으로 구타, 체포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일제의 가혹 행위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대구 만세운동에 앞장섰던 남산교회 김태련 장로는 아들을 잃는 슬픔까지 겪었다.

당시 김 장로는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던 중 일본 경찰에 의해 끌어내려졌으며 만세 행진에서도 선두에 섰다는 이유로 쇠갈퀴로 얻어맞아 실신했다. (참고자료:대구 남산교회 100년사)

당시 24살이었던 김 장로의 아들 김용해 군은 이를 보고 일제에 항의하다가 일본 헌병에 의해 끌려갔다.

부자가 모두 감옥에 수감돼 고문을 받았는데 김 군이 당한 수모는 가혹했다.

김 군은 감옥에서 머리를 수차례 맞았는데 특히 감방의 철제 열쇠 꾸러미로 얻어맞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결국 그는 19일 뒤 출감됐지만 불과 이틀 만에 숨을 거뒀다.

하지만 이후에도 감옥을 벗어나지 못한 그의 아버지 김 장로는 3개월 후에서야 아들의 죽음을 전해 듣는다.

이를 보고 들은 대구 지역민들은 집에 조기를 걸고 김 군의 장례를 눈물로 함께 치르며 넋을 기렸다고 한다.

부자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일제가 김 군의 묘비조차 제작하지 못하도록 해 김 장로는 아들의 묘비를 '정훈'이라는 가명으로 만들었다.

김 장로 부자 외에도 만세운동에는 수많은 대구·경북인들의 희생이 잇따랐다.

형제가 만세운동에 나선 백남채-백남규 장로, 부부가 의열단과 광복군을 지원한 이덕생-장성희 선생, 신사참배를 거부해 무려 37차례나 일본 경찰에 붙잡힌 김용규 목사 등.

국사편찬위원회에 따르면 대구와 경북에서는 최대 4만6500여명이 만세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 시위 과정에서 29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한편 1일 대구와 경북에서는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애국지사와 순국선열의 넋을 기리는 각종 행사가 잇따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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