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3·1 운동에 앞장선 '남도의 유관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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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 100주년 특별 기획]<광주 3·1 운동의 빛이 된 기독교인> 4편

광주 3·1 운동 참여했다 검거된 여성 25명 모두 기독교인
수피아여학교 학생들, 고종 황제 장례식에 입은 치마 찢어 태극기 제작

1919년 당시 수피아 여학교 기숙사로 사용한 현 역사관. 당시 역사관 지하에서는 수피아 여학교 학생들이 태극기를 제작해 3·1 운동에 참여했다(사진=광주CBS 박요진 기자)

 

광주 3·1 운동은 수피아여학교를 중심으로 남성 뒤에 가려진 채 살아왔던 여성들이 역사의 전면으로 나오는 계기가 됐다. 홍인화 수피아 여자고등학교 역사연구소장에 따르면 1919년 2월 일본 도쿄에서 일어난 2·8 독립선언에 참여했던 김마리아 전 수피아여학교 교사는 독립선언서 등을 가지고 부산을 거쳐 광주를 찾는다. 김마리아는 언니이자 남궁혁의 부인인 김함라를 만나 2·8 독립선언서를 전달했다. 이런 김마리아의 활동은 남궁혁이 자신의 집을 광주 3·1 운동을 모의 장소로 내놓은 등 광주 3·1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계기가 된다.

또 수피아여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박애순은 광주 3·1 운동이 있기 전 학생들의 독립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매일신보에 실린 파리 만국강화회의에 대해 설명한다. 고종이 일제에 의해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퍼지는 상황에서 박애순은 학생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나눠주며 3·1 운동에 참여해야 하는 이유를 알렸다. 3월 10일 광주 3·1 운동을 하루 앞둔 3월 9일 밤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은 학교 기숙사였던 수피아홀 지하 예배당에 모인다. 60여 명의 학생들은 고종 황제 장례식날 입었던 치마를 뜯어 태극기를 만들고 3·1 운동에 참여한 지역민들에게 전달할 독립선언문과 격문을 제작했다. 다음날 오후 소매 안에 태극기를 감춘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은 아리랑을 부르며 광주 부동교로 향한다.

1919년 3월 9일 수피아 여학교 학생들이 태극기를 만들었던 역사관 지하에서 홍인화 연구소장이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사진=광주CBS 박요진 기자)

 

3월 10일 오전 김강으로부터 독립선언서 50여 장을 받은 박애순은 이를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에게 나눠준다. 3·1 운동에 참여한 시위대에 떠밀려가던 일제 경찰은 결국 현 충장로 우체국 앞에서 총과 칼을 휘두르기 시작한다. 당시 수피아여학교 2학년 윤형숙은 가장 선두에서 3·1 운동을 이끌고 있었다. 윤형숙은 일제 경찰이 내리친 칼에 의해 손 하나를 잃었지만 곧바로 반대편 손으로 다시 태극기를 잡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후 윤형숙은 잔혹한 고문으로 오른쪽 눈을 잃어야 했지만 고향인 전남 여수에 돌아가서도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수피아여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최현숙 역시 밤새 태극기를 만든 뒤 10일 오후 2시쯤 시위에 나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체포된 최현숙은 징역 4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으며 미결 구금으로 50일간의 투옥생활을 했다. 이 과정에서 구타와 고문을 받은 최현숙은 평생 후유증에 시달렸다. 광주 3·1 운동과 관련해 재판을 받은 사람 중 최연소자인 강화선 역시 당시 16살로 수피아여학교 학생이었다.

광주 3·1 운동과 관련해 재판받은 103명 중 학생들이 53명으로 전체 51.5%를 차지했으며 이 중 수피아여학교 학생은 20명이었다. 당시 여성의 사회 참여가 제한돼 있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수피아여학교를 중심으로 한 여성들의 적극적인 3·1 운동 참여는 여성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홍인화 수피아여자고등학교 역사연구소장은 "광주 3·1 운동은 수피아여학교를 중심으로 여성의 사회 참여가 본격화하게 된 계기였다"며 "이 때문에 광주 3·1 운동은 단순히 독립운동으로써 뿐만 아니라 여성의 사회 참여를 촉발시켰다는 데 큰 의미가 있는 운동이었다"고 말했다.

특히 광주지역에서 3·1 운동에 참여했다가 재판 받은 25명 여성 모두가 기독교인이었다는 점에서 기독교 여성들의 사회 참여가 두드러졌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여성 기독교인들은 광주 3·1 운동에 적극 참여해 온갖 고난과 박해를 받았다는 점에서 '남도의 유관순'이라 불릴만하다. 이후 수피아여학교는 1937년 신사 참배를 거부하며 스스로 문을 닫았다가 해방 이후 다시 개교했다.

글 싣는 순서
※광주CBS의 [3·1 운동 100주년 특별 기획]<광주 3·1="" 운동의="" 빛이="" 된="" 기독교인=""> 오늘은 네 번째 순서로 광주 3·1 운동에 앞장선 여성 기독교인 독립운동가를 중심으로 보도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광주전남 3·1 운동 기폭제 '조선독립광주신문'
②호남 3·1 운동의 구심점 '광주제중원'
③호남 3·1 운동의 선봉장 '숭일학교'
④광주 3·1 운동에 앞장선 '남도의 유관순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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