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1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의 키워드는 다양성과 대중성 그리고 '최초'였다.
25일 오전(한국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91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이하 아카데미 시상식)은 초반부터 올해 불거진 논란을 정면 돌파하겠다는 명확한 의지가 엿보였다.
첫 상인 여우조연상 수상을 위해 무대에 오른 유명 방송인 티나 페이·마야 루돌프·에이미 폴러는 '우리는 멕시코 장벽을 세우는데 돈을 내지 않을 것'·'시상식은 광고 시간에 진행되지 않는다'·'인기 영화상은 없다'·'사회자는 없다' 등 올해 미국 내 가장 뜨거웠던 정치적 이슈와 함께 아카데미 시상식을 시끄럽게 했던 논란들을 언급했다.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 사회자는 흑인 코미디언 케빈 하트였지만 그가 성소수자 비하 발언을 끝내 사과하지 않으면서 사회자 자리가 30년 만에 처음 공백으로 남게 됐다. 우려와 달리 화려한 시상자들이 공백을 채우며 단독 사회자 없이도 매끄러운 진행이 이어졌다.
비인기 부문을 광고 시간에 수상하거나 인기 영화상을 신설하려던 아카데미 시상식의 시도 역시 강도 높은 비난 속에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시상식 초반에 이 같은 사실을 코믹하게 언급하면서 자연스럽게 논란을 정리했다.
수상은 그야말로 이변의 연속이었다. 남녀주연상·감독상·작품상 등 주요 상은 4개 영화가 골고루 나눠가졌고 독보적인 다관왕 역시 없었다. 영국 밴드 퀸의 음악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가 4관왕에 올라 가장 많은 상을 수상했지만 '블랙팬서'·'로마'·'그린 북' 등이 3관왕으로 비슷한 성과를 거뒀다.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두각을 나타낸 이들 네 영화는 모두 백인 남성 중심의 서사를 탈피해 다양성과 대중성을 확보했다는데 그 의미가 있다.
'보헤미안 랩소디'는 파키스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퀸의 보컬 프레디 머큐리의 생애를 그렸고, '블랙팬서'는 아프리카 가상의 국가 와칸다의 영웅 블랙팬서를 그린 마블 히어로물이다. '로마'는 멕시코를 배경으로 한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자전적 영화이고 '그린 북' 역시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심했던 1960년대 함께 투어를 떠나는 백인 운전기사와 흑인 피아니스트 사이 우정을 그린 작품이다.
최고상인 작품상은 '로마'가 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그린 북'에게 돌아갔다. '그린 북'은 이밖에도 마허샬라 알리가 남우조연상을, 닉 발레롱가 외 2명이 각본상을 수상했다.
비록 작품상은 놓쳤지만 '로마'는 외국어영화상과 감독상을 동시에 수상한 넷플릭스 영화로 아카데미 시상식에 '최초'의 기록을 남겼다. 촬영상 역시 '로마'의 차지였다. 할리우드 내에서 독특한 작품성으로 인정받는 멕시코 감독들의 질주는 올해에도 이어졌다.
트럼프 대통령이 멕시코 국경 장벽 건설로 논란을 빚고 있는 가운데 아카데미 시상식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 역시 확연히 드러났다. 무대에 오른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두 번이나 "멕시코에게 감사하다"는 수상 소감을 전했다.
작품상처럼 여우주연상에서도 반전이 일어났다. 올해까지 7번이나 아카데미 시상식에 노미네이트된 '더 와이프' 글렌 클로즈를 제치고 처음 후보에 오른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올리비아 콜맨이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올리비아 콜맨은 수상 소감 도중 글렌 클로즈를 향해 "당신은 내 우상"이라고 존경을 표하기도 했다.
올리비아 콜맨은 이 영화에서 육체적·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앤 여왕 역을 섬세하면서 격정적인 연기로 소화하면서 호평 받았다. 이미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도 글렌 클로즈와 함께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바 있다.
'보헤미안 랩소디'는 라미 말렉의 남우주연상을 비롯해 편집상·음향편집상·음향믹싱상을 품에 안았다. 라미 말렉은 퀸에게 영광과 감사를 표하면서 "나 역시 이집트에서 이민 온 첫 세대의 가족 출신이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에 더 감사한 마음"이라고 밝혔다.
처음 아카데미 시상식 후보에 오른 마블 스튜디오 영화 '블랙팬서'는 미술상·의상상·음악상에 이름을 올렸다. 주요 부문 수상은 아니었지만 대중성 높은 할리우드 히어로 영화, 그 중에서도 흑인 배우들이 주인공으로 나선 히어로 영화가 두각을 나타내 의미를 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