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거 현장에서 발생한 화재로 모두 6명이 숨진 '용산 참사'가 10주기를 앞두고 있다. CBS노컷뉴스는 그날 이후 뿔뿔이 흩어진 세입자의 현실을 조명하고, 곳곳에서 반복되는 강제철거의 실태를 되짚는 연속기획을 마련했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용산참사 10년…가죽공장 사장이 일용직 배관공으로(계속)
50평 갈빗집 사장은 도시락집 포장 담당이, 가죽공장 사장은 일용직 배관공이 돼 있었다.
용산4구역 세입자들의 수익은 3분의 1로 토막 났고, 대부분이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호소했다.
◇ 50평짜리 갈빗집 사장님, 2700원 도시락 가게로
용산참사 유가족 전재숙씨가 서울 동대문구 한국외대 앞의 한 도시락 가게에서 음식을 포장하고 있다. (사진=김광일 기자)
지난 2009년 1월 20일 용산참사 당시 전재숙(74)씨는 그 맞은 편 건물에서 갈빗집을 운영하는 사장이었다.
갈빗집은 용산역과 한강철교를 낀 목 좋은 곳에 위치했다. 1~2층을 합하면 50평쯤 되는 넓은 공간은 매일 같이 인근 은행을 포함해 직장인들의 회식 장소가 됐다.
아들 내외와 함께 2억원을 들여 호프로 업종을 바꾼 뒤에도 단골들이 모임을 이어갔을 정도로 번창했다고 전씨는 기억했다. 직원도 너댓명씩 고용했다.
그랬던 전씨는 참사 후 노숙농성 등으로 전국을 전전했다. 그나마 4년 전부터는 딸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도시락 포장을 돕고 있지만 수익은 예전 같지 않다.
전씨는 14일 CBS노컷뉴스 취재진을 만나 "호프집 할 때 1000원을 벌었다면 지금은 10원 번다"며 "도시락 하나에 2700원씩 하는데 그거 판다고 얼마나 남겠냐"고 했다.
전씨 딸 역시 "경제적 수준은 그때가 훨씬 나았다"며 "그때 사 입었던 옷을 아직도 입고 계신다고 하실 정도"라고 말했다.
◇ "가죽 장인의 꿈, 철거민 되며 사라져"
15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용산참사 10주기, 강제퇴거 피해자 증언대회'에서 용산참사 유가족 전재숙씨를 비롯한 참석자들이 묵념을 하고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
참사 당시 망루에 있었던 생존자 천주석(56)씨도 한때 가죽공장을 운영하던 사장이었다. 규모는 작았지만 20년 넘게 미아리와 오정동에 터전을 잡고 '가죽 장인'이 되겠다는 꿈을 꿨다.
그랬던 천씨는 '철거민' 딱지가 붙은 뒤 현재는 일용직 배관공으로 그나마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천씨는 "가족들이 있기 때문에 그래도 하루하루 돈을 벌어 살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생존자 김창수(45)씨의 경우 아내의 암 치료에 전세금과 보험금을 모두 충당한 뒤 지금은 통신망 설치기사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 건강과 터전 잃은 철거민들…"재정착 보호 대책 필요"
유가족과 생존자를 비롯한 철거민들은 참사 이후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서울시와 한국도시연구소·용산참사 기억과 성찰 위원회 등이 지난 2015년 시행한 조사에 따르면, 용산4구역 세입자 평균 월수익은 철거 전 511만원에서 191만원으로 줄었다. 3분의 1로 토막난 셈이다.
또 세입자 대부분은 육체적·정신적 건강에 문제가 있다고 답했다. 90%는 뼈와 관절 그리고 심장혈관, 근육, 기관지 등 다양한 신체 질환을 호소했다. 60%는 스트레스 과도와 불안·우울·강박을 겪었다고 했다.
주민들의 삶이 파괴된 배경에는 이주대책 등 충분한 대안이 마련되지 않은 무분별한 재개발 정책이 있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도시연구소 이원호 책임연구원은 "개발사업이 행해질 때 주민과 세입자의 생계 등 삶의 조건은 이전과 동등하거나 더 나은 수준으로 보장돼야 한다"며 "이들의 재정착을 보호하는 대책을 수립하도록 하고, 그렇지 못한 사업은 금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