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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니스 선수 출신 김은희씨는 초등학교 4학년 10살 때인 2001년, 코치에게 1년간 성폭행을 당했다. 트라우마에 시달리던 김씨는 2016년 한 대회장에서 가해자를 우연히 마주치고 고소를 결심했다. 하지만 고소 과정에서 정부와 대한체육회는 도움을 주기는 커녕 좌절만 안겼다. 대한체육회 산하의 스포츠인권센터와 문화체육관광부 산하의 스포츠비리센터에 신고 메일을 보냈지만 열흘이 지나도록 수신 확인도 되지 않았다.
대한체육회에 신고하면 바로 조사와 징계가 이뤄질 것으로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대한체육회는 대한테니스협회처럼 종목별 산하기관에 사건을 이첩할 뿐이었다. 신고한지 15일이 지나서야 대한테니스협회에 사건이 넘어갔지만 '코치가 연락이 안 된다'며 곧바로 조사가 진행되지 않았다. 문체부에서는 재판 결과를 보고 징계를 한다며 차일피일 미뤘다. 법정에서 문체부와 대한체육회의 징계를 자료로 내려고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결국 대한체육회에서는 신고한지 1년 4개월만에, 문체부에서는 1년 8개월만에 징계를 통보했다.
김은희씨가 홀로 고군분투하며 겪었던 좌절은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 일단 믿고 신고할 곳이 없다. 문체부의 스포츠비리센터는 미투 전문 기관이 아니고, 대한체육회는 선수들의 입장에서는 결국 가해자와 '한통속'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심석희 쇼트트랙 국가대표 선수의 용기있는 폭로 이후 마음 속으로 고심하고 있을 피해자들이 많지만 정작 스포츠 미투로 이어지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김은희씨는 지난해 8월 국회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만약 피해자가 현재의 사건의 신고했는데 담당자 배정에만 15일이 걸리면, 피해자에게 그 시간은 어떻게 느끼겠느냐"며 스포츠 성폭력 관련 신고센터의 문제점을 꼬집었다.
실제로 체육계 선수들이 성폭력 신고를 할때 대한체육회 스포츠인권센터를 이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2016년에 2건, 2017년 2건, 2018년 6건 등 3년 동안 합쳐봤자 10건이다.
특히 대한체육회 산하 스포츠인권센터의 경우 체육계의 끈끈한 인맥 속에 한통속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여자 선수들이 신고를 꺼리고 있다.
정용철 서강대학교 교수는 "선수들이 체육회에 신고하면 한통속이라고 보고 이용하지 않는다. 신고 내용이 가해자쪽에 흘러들어가서 유리하게 대비한다거나 하는 일이 있는 것으로 안다"며 "대한체육회가 신뢰를 못 받고 있는 상황이니 당연히 신고를 꺼릴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독립적이고 체계적인 조사를 할 수 있는 신고센터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문체부의 스포츠비리신고센터도 문체부 체육국의 한 과에서 맡고 있는 부수 기관일 뿐 전문성이 떨어진다. 정부는 심석희 선수의 폭로 이후 이 센터 산하에 따로 '체육단체 성폭력 전담팀'을 구성하겠다고 밝혔지만 취재결과 구체적인 계획도 잡아놓지 않은 상태였다. 전수조사도 언제, 어떻게 할지 정해지지 않았다.
문체부 체육국 관계자는 "아직은 계획을 검토하는 단계"라며 "전수조사나 전문 신고센터 개설 등에 대해서는 정해진 것이 아직은 없다"고 말했다.
시간은 촉박하다. 이번 기회에서 스포츠계의 썩은 부분을 도려내야할 마당에 신고할 곳도 없이 흐지부지 넘어간다면 가해자는 숨고 다시 적폐는 쌓이게 된다.
정용철 교수는 "독립적이고 강력한 조사권을 가진 기구가 설치돼야 한다"며 "정말 이번에 놓치면 마지막 기회를 놓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외부의 전문가 리스트를 뽑아서 제대로된 독립 센터를 꾸려야 한다"고 촉구했다.
실제로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전 '스포츠윤리센터'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문 대통령의 공약사항인 만큼 이를 서둘러 이행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함은주 문화연대 집행위원장은 지난 10일 '조재범 성폭력 사건 진상규명 및 재발방지 대책 촉구' 기자회견에서 "독립기구가 없다면 체육회 성폭력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 정부가 조성하기로 했던 '스포츠윤리센터'가 조속히 설립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