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CBS TV가 특집 다큐멘터리 2부작 '북간도의 십자가'를 1일, 2일 연속방송한다. 다큐는 북간도 출신 마지막 생존 인사인 문동환 목사와 젊은 역사학자 심용환 작가의 시선을 교차하는 형식으로 북간도 항일 독립운동 이야기를 추적한다. 이 글은 다큐 방영을 앞두고 심 작가가 그간 느낀 바를 정리한 것이다. [편집자 주]
영화 '엑소더스: 신들과 왕들' 스틸컷. (제공사진)
"여기가 어딘 줄은 알아?"
"그래! 앞엔 바다가, 뒤엔 군대가 있다!"
영화 '엑소더스 : 신들과 왕들'(2014)에서 모세가 백성을 이끌고 홍해 앞에 도착해서 어쩔 줄 모르는 가운데 나눈 대화의 일부이다. 지금 한국교회는 어느 지점에 서 있을까. 돌이킬 수 없는 몰락의 과정에 들어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개혁의 전조일지도 모를, 극도로 경색되고 엄청나게 부패한 시간에 진입한 것인가.
각자가 현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건 역사는 말이 없다. 하나님 또한 때로는 잔혹할 정도로 침묵하시지 않는가. 아마 그때도 그랬을 것이다. 약 100~150년 전 조선왕조 말기의 시간. 나라는 이미 오랜 기간 스스로 썩어 무너지기 시작했고 망국의 시간은 막을 방도도 뾰족한 수단도 없던, 다들 앞 다투어 매국 경쟁에 정신이 없던 절망의 시간들.
그 즈음에 기독교가 들어왔다.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선교사들. 복음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망국의 백성들. 동아시아의 그 어떤 지역보다 빠른 속도로 기독교가 전파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기독교를 그저 새로운 정신 세계 정도가 아닌 새로운 희망, 일종의 대안처럼 여기고, 활용하기 시작했다.
한국 근대사에 있어서 기독교의 유입과 애국계몽운동은 궤를 같이 한다. 독립신문과 독립협회 단계에서부터 기독교는 사회적 대안으로 여겨지기 시작했고 1907년 조선왕조가 멸망하기 3년 전에 이미 기독교도들은 신민회를 만들면서 공화주의와 독립전쟁론을 표방, 새로운 나라를 꿈꾸기 시작한다.
병상에 누워 있는 문동환 목사와 대화 중인 심용환 작가.
◇ 유교적 이념에 근거한 왕조가 아니라 국민 스스로가 직접 대표를 선출하는 민주공화국가1910년 조선은 영원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기독교는 망국의 절망을 극복하려는 강력한 열망과 결합하면서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세력이 된다. 민족주의. 나라가 없는 백성들은 스스로를 '민족'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3.1운동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이라는 1919년의 기적과 같은 시간에 하릴 없이 자신들의 열정을 불태웠다. 기독교라는 신흥 종교가 한반도의 길을 잃은 백성들 가운데 중요한 지표가 된 순간이었던 것이다.
역사의 변혁은 결코 중심부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고려가 경주가 아닌 개경에서, 김씨가 아닌 왕씨의 나라로 시작했고 조선이 한양에서 이씨에 의해 전혀 새롭게 시작했듯 함경도라는 한반도 역사에서 주변부의 지위를 결코 벗어나지 못한 한 때는 여진족의 땅이었던 이곳의 사람들은 생존을 도모하기 위해 북간도로 떠났다. 회령에서, 두만강을 넘어, 연변과 용정 일대로. 누가 이들을 기억할까. 기억할 필요는 있을까.
1910년 명동교회 성도들.
하지만 이상설과 김약연은 이 곳에서 서전서숙과 명동학교라는 민족 교육의 중요한 시발점을 감당했고 그들의 자녀들, 자녀들의 자녀들은 만주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기반이 된다. 그리고 그 중에는 윤동주, 문익환 같은 역사에 기억되는 주옥같은 인물들이 배출되기도 하니 하나님은 가난하고 버림받은 자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기억하신다는 사실을 새삼 입증하시려 작정하셨던 것인가.
"여기서 바다를 건넙시다."
"지금 그 명령은 이집트인들의 채찍과 다를 게 없소. 우린 이제 노예가 아니오."
"그렇다고 자유인도 아니오. 선조들의 땅인 가나안에 가는 꿈을 잃어버리지 않았소."
다시 영화 '엑소더스 : 신들과 왕들'의 한 장면이다. 홍해를 건너고자 하는 모세와 이에 저항하는 이들 사이의 논쟁이다. 노예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자유인도 아닌 사정. 가만히 있으면 다시 노예가 될 수 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자유인이 되기에는 아직 갈 길이 먼, 너무나도 용기가 부족한 현실과 강력한 모세의 의지.
북간도의 역사는 해방 이후 직접 한국사회를 관통한다. 분단과 독재. 민주주의와 남북화해를 향한 고단한 여정. 북간도의 자녀들은 중국과 북한의 공산화 과정 가운데 결국 남하를 선택하고 이후 대한민국 역사에서 진실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으니 주변의 역사가 중심으로, 사람의 지혜를 넘는 하나님의 모략이 입증되었다고 말하면 지나친 과장일까.
그리고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야하는가. 우리가 만든 이 나라는 그리고 이 땅에서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앞으로 어떤 정신과 어떤 실천과 어떤 내용으로 삶을 살아야하며 사회를 책임져야 하는가. 거대한 정치 스캔들을 극복했다고 복잡다단한 우리의 생활 세계가 단숨에 좋아 질까. 그저 입에 올리기조차 민망한 교회의 부정부패를 비판하는 것만으로 새로운 세상이 올까. 적당히 입진보가 되고, SNS에서 좋아요를 열심히 누르면 그것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충만해지며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감당해야 할 일을 다한 것일까. 아니면 그저 여전히 교회 생활에 충실하며 목사님의 말을 금과옥조처럼 따르며 우리끼리 모여서 열심히 찬양하고 목놓아 부르짖으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모두 알아서 할 것인가.
다큐 '북간도의 십자가'는 어쩌면 거대한 프레임에 걸려들지도 모른다. 민중신학적 사고를 합리화했다느니 하나님은 역사를 초월하시는 분인데 지나치게 상황화된 신학적 태도를 견지했다느니 등등으로 말이다. 아마도 이런 수준 있는 식견을 잃어버린지는 오래이니 그냥 종북좌익 세력이 만든 작품이라고 밀어 부칠지도.
하지만 '북간도의 십자가'라는 작품이 증언하는 100년 전 우리의 역사는, 우리의 역사 가운데 임한 하나님의 역사는 분명히 말한다. 하나님이 일하는 방식, 이 땅에 그의 복음이 뿌리 내려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고. 그리고 이제 다시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 가라고.
차라리 격렬한 논쟁과 숱한 오욕이 오가더라도 이 작품이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이 땅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거슬리고 불편했으면 좋겠고 특별히 기독교인들에게 모욕적으로 여겨졌으면 좋겠다. 우리의 참 구주인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고통 받으셨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아픔이 결국 우리의 교회를, 우리의 역사를 변화시켜나갈 테니까. 지난 1년 온 마음을 다해 간절함으로 만든 작품.
하나님, 우리의 간절함을 보시고 우리를 도우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