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수사하는 검찰이 박병대(61)·고영한(63) 전 대법관의 구속영장을 재청구하는 방안을 유력하게 검토하고 있다. 검찰은 의혹의 정점인 양승태(70) 전 대법원장의 혐의를 구체적으로 입증하기 위해서도 이들의 구속수사가 필요하다고 보고 강도 높은 보강수사에 나설 전망이다.
9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검 수사팀(팀장 한동훈 3차장검사)은 두 전직 대법관의 구속영장이 기각된 이후 내부 논의 끝에 이같이 후속 수사 방향을 정했다. 서울중앙지법 임민성·명재권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지난 7일 오전 "임종헌 전 차장과 공모관계에 의문이 있다"는 취지로 박·고 전 대법관의 구속영장을 모두 기각했다.
검찰 내부는 이번 영장기각에 상당히 격앙된 분위기다. 검찰은 법원이 이미 구속기소된 임 전 차장에게 모든 책임을 지우고 전직 대법관들과 양 전 대법원장은 보호하겠다는 의사를 드러낸 것으로 보고 있다. 법원이 박 전 대법관의 영장을 기각한 사유로 '이미 다수의 관련 증거자료가 수집돼 있는 점'과 '현재까지 수사 경과 등에 비춰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다고 보기 어려운 점' 등을 제시한 점은 영장 재청구까지 사전에 차단하려는 것 아니냐는 해석마저 낳는다.
이를 두고 검찰의 한 관계자는 "안철상 법원행정처장이 내린 '가이드라인'을 충실히 따른 결정으로 보인다"고 했다. 안 처장은 지난달 28일 "아무리 병소를 많이 찾는다 하더라도 해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며 검찰의 대대적 수사를 비판하는 듯한 발언을 한 바 있다.
수사팀은 영장기각 직후 "재판의 독립을 훼손한 반헌법적 중범죄들의 전모를 규명하는 것을 막는 것으로서 대단히 부당하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검찰은 두 전직 대법관에 대한 구속영장 기각 사유를 분석한 뒤 영장을 다시 청구하는 쪽으로 사실상 방침을 굳힌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검찰은 영장 재청구에 앞서 두 전직 대법관의 혐의를 좀 더 충실히 다지는 보강수사를 벌일 계획이다.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과 옛 통합진보당 관련 소송 배당조작 의혹 등 최근 수사가 본격 진행된 사안에 두 전직 대법관이 어떻게 가담했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규명하는 한편 새로운 혐의점을 추가로 파헤칠 것으로 보인다. 직속상관들이 자신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모습을 본 임 전 차장이 태도를 바꿔 윗선의 개입 여부에 입을 열지도 주목된다.
이달 중순으로 예상되던 양 전 대법원장 소환 시기는 다소 늦춰질 전망이다. 6개월 가까이 진행 중인 이번 수사가 연내 마무리될 것이라는 당초 예상도 물 건너가는 분위기다. 전직 대법관들 영장이 기각된 이후 검찰 내부에서는 "1년이 걸리더라도 의혹을 철저히 규명해 책임자를 처벌해야 한다"는 강경한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수사팀 관계자는 "수사할 부분이 아직 많이 남아 있고 기간에 구애받지 않는다"고 했다.
두 전직 대법관의 구속영장이 재차 청구될 경우 법원은 다시 상당한 부담을 떠안을 전망이다. 이미 두 전직 대법관에 대해 사실상 '무죄 심증'을 내비친 마당에 재차 영장을 기각한다면 '제식구 감싸기', '꼬리 자르기'라는 비판에 붙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법원은 구속 여부를 결정할 판사를 정하는 단계부터 난관에 부딪힐 것으로 보인다. 임민성·명재권 부장판사가 이미 동일한 사건의 두 피의자를 나눠 심사한 탓에 재청구된 영장은 다른 법관에게 배당하는 게 원칙이다. 대법원 '인신구속사무의 처리에 관한 예규'는 "재청구된 구속영장 청구사건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구속영장의 청구를 기각한 판사 이외의 판사가 처리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판사 5명 가운데 이들을 제외한 허경호·이언학·박범석 부장판사는 모두 이번 사건 당사자들과 함께 대법원에 근무하거나 배석판사로 일하는 등 근무연으로 얽혀 있다. 이 때문에 이 부장판사는 지난 3일 청구된 두 전직 대법관 구속영장 사건이 자신에게 배당되자 기피 신청을 했다.
법조계의 한 관계자는 "영장이 재청구된다면 영장재판부에 다른 판사를 추가로 투입하거나 당직 판사에게 영장실질심사를 맡겨야 공정성 시비를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