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케어팜 에익후버(Eekhoeve). 사진=이은정 시립서울장애인복지관 직업센터장
케어팜이란 사회적 돌봄의 케어(care) 서비스와 팜(farm, 농장)이 결합된 것으로 치매노인이나 중증장애인 등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이 농장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하고 이들이 농장에서 보내는 시간을 치유와 재활을 위한 서비스로 인정, 국가에서 케어비용을 지불하는 시스템이다.
네덜란드에서 처음 시도된 이래 전 유럽으로 확산되며 사회복지의 새로운 대안으로 각광받고 있다. 현재 노르웨이에 1,100개, 이탈리아에 700개, 벨기에에 660개가 넘는 케어팜이 운영되는 등 대부분의 EU 국가에서 케어팜 모델을 통해 취약계층에 대한 사회적 케어와 중소농에 대한 국가적 지원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있다.
네덜란드에서는 이미 1,100가 넘는 케어팜이 운영되고 있으며 케어파밍이 치매노인이나 중증장애인, 문제청소년 등에 미치는 긍정적인 효과에 대한 많은 사례연구도 진행되고 있다.
처음에는 의료계의 반발과 회의적 시각도 있었으나 실제 케어파밍의 긍정적 효과가 입증되고 농가에도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사회적 공감대가 이뤄짐에 따라 1997년 정부차원의 케어팜 지원센터가 설립되었다. 케어팜 수익의 상당부분은 케어 서비스에서 나오지만 농산물의 판매와 가공, 레스토랑 등의 매출이 여전히 상당부분을 차지한다는 점에서 농업이 4차 산업혁명의 모델로까지 확장되는 효과도 이끌어내고 있다.
◇ 네덜란드 케어팜의 진수를 보여주는 EEKHOEVE"에익후버(Eekhoeve)는 모든 사람을 환영합니다."
에익후버의 수석 코디네이터 헬렌 슈링(Heleen Schuring)이 우리 일행을 향해 두 팔 벌려 환영의 인사를 건냈다. "이 곳에서는 모든 사람이 나이와 종교, 신념, 출신 그리고 장애 유무와 상관없이 누구나 환영받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또한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신념이자 가치이지요."
굳이 그녀의 설명을 듣지 않아도 에익후버를 둘러싼 모든 환경들이 그 신념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유모차를 밀며 거니는 여인에게 느껴지는 여유로움,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뛰어다니는 아이들, 웃으며 대화하는 동네 주민들까지, 평화로움이 넘치는 이곳은 충분히 모든 사람들을 포용할 만한 여유가 있어 보였다.
'돌봄'이라는 의미의 케어(care) 서비스와 농장인 팜(farm)을 합쳐 만든 케어팜은 치매노인, 정신질환자, 중증장애인처럼 돌봄의 손길이 필요한 이들이 누군가의 도움으로 농장에서 일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국가에서는 이들이 일한 시간만큼 돌봄을 받았다고 인정해 케어 비용을 지불하고 있다.
가축 축사(위)와 자원봉사자가 제작한 안내지. 사진=이은정 센터장
에익후버에서도 운영비의 60%는 케어서비스 지원비로, 나머지는 농산물 판매와 가공, 레스토랑 운영의 매출로 이뤄지는데 그 역시도 상당한 금액이었다. 농장경영, 축산, 제조 등의 사업을 하는 에익후버는 네덜란드의 케어팜 중에서도 규모가 큰 편으로 가축축사, 대형온실, 커뮤니티시설, 농산물가공시설, 판매시설 등 다양한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가장 먼저 안내를 받은 곳은 할아버지와 손녀로 보이는 두 사람이 청소를 하고 있는 가축축사였다. 헬렌 슈링은 지적장애가 있는 이용객과 그의 업무를 돕는 자원봉사자라고 설명했다. "업무의 원활성을 위해 장애가 있는 이용객과 자원봉사자를 1:1로 배치하고 있어요."
이렇게 장애인 1인과 전문가 1인이 함께 직무를 수행한다면 중증장애인도 좀 더 수월하게 직무를 익힐 수 있고, 주어진 업무도 무리 없이 완수할 수 있는 좋은 시스템이다.
축사에서는 말과 당나귀, 소와 토끼 등 다양한 가축과 공작새를 비롯한 작은 새들이 작은 동물원을 이루고 있었는데 동물들은 장애인들이 돌보면서 교감할 수 있는 대상으로서 사육되고 있었다. 동물원 운영에는 인근 대학 학생들의 자원봉사가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한다.
에익후크의 특산물인 달걀술. 사진=이은정 센터장
맞은편 건물에는 소규모 제조시설이 있었는데 이곳 특산물인 달걀술을 생산하는 곳이었다. 노란색의 예쁜 유리병에 들어있는 달걀술은 8%의 알코올이 함유된 것으로 푸딩처럼 숟가락으로 떠먹는 독특한 제품이었는데 여왕의 방문을 기념하여 만든 오렌지색과 초콜릿색 등 달걀술을 제조, 판매하고 있었다.
에익후버의 대표적인 상품으로, 이 곳을 방문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달걀술을 기념으로 사간다고 한다. 술을 제조하는 공정은 전문가에 의해 자동으로 진행되지만 포장 및 라벨 붙이기 등 간단한 작업들은 마무리 작업공간에서 장애인 직원들이 담당하고 있었다.
나무 절단 작어베 한창인 Klinkert 씨와 소유주인 Hardeman 씨. 사진=이은정 센터장
달걀술을 제조하는 생산실을 지나 농장으로 가니 케어팜의 이용객인 Peter Klinkert(36) 씨가 방문객들을 환영해주었다. 에익후버의 소유주인 Wilco Hardeman(31)씨와 파트너가 되어 나무 절단 및 장작 만들기 등 비교적 단순한 업무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작업하는 모습이 편안하고 즐거워보였다.
초기 심리적으로 여러 문제를 가지고 있었던 Peter Klinkert 씨는 2011년 1월부터 꾸준히 에익후버에 참여했는데 케어팜 프로그램을 통해 많이 안정되고 긍정적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슈링 씨가 설명한다.
에익후버에서는 중증장애인 외에도 치매노인 케어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또 다양한 작물과 동물을 키우고, 달걀술과 햄같은 특산품 제조도 하고 있으며 레스토랑과 카페가 있어 요리와 카페업무도 한다. 그 외에 다양한 육체활동 프로그램과 음악 관련 프로그램과 창작활동을 실시하는데 필요할 경우 외부에서 진행하기도 한다.
이처럼 다양하고 선택의 폭이 넓은 직무와 프로그램이 있어 이용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방향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최대한 지원하고 있다. 특히 이용자들의 개별 특성에 따라 별도 프로그램과 공간을 운영하고 있는데 조용한 곳을 선호하는 사람들을 위해 외부인의 출입이 금지된 휴게공간을 별도로 마련하기도 하고 야외활동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 농장 옆 테라스에 넓은 휴게공간을 만들기도 한다.
이렇게 다양한 맞춤 활동과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참여와 도움이 필요한데 대부분 지역 주민과 대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에익후버의 운영을 돕고 있다.
이용객들이 밭일을 돕고 있다. 사진=이은정 센터장
이곳에서는 이용객이 하고 싶은 일을 말하면 그것을 바탕으로 일과가 계획된다. 돌봄 시간이 정해진 케어팜들은 저마다의 출근방식을 가지고 있다. 일부 이용객들은 정부에서 교통비를 지원하는 택시를 이용하기도 하지만 에익후버는 자원봉사자들이 운전하는 일반차량 3대와 버스 1대로 이용객의 출퇴근을 지원하고 있다.
케어팜 서비스의 시작은 차량에 탑승하면서부터라는 수석 코디네이터의 설명이 이어졌는데 이용자들이 매일 낯선 기사가 운전하는 택시를 이용할 때보다 자신들을 돌봐주는 자원봉사자가 직접 운전할 경우 더 큰 정서적인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더불어 그들의 적응상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현재의 출퇴근 시스템을 지속하고 있다는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서비스의 시작인 출근시 이용되는 픽업차량. 사진=이은정 센터장
이용객들과 70명의 자원봉사자들이 휴식을 취하고 하루일과를 준비하는 넓은 공간에는 자원봉사자와 이용객, 그리고 학생들의 스케줄을 보여주는 게시판이 한 켠에 마련되어 매일매일 누가 어떤 작업을 하고 있는지 한 눈에 볼 수 있다.
더 인상적인 것은 게시판 옆에 붙은 아기들의 사진이었는데 슈링 씨는 아기가 태어나면 집을 방문하여 축하하는 네덜란드 풍습에 따라 기쁜 일이 있으면 이 곳에 사진을 붙여 사람들의 축하를 주고 받는다고 설명한다.
이곳을 거쳐가는 모든 이용객과 자원봉사자들은 모두가 한 가족처럼 챙겨주고 공감하는 관계가 된다는 설명이 한 눈에 느껴지는 따뜻한 공간이었다.
이용객과 자원봉사자의 일과와 소식들이 게시된 게시판. 사진=이은정 센터장
마지막으로 발걸음을 옮긴 곳은 형형색색의 상품들을 만날 수 있는 로컬푸드 매장이었다. 생산실에서 이미 보았던 다양한 종류의 달걀술을 비롯한 지역특산물로 가득했다.
이곳에서 제조하고 생산한 것도 있지만 지역사회의 생산품도 판매해 지역의 식품창고이자 파머스 마켓 같았는데 지역주민과 방문객들이 끊임없이 들어오고 나가며 물건을 샀고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색색의 상품을 조화롭게 진열하고 은은한 조명을 설치한 모습으로 마켓보다는 전시장이라는 말이 더 어울려 무엇이든 손에 들고 나서야 매장 밖으로 나설 수 있을 것 같았다.
Eekhoeve 내 로컬푸드 매장. 사진=이은정 센터장
◇지역사회와 함께 웃을 수 있는 푸르메스마트팜 "우리 농장에서는 누구나 하고 싶은 만큼, 하고 싶은 일을 하며 행복하게 지낼 수 있도록 지원합니다. 농사일을 하거나 동물을 돌보거나, 가공 업무를 하거나 원하는 일을 하죠. 다양한 일들을 개발하다 보니 사업도 늘어나고 자원봉사자와 방문객들도 늘어나 성수기에는 한 주에 1500명이 방문하기도 해요."
슈링 씨의 설명에 자부심이 느껴졌다.
카페와 아이스크림 가게, 동물원이자 가축축사, 드넓은 농장과 생산시설, 장애인직업재활프로그램, 치매돌봄센터, 로컬푸드센터 등이 한 곳에 모여 있음에도 어색함 없이 어우러지는 모습이 인상적인 에익후버는 어쩌면 가장 우리가 바라는 이상적인 형태의 장애인케어시설에 가까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애인도 다양한 선택과 체험을 할 수 있게 하고,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 지역주민도 즐겁게 이용할 수 있으며, 많은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운영하는 지역 공동체 모두의 활기 넘치는 공간.
고된 일처럼 보여도 함께 하는 모든 직무들을 치유의 한 과정으로 생각하고, 돈을 버는 노동자가 아닌 서비스 이용객으로 비용을 지불하는 시스템이 처음에는 낯설게 느껴졌지만 농장을 다 둘러보고 나니 노동을 하고 있음에도 밝은 미소를 유지하는 이용객들과 자원봉사자의 표정이 이해가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