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쓰백'에서 아동학대 피해자 소녀를 구하기 위해 세상과 맞서는 백상아 역을 연기한 배우 한지민. (사진=BH엔터테인먼트 제공)
"이런 작품이 영화로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마음이 들었어요."
한지민에게 영화 '미쓰백'의 첫 만남은 조금 특별했다. 시나리오를 읽을 때부터 연출을 맡은 이지원 감독을 만나고 싶었지만 이 감독의 거절로 한 번 불발됐다. '한지민'이라는 배우 이미지에 거친 삶을 견뎌 온 백상아 역은 '맞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영화 '밀정' 뒷풀이 자리에서 우연히 한지민을 만난 후, 이 감독의 생각은 180도 뒤바뀌었다고.
"시나리오를 읽고 나서 바로 매니저한테 전화를 걸어 감독님과 만나보고 싶다고 이야기를 했어요. 그런데 감독님은 한지민이 리스트에 있다니까 '됐다 그래'라고 하고 다른 배우를 찾기 시작했다고 해요. 그러다가 '밀정' 뒷플이를 하러 간 자리에서 정말 우연히 감독님 연출부도 회식을 했는데 제가 그 호프집에 들어서는 순간, 갑자기 번개 맞듯이, 첫눈에 반하듯이 저한테 꽂혔대요. 아마 그 때 검은 맨투맨티와 검은 슬랙스 바지 그리고 클러치를 들었는데 일수가방처럼 보였나봐요. 하여간 슬로우 건 것처럼 제가 지나가서 연출부 사람들한테 '저 여자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얼마 전, 됐다 그래라고 하신 한지민 씨다'라고 답이 나왔던거죠. 감독님이 알고 계셨던 한지민의 이미지와 그 현장에서 본 제 모습과 눈빛이 판이하게 달랐었다고 하더라고요. 저 배우가 궁금하다는 생각을 하셨고, 정말 영화처럼 호감을 갖고 만났기 때문에 처음 만나자마자 잘해보자고 이야기가 됐어요. 일수가방 덕분이네요." (웃음)
백상아, 일명 '미쓰백'은 아동학대의 피해자이자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전과자가 된 인물이다. 한지민은 백상아 캐릭터를 준비하는 작업을 '만난다'고 표현했다. 세상을 외면한 채 살아가는 캐릭터를 구축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백상아를 어떻게 만나야할지가 제게는 숙제 아닌 숙제였어요. 새로운 것에 도전해 볼 생각도 하고, 갈증도 느끼면서 배우가 그런 걸 해결하려면 작품 속 연기 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기존의 이미지를 벗겨야 된다는 것보다 내가 백상아가 되는 작업이 중요했어요. 막연하게 욕하고, 담배피고 강하게 해야 표현되는 캐릭터가 아니라 전과자로 낙인 찍히고 나서도 왜 세상을 살아갔는지, 왜 이렇게 날이 서있는지, 어떤 감정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지 알아야 했어요. 영화는 드라마와 달리 캐릭터를 5~10분 안에 보여주지 않으면 몰입도가 깨지기 때문에 실패하면 안된다는 생각에 더 캐릭터를 단단하게 쌓고 싶었어요."
아동학대 피해 아동과 연대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다보니 '미쓰백' 촬영을 하면서 감정적으로, 육체적으로 힘든 순간도 있었다. 지은 역으로 호흡을 맞춘 아역 배우 김시아가 한겨울 추운 상황에서도 불평불만을 하지 않아 자신도 별다른 불평을 할 수 없었다고 웃기도 했다.
"공사장에서 주미경 역의 (권)소현이와 싸우는 장면을 3일 동안 찍었는데 정말 악에 받치게 힘들더라고요. 이런 클라이맥스에서 여자들끼리의 싸움은 작품에 다뤄지지 않아서 막연했어요. 날 것 같은 싸움이어야 한다고 해서 유튜브를 찾아봤는데 너무 무섭더라고요. 처음에는 그냥 한 번 싸워보자고 싸웠는데 우리 열정에 비해 카메라에 얼굴이 하나도 잡히지 않았어요. 모래사장이고 경사가 좀 있어서 한 테이크만 가도 체력이 소진되니까 나가떨어졌어요. 주먹질을 해볼까도 생각했는데 그러면 쌓아온 감정이 풀리지않고 누아르처럼 느끼해지는 느낌이 있었어요. 비장하게 하거나 너무 영화처럼 되면 오그라들더라고요. 모텔에서 상아가 자신을 도와주는 형사 장섭과 어머니 이야기를 하며 눈물 흘릴 때는 어머니를 거부했지만 사실은 보고 싶었던 상아의 마음, 그 진심이 느껴져서 토해내듯 울었던 것 같아요. 눈물이 그치지를 않으니 감독님이 달래주셨는데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그리고 집에서 탈출해 추운 골목길에서 상아를 기다리는 지은을 껴안았을 때, 저는 지은의 모습이 꼭 어린 시절의 상아 같았거든요. 감정적으로는 이런 장면들이 힘들었던 것 같아요."
(사진=영화 '미쓰백' 스틸컷)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영화들은 종종 메시지에 영화 자체가 묻히거나, 영화관에서까지 심각한 주제를 생각하고 싶지 않은 관객들에게 외면당하기도 한다. 실제로 아이가 있는 부모 관객이라면 '아동 학대' 문제는 더욱 '불편한' 소재일 것이다. 그럼에도 한지민은 영화가 사회적 메시지와 만날 때 가지는 파장을 강조했다.
"불편한 현실이고 아픈 이야기이지만 제가 외면한다고 해서 그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죠. 저 역시 그런 뉴스를 접할 때마다 불편했지만 10분이 지나면 그 감정을 잊어버려요. 영화나 드라마에 감정을 이입하면 사실 더 불편하죠. 하지만 전 우리 아이들을 위해 더 나은 제도가 생기게 되려면 관심밖에는 없다고 생각해요. 불편해도 들여다봐야 하는 문제라는 거죠. 우리 아이는 아니더라도 내 옆에 어떤 아이에게 일어날 수도 있고, 우리 아이일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봐주셨으면 해요. 사회적 이슈나 문제는 영화적으로 크게 작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보호받지 못하고 자란 상아와 지은이가 만났을 때 생기는 연대의 느낌을 통해 불편하게 남더라도 그 여운이나 잔상을 길게 가져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아동학대가 없어져야 된다거나 이런 이야기를 꼭 봐 달라고 하는 게 아니라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우리가 바라봐준다면 그 시선이 모여 관심이 되고, 그렇게 저도 배우로서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이기에 한지민은 '미쓰백'을 만나 백상아를 표현할 수 있었다. 연기를 시작했던 초반을 돌이켜보면 그렇다. 당시 한지민은 드라마 '올인'에서 송혜교의 아역으로 나와 시청자들에게 눈도장을 찍고 '대장금'에서 의녀 신비 역으로 주목받았다. 현장에서 '덜 혼나고 싶어' 연기를 열심히했던 그 시절을 지나 온전히 스스로를 찾아가고 있는 지금이, 한지민은 '나이를 먹으니 많이 변했다'고 이야기한다.
"정말 운이 좋게 기회가 왔고, 오디션에 뽑혀서 연기를 하게 됐죠. 그런데 그것도 제 역량이라기보다는 송혜교 선배님과 이미지가 닮아서 됐던 거고요. 연기라는 게 제 인생에서는 어떤 한 부분도 차지하고 있지 않았어요. 그 전까지만 해도 제 삶에서 그렇게 혼나는 일이 없었는데 많이 혼나니까 겁도 두려움이 많았어요. '올인' 다음에 미니시리즈 한 편을 했는데 매일 울었던 것 같아요. 제가 폐가 되는 게 느껴졌고, 도망가고 싶었거든요. '대장금'을 하면서 주인공의 책임을 내려놓고 보니 좀 현장이 보이더라고요. 당시에는 덜 혼나고 싶어서 열심히 했던 시간이 쌓이다보니 캐릭터적으로 같은 상황에서도 어떻게 다르게 표현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됐어요. '조선명탐정' 시리즈에 참여하면서 새로운 작업에 재미를 느끼며 그렇게 조금씩 많이 바뀌었고요. 지금의 제가 만났으니까 백상아를 표현하고 싶었지 만약 더 이르게 만났다면 다른 것부터 계산하거나 사람들이 어떻게 봐줄 것인지 주저하고 망설였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