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 시인 (사진=자료사진)
"오래된 악습에 젖어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르는 불쌍한 사람의 마지막 저항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족 문학의 수장이라는 후광이 그의 오래된 범죄 행위를 가려왔습니다"
고은(85) 시인의 성추행 의혹을 처음 폭로하며 문단 내 미투 운동을 촉발시켰던 최영미 시인은 거장에 대해 침묵해왔던 행태를 꼬집었다.
고은 시인이 최 시인을 비롯해 미투 증언자들을 대상으로 손해비상 청구 소송을 제기한데 대해 여성, 노동, 시민사회단체가 일제히 비판에 나서고 있다.
350여개 여성·노동·시민사회단체가 연대해 구성한 '미투운동과 함께하는 시민행동(미투시민행동)'은 23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지방변호사회관 5층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고은 시인의 반격은 피해자의 용기 있는 외침을 묵살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기자회견에서 발언에 나선 최영미 시인은 "이 재판에는 저 개인의 명예만이 아니라 이 땅에 사는 여성들의 미래가 걸려있다"며 "품위를 잃지 않고 끝까지 평정심을 잃지 않고 싸워 이기겠다"고 강조했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은 "우리 사회에서 성폭력 피해자들을 무고나 명예훼손으로 역고소하는 일은 늘 있어왔다"라며 "더 이상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부당한 대우나 불이익, 2차 피해, 역고소 등을 두고 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의 문화 권력으로 인해 피해자들은 20여년이 훨씬 지나서야 이 사실을 알릴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사실에 대한 진심 어린 사죄는커녕 거액의 소송으로 대응하고 있다"라며 "고은 시인은 명예훼손을 말하기 전에 피해자들이 겪어온 고통을 헤아리고 자기 행동에 대해 깊이 반성하길 바란다"라고 촉구했다.
고미경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는 "최 시인의 용기 있는 말하기에 손배소로 대응하는 것은 악의적이고 정의롭지 못한 행동이다"라며 "명예를 조금이라도 지킬 마음이 있고, 지식인으로서의 양심이 남아있다면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철회해야 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최 시인의 소송 대리를 맡고 있는 조현욱 변호사는 "최 시인의 행동은 문화 권력을 상징하는 고은의 오랜 추태, 그를 묵인하고 비호하는 문단 내 침묵을 그대로 둘 수 없다는 용기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이 재판은 단순히 하나의 사건에 머무르지 않고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재판의 의미를 설명했다.
앞서 고은 시인은 관련 의혹을 부인하면서 지난달 17일 자신에 대한 성추행 의혹을 폭로한 최영미 시인과 박진성 시인에게 각각 1000만원, 이를 보도한 언론사 등을 대상으로 10억원 가량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최영미 시인은 시 '괴물'에서 'En선생'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고은 시인의 상습적인 성추행 의혹을 폭로했으며, 박진성 시인은 페이스북에 자신의 목격담을 올렸다.
고은 시인이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은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4부(이상윤 부장판사)에 배당됐다.
미투시민행동은 손해배상 소송 과정에 연대하고 최 시인에 대한 2차 피해에 단호히 대응할 예정이다. 아울러 '고은 시인의 성폭력 피해자 및 목격자 제보센터'와 연대해서 피해자 회복과 가해자 처벌을 위한 활동을 함께 전개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