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정재(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염라언니'라는 표현은, 영화 '신과함께-인과 연'(이하 '신과함께2')에서 저승의 절대 권력자 염라대왕을 연기한 배우 이정재에게 붙은 별명이다. 지난 25일 서울 삼청동에 있는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자신이 그리 불리게 된 사연을 아래와 같이 전했다.
"촬영 현장에서 염라대왕 분장을 하면 긴 머리 가발을 썼어요. (머리카락이) 늘어져 활동하기 불편하니까 집게 머리핀으로 고정을 했죠. 그 모습이 언니 같다며, 제가 그렇게 나타나면 스태프들이 '염라언니 납시었다'고 했어요. (웃음)"
같은 날 다른 시간에 인터뷰한 배우 하정우는 '염라스틴'이라는 이정재의 또 다른 별명을 언급하기도 했다. "(영화 '군도'에서 긴 머리 액션을 선보인) 강동원 이후 최고의 청순미를 뽐냈다"는 것이다.
이날 이정재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에게 '언니'라는 수식어가 붙은 데는 타당한 이유가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단순히 촬영 현장에서 보인, 분장에 따른 긴 머리 외형이 전부는 아니리라는 확신이었다.
극중 염라대왕의 노출 비중은 그리 크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감은 뚜렷하다. 염라대왕 역을 맡은 이정재는 특별출연으로 소개되고 있지만, 정작 본인은 "명백한 조연"이라고 강조했다.
"(연출을 맡은) 김용화 감독의 배려라고 생각합니다. (그간 주로 주연을 맡아 온) 나를 조연으로 규정짓기 싫었던 거죠. 그러니 특별출연이나 우정출연이라는 표현으로 위상을 지켜줬다고 봐요. 하지만 극중 염라대왕은 사실 완벽한 조연이죠."
이는 극중 역할의 물리적인 비중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그의 배우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했다.
"외국 영화를 보면, 훌륭한 배우들이 주·조연 가리지 않고 좋은 프로젝트로 모여 재밌게 작업하잖아요. 그게 부럽더라고요. '한국영화에서도 그러한 프로젝트가 있다면 나도 참여하고 싶다'는 마음을 가져 왔는데, 그렇게 출연한 영화가 '도둑들'(2012)이었죠. 배역의 크기를 따지지 않고 영화적 재미만으로 모였던 작품이었으니까요."
이정재는 "그러다 보니 영화를 선택하는 기준도 '새로운 연기를 보여줄 수 있는 역할이라면 배역의 크기를 떠나 충분히 즐기면서 할 수 있다'는 쪽으로 바뀌었다"며 "이번 '신과함께' 1, 2편 역시 김용화 감독과의 친분도 친분이지만, 염라대왕이라는 역할 자체가 재밌고, 중요하게 작용하는 캐릭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출연을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 "염라대왕, 현실의 절대 권력자 이미지와는 거리 두고 싶었다"
영화 '신과함께2' 스틸컷(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염라대왕을 연기하는 것은 이정재에게도 흥미로운 도전이었다. 그가 염라대왕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보자'는 데 연기의 방점을 찍은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나 역시 '염라대왕 하면 나이 지긋한 사람이 아닐까'라는 식의 생각이 있어서 처음에는 망설였어요. 그런데 '판타지 영화인 만큼 그러한 고정관념을 깨보자'는 제작진의 말에 설득됐어요. 출연을 결정하고 나서는 '어떻게 해야 잘 소화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했죠."
그는 "먼저 1천년이라는 시간을 이어온 인연이라는 극의 설정에 집중했다"며 "염라대왕이 지닌 그 긴 기다림이라는 정서가 가장 크게 와닿았고, 그것이 캐릭터 구축의 시작점이었다"고 설명했다.
"염라대왕은 모든 인간이 죽은 뒤에 만나게 되는 인물로 여겨져 왔잖아요. '벌을 받아라'라며 호통만 치는 염라로 보이는 것은 왠지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푸근하고 다정다감한 캐릭터로 가야 할지도 고민했는데, 다정다감하기만 하면 또 맛이 안 날 것 같았죠."
이정재는 "캐릭터는 결국 이야기에 보탬이 되고, 그 이야기를 흥미롭게 만들어야 하는 존재"라며 "극복해야 할 어려움을 주고, 그것을 헤쳐나가게끔 만드는 캐릭터로 극중 염라대왕을 설정했다"고 말했다.
흥미로운 점은 "현실의 절대 권력자 이미지와는 거리를 두고 싶었다"는 이정재의 말이었다. 이러한 극의 정서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신이 염라대왕을 저승의 재판정 증인석에 앉히는 장면이다.
이에 대해 이정재는 "요즘 시기에 빚대어 생각해 볼 수 있는 부분이 있는 신"이라며 설명을 이어갔다.
"염라대왕은 사후세계 절대권력자라 할 수 있잖아요. 그러한 인물마저도 어떠한 진실을 가려내는 데 있어서 인간과 수평적인 선상에 둘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죠. 시사하는 바가 커 보입니다. 김용화 감독이 시나리오를 쓰면서, 그 파트를 통해 본인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영화적으로, 은유적으로 표현했다고 생각해요."
영화 '신과함께'를 시리즈물로 발전시키자는 논의가 진행되는 상황을 두고 이정재는 "3, 4편에서도 염라대왕 역할이 주어진다면 할 수 있다"면서도 "이번에는 계약서를 꼼꼼히 쓰겠다"는 말로 웃음을 자아냈다.
"영화 '신과함께2'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염라대왕을 다른 배우가 할 수도 있게끔 열어놨어요. 배우 입장에서 염라대왕은 실존하지 않는 캐릭터라는 점에서 재밌는 경험이었습니다.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고민하면서 연기한 염라대왕인 만큼, 내가 연기한 캐릭터가 정답이라는 성취감이 컸으니까요."
◇ "선배들에 마음의 빚…영화계 노동환경 개선 움직임은 좋은 현상"
배우 이정재(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늙었구나' 싶어요. (웃음) 이제는 나도 선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정재는 "후배들이 나에게 바라는 것이 생기고, 기대고자 한다는 마음을 알아가면서 '내가 벌써 그만큼 나이를 먹었구나' '선배 역할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겼다"며 "마치 '당신 한국영화계 선배로서 이제는 이런 역할도 해야지'라는 이야기로 들려서 배역이 들어오면 거절을 잘 못하겠더라"고 말했다.
"스크린쿼터 시위처럼 선배들은 한국영화 존립과 발전을 위해 그동안 많은 일을 해 왔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일해 온 후배 입장에서 선배들의 노력이라는 마음의 빚이 굉장히 많이 쌓여 있어요."
그는 "이번 '신과함께' 1, 2편처럼 대형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개봉까지 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선배들의 희생과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며 "나 역시 후배들에게 그러한 선배로 서 있으려 애쓰고 있다"고 했다.
"'신과함께' 1, 2편은 1년 내내 촬영했습니다. 스태프들, 배우들 모두 체력적으로 심리적으로 힘에 부치는 현장이었죠. 후반부에 투입된 입장에서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 안타깝더라고요. 그래서 현장에서 응원의 한마디라도, 뭔가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었죠."
표준근로계약서 등 영화계 노동환경 개선을 위한 시행되는 제도에 대해서도 이정재는 소신을 드러냈다.
"나의 신인 시절에는 아침 7시에 촬영을 시작하면 다음날 아침 7시에 끝났아요. 쉴 수 없는 환경에 스태프들이 버티기 힘들었죠. 이러한 점이 개선되고 있는 것은 좋은 현상입니다. 그 덕에 우리가 개선해 나가야 할 부분이 조금씩 더 보이기 시작했으니까요."
이정재가 동료배우 정우성과 함께 지난 2016년 연예기획사 아티스트 컴퍼니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행보의 일환이다.
"배우들 마음은 배우가 가장 잘 알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불편한지 잘 알기에 배우들이 주축이 된 회사를 세운 거죠. 그렇게 운영하다 보면 더욱 효과적인 시스템을 만들 수 있다고 봐요. 이러한 취지가 외부 요인 등에 의해 퇴색되지 않고 발전하기를 기대합니다."
그의 차기작은 '검은 사제들'(2015)로 대중의 눈도장을 받은 장재현 감독의 신작 '사바하'다.
"사실 그동안 무거운 캐릭터를 많이 했잖아요. '사바하'에서는 목사 역할을 맡았습니다. 다소 가벼운 느낌의 캐릭터여서 연기적으로 다르게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정확한 개봉 스케줄은 아직 안 나왔지만, 오는 12월 초 혹은 말에 '사바하'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