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미디어 구석구석에 뿌리 깊게 박혀 있는 여성혐오를 지적하고 이를 바꿔나가자고 제안하는 한국여성민우회의 특강 '미디어씨, 여성혐오 없이는 뭘 못해요?'가 진행됐다. 올해 여름 4회 일정으로 돌아온 시즌 2에서는 걸그룹, 광고, 웹툰, BJ 업계 내 여성혐오에 대해 이야기 나눈다. 강연자의 동의를 구해, 관련 내용을 4일부터 연재한다. [편집자 주][글 싣는 순서]
① 아이돌 산업 곳곳엔 여성혐오가… 극한직업 걸그룹② 페미니즘과 광고의 결합, '펨버타이징'을 아시나요?<계속>
2014년 공개된 후 큰 반향을 일으킨 '올웨이즈'의 '소녀답게'(Like a Girl) 광고. 펨버타이징(Feminism+Advertising)의 대표적인 예다. 이 광고의 조회수는 5일 현재 6595만 회를 넘겼다. (사진='소녀답게' 광고 캡처)
4일 오후 7시 30분, 서울 마포구 합정동 100주년기념교회 교육관에서 한국여성민우회가 주최하는 '미디어씨, 여성혐오 없이는 뭘 못해요?' 시즌 2 두 번째 강의 '광고 편'이 열렸다.
강연자는 이노션 월드와이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등을 거쳐 현재 프리랜서 카피라이터와 광고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인 김진아 씨였다. 김진아 씨는 지난해 9월 민우회가 마련한 '광고 속 성차별 이대로 괜찮은가' 발표회에도 참석해 왜 아직도 성차별적인 광고가 만들어지는지 현직자 입장에서 분석한 바 있다.
이날 그의 강연은 크게 세 갈래였다. 과거보다 더 뒷걸음질 친 광고 속 여성의 이미지 사례와 최근 급부상한 '시장 페미니즘'을 차용한 '펨버타이징'(Feminism+Advertising) 경향을 살펴보고, 광고 속 성차별과 여성혐오를 줄이기 위해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좋은지를 알아봤다.
◇ 요새 광고에 나타난 성차별과 '퇴행'한 여성광고에 나타난 성차별을 이야기하는 자리다 보니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영상과 이미지가 등장했다. 김진아 씨가 제일 처음 보여준 것은 모바일 송금 서비스의 시리즈 광고였다. 오랫동안 연락 안 하다가 갑자기 모바일 청첩장을 보내는 옛 친구, 술값 1/N 송금하지 않으면 전날 찍은 엽기적인 사진을 SNS에 공유하겠다는 친구, 소개팅남으로부터 전날 밥값을 보내라는 말을 듣는 여성. 모두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김진아 씨는 "(첫 번째 광고는) 갑자기 연락해서 민폐 끼치는 상황을 보여준 것이다. 두 번째는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식으로 얄밉게 구는 친구가 나오는데 그도 여자다. 3번째는 마치 여자가 항상 얻어먹는 존재인 것처럼 그렸다. 사람들이 여성에게 가진 부정적인 이미지를 전형적으로 계속 보여주고 있다. 하나의 예외도 없이"라고 설명했다.
김진아 씨는 "이 광고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항의해서 다른 광고로 대체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제작자)이 이유를 알지 잘 모르겠다. 재밌다고 만든 것이겠지만 결과물은 한쪽 성별에만 굉장히 차별적, 비하적으로 나왔다. 저는 이걸 내면화된 여혐(여성혐오)이 자기도 모르게 스며 나온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요즘은 드러내놓고 여성을 무시하거나 비하하는 내용은 없지만 새로운 방식으로 여성을 희화화한다는 게 김진아 씨의 설명이다. 그는 남성 연예인이 야쿠르트 아줌마 모습으로 등장하는 과채음료 광고, 또 다른 남성 연예인이 젊은 여성과 뽀글머리 파마를 한 아줌마로 분한 숙취해소 음료 광고를 예로 들었다.
김진아 씨는 "이제는 여장한 남자가 등장한다. (과채음료 광고에서 야쿠르트 아줌마는) 뚱뚱하고 뭔가 웃기게 표현된다. (숙취해소 음료 광고에선) 팀장님, 부장님, 대리님 등 남자는 양복을 입고 나오지만, 여성은 유아적인 제스처를 한다든가 빠글빠글한 머리를 하는 아줌마로 희화화된다"고 부연했다.
무해하고 발랄한 어린 이미지의 여성이 자주 나오는 것도 최근 경향이다. 걸그룹 멤버와 배우가 각각 특이한 춤을 춰 화제를 모았던 음료 광고들을 들 수 있다. 실제로는 성인이지만 광고 안에서는 고등학생 정도로 보일 만큼 어리게 표현된 여성 연예인의 소주 광고도 이 예시에 포함됐다.
김진아 씨는 "언제부턴가 소주처럼 독한 술 광고에 여자 모델이 등장했다. 과거에는 섹시한 모델이 등장했다면 이제는 더 어리고, 수줍어하면서 무해한 소녀의 이미지를 연기하는 (술) 광고가 나온다. 남자들은 맥주 광고할 때 멋있게 나오는데, 소주 광고 속 여성은 여고생 같은 이미지로 나오고 있다"고 설명했다.
1994년에 나온 화장품 마몽드 광고. 모델인 이영애는 본업인 형사 일을 주도적으로 해내고 운동 등 자기계발도 하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사진=광고 캡처)
김진아 씨는 "제가 어렸을 때 봤던 광고들과는 매우 다른 느낌"이라며 1994년에 나온 마몽드 광고 형사 편을 보여줬다. 모델인 이영애는 여기저기를 누비며 일을 하고 자기계발에 힘쓴다. 김진아 씨는 "아까 음료 광고들과 비교하면 여성상에 굉장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과거는) 이렇게 육체 단련도 하고 뛰어다니며 일도 하며,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모습으로 그려졌다"고 밝혔다.
그는 IMF 사태(국제금융위기) 이후 광고에 나오는 여성의 이미지가 낙관→비관, 수용→배제, 성숙→미숙으로 바뀌었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상황이 좋을 때는 여성에게 형사 자리도 줄 수 있을 만큼 너그러웠지만, 이제 여성은 밥그릇을 놓고 싸울 만한 경쟁자가 아니라는 게 광고에 반영된다. 성숙하고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여성의 이미지에 남성들의 시각이 반영돼, 자신(남성)을 기죽일 것 같지 않은 만만하고 무해하고 미숙하며 경쟁자가 될 것 같지 않은 여성이 광고 대다수를 차지하게 됐다"고 전했다.
◇ 자기 긍정 메시지를 전하는 '펨버타이징'의 출현김진아 씨는 최근 광고에 나오는 여성을 '미숙하고, 상황이 좋지 않고, 배제된다'고 분석했고, 이를 '퇴행'이라고 짚었다. 물론 이런 광고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할리우드에서도 큰 목소리로 이야기되는 페미니즘이 시장과 만난 결과물도 꾸준히 나오고 있다.
김진아 씨는 '시장 페미니즘'(Market Feminism)의 영향으로 이런 경향이 나왔다고 말했다. 패션으로 소비되는 여성해방을 의미하는 시장 페미니즘은 비욘세가 무대 마지막에 FEMINIST라는 큼지막한 글자를 띄운 후 자타공인 페미니스트로 여겨진 데서 착안해, 일명 '비욘세 페미니즘'이라고도 불린다.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에 자주 올라오는 페미니즘 물품도 이 흐름과 무관치 않다. '당신은 안전한가요?'라고 안부를 물으면서 귀걸이를 판다든가, '누구나 무엇이든 될 수 있다'며 자존심을 지켜주는 배지와 에코백을 판다든가 하는 식이다.
시장 페미니즘을 적극 수용한 광고를 '펨버타이징'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페미니즘과 광고(Advertising)의 합성어다. 김진아 씨는 "철저히 개인적인 소비 행위에 페미니즘 색깔을 살짝 입히는 광고"라며 "불안, 공포, 질투, 죄책감 대신 칭찬과 자기 긍정을 강조한다"고 설명했다.
'올웨이즈'의 '소녀답게' 광고는 여자애 같이 뛰는 법, 던지는 법, 싸우는 법을 소녀가 아닌 대상에게 요구한다. 이후, 진짜 소녀들이 직접 그 주문에 맞춰 동작을 취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회에서 인식되는 '여자애다움'에 관한 편견을 이야기하는 광고로 펨버타이징의 대표적 예로 꼽힌다. (사진='소녀답게' 광고 캡처)
미국 생리대 회사 올웨이즈(always)의 펨버타이징은 '소녀다움'에 관한 편견을 깨는 이미지 광고로 큰 화제를 모았다. 소녀처럼 달려보라, 소녀처럼 던져보라는 주문에 어른들은 움츠러들거나 소극적인 자세를 하고 때로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정작 '진짜' 그 나이대 소녀들은 주문에 집중해 힘차게 던지고 열심히 달린다.
김진아 씨는 "'Like a Girl 광고는 펨버타이징의 가장 큰 모멘텀이 됐다"며 "어디에도 생리대를 팔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는 이렇게 어린 여성의 자존감을 생각하는 브랜드이니 여기에 동의한다면 우리 물건을 사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에서도 펨버타이징이 조금씩 등장하고 있다. '메이크업은 나의 힘'이라고 강조한 수지의 랑콤 파운데이션, 화장하지 않은 맨 얼굴로 나오는 SK-Ⅱ, 광대뼈가 나오면 어떻냐며 자신의 외모를 긍정하는 아이소이 등 화장품 광고가 주를 이룬다.
김진아 씨는 "요즘은 탈코르셋 운동(사회가 여성에게 강요한 외적인 기준에서 벗어나자는 운동)도 나오니 민낯을 부각해 보자는 데서 나온 광고 같다"며 "예전에 비하면 자기 긍정 메시지가 많아졌다. 그동안 광고에서 볼 수 없었던 77 사이즈 모델이 나오기도 하고. 어쩔 수 없이 상품 광고를 하긴 하지만 저런 식의 접근이 늘어나는 게 미디어적인 측면에서는 더 나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밝혔다.
◇ 해법은 밖으로부터의 '세력화', 안으로부터의 '조직화'김진아 씨는 성차별적 광고에 대응하기 위한 해법으로 밖으로부터의 세력화와 안으로부터의 조직화를 제안했다. 조직을 만들어 세력을 키우고, 법제화를 진행한다는 것이다. 그는 지난 1일 진행된 '여성 소비 총파업'을 긍정적인 시도라고 봤다.
여성 소비 총파업이란 매월 첫 번째 일요일에 여성들이 소비, 지출을 일절 하지 않는 것이다. 성차별 철폐와 여성 인구의 영향력 확인을 위해 기획됐다. 김진아 씨는 "모든 소비 활동을 멈춰 (여성이) 소비자로서의 힘을 가시화함으로써 브랜드나 광고주에게 압력을 가하고 성차별적 광고를 못 하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굉장히 효과적인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여성이 가장 강력한 부분이 소비자로서의 힘이다. 지갑을 여는 것도 주로 여성이기 때문에 소비자 파워를 잘 이용하는 것도 현명한 일이라고 본다"고 전했다.
지난 4일 오후 7시 30분, 서울 마포구 합정동 100주년기념교회 교육관에서 한국여성민우회가 주최하는 '미디어씨, 여성혐오 없이는 뭘 못해요?' 시즌 2 두 번째 강의 '광고 편'이 열렸다. 김진아 카피라이터가 강연하고 있다. (사진=한국여성민우회 제공)
김진아 씨는 또한 외국에서 먼저 시도해 효과를 본 제도를 소개했다. 미국에서 시작된 '3% 컨퍼런스'(THE 3% CONFERENCE)는 광고 회사 CD(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중 오직 3%만이 여성이기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더 많은 여성 CD를 만드는 데 일조하겠다고 광고계가 힘을 모은 덕에 11%대까지 올라갔으며, 브라질 등 타국에도 퍼져나갔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프리 더 비드'(FREE THE BID)는 여성 감독을 늘리자는 취지에서 출발했다. 김진아 씨는 "저도 한 번도 여성 감독을 만난 적이 없다. 감독 모두가 남성인 것에 의심을 하지도 않았다"며 "경쟁하는 감독 3명 중 1명은 여성으로 둔다는 것이다. 40개 대행사가 동의했고 광고주들도 많이 동의해, 슈퍼볼 광고 5개가 여성에 의해 만들어지는 성과가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조직화라는 게 얼마나 필요한지 알 수 있는 부분"이라고 덧붙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