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CBS노컷뉴스와 만난 제2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김선아 집행위원장 (사진=황진환 기자)
제2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SIWFF, Seoul International Women's Film Festival)의 마침표를 찍는 자리였던 지난 7일 폐막식에서, 김선아 집행위원장은 "저는 성공할 줄 알았다"고 말해 주변을 폭소케 했다. 당연히 농담은 아니었다. 올해로 스무 돌을 맞은 '여성영화제'는 정말로 '잘 됐다.'
지난해 열린 19회 때보다 기간을 하루 늘렸고, 관수도 2개 더 늘렸다. 전체 좌석수가 150% 늘어남과 동시에 관객수 역시 같은 폭으로 증가했다. 그것도 '여성영화제'를 향한 충성도가 어마어마한, '준비된 관객'들이었다. 김선아 집행위원장이 직접 언급했듯, 예매 서버 창이 다운됐다. 주말이나 휴일엔 온라인은 물론 현장 판매 표까지 모조리 매진되는 현상이 벌어졌다.
지난 18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교동 한 카페에서 제2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김선아 집행위원장(수석프로그래머 겸직)을 만났다. 영화제가 끝나 당장 바쁨에서 일단은 벗어난 모습이었다. 인터뷰 다음 날에 사무국 평가 회의가 잡혀 있다고 했다. 평가와 정산이 끝나면, 9월부터 내년의 '여성영화제'를 준비한단다.
◇ 올해 '여성영화제'는 "확실히 대단했다"
개막식부터 8일간 치러진 '여성영화제'에 5일 동안 출석한 기자도 한 명의 관객으로서 영화제의 열기가 뜨겁다는 것쯤은 충분히 느꼈다. 그래도 궁금했다. "잘될 거라는 느낌이 왔다"는데, 올해 '여성영화제'는 작년보다 얼마나 흥한 것인지. 그러자 김 위원장은 "작년에도 잘 됐다"며 "확실히 굉장히 상승세다. 그냥 상승세가 아니라 뭔가 다른 국면인 것 같다"면서 웃었다.
작년에도 관객들이 성원을 보내줬지만 사실 19회 때의 사정은 썩 좋지 않았다. '돈 문제'로 큰 타격을 받았다. 이전 정부는 '여성영화제'에 아주 적은 예산만을 허용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많이 왔다. 스무 살을 맞았다는 의미도 있으나, 올해 영화제 크기를 키우려고 마음먹었던 데에는 이처럼 든든한 관객의 '지지'가 있었다.
김 위원장은 "관객들의 성원과 지지를 보고 (올해 영화제) 예산을 증액하기 위해 아주 열심히 뛰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정권도 바뀌어서, 확장할 동력이 생겼다. 다행히 그에 대한 응답으로 영진위(영화진흥위원회)나 서울시가 예산을 증액했다"고 설명했다.
제2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를 찾은 관객이 6월 6일 상영표를 보고 있다. 붉은 스티커는 온라인 매진, 푸른 스티커는 현장 표까지 완판됐다는 의미다. (사진=서울국제여성영화제 제공)
예산이 늘어나니 시도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았다. 서울 마포구 성산동 문화비축기지에서 사상 최초로 야외 개막식을 연 것이 시작이었다. 영화제 기간도, 상영관도, 스태프도 모두 늘었다. 출품-상영작 수도 역대 최고 수준이었다. 61개국에서 총 957편이 출품됐고, 그중에서 엄선된 36개국 147편이 관객들을 만났다. 국제 포럼도 2개나 마련됐고, 총 178회 상영 회차 중 절반이 넘는 90회차에서 GV(관객과의 대화)와 스페셜 이벤트를 진행했다.
그러나 '여성영화제'의 확장을 모두가 반기는 것은 아니었다. 사무국 내부에서도 우려의 시선이 있었다. 김 위원장은 "그동안 재정적으로 너무 힘들게 해 왔는데, (크기를 키우면) 감당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의견이 나왔다. 잔치를 크게 벌였는데 반찬이 다 남아 썩어가면 어떡하냐는 거였다. 호응이 없으면 그걸 감당하는 게 온전히 우리 몫이 될 테니까"라고 설명했다.
물론, 그런 걱정을 싹 씻을 정도로 영화제는 잘 됐다. 김 위원장은 본인이 집행위원장을 맡았던 17회 때부터 '여성영화제'가 계속 상승세라는 것을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영화제의 성장은 내부의 우려를 불식시키는 한편, 김 위원장에게는 '더, 더, 더 진짜 크게 해야겠다'는 마음에 불을 지폈다.
◇ 국제·국내장편경쟁 신설… 국내 장편은 수급 힘들어 '진땀'올해 '여성영화제'에는 새로운 섹션이 마련됐다. 바로 국제·한국장편경쟁이다. 국제장편경쟁에서는 카타리나 뮉슈타인 감독의 '애니멀'이, 한국장편경쟁에서는 박소현 감독의 '구르는 돌처럼'이 작품상을 받았다.
장편경쟁 부문은 의외로 인기가 없는 부문으로 꼽힌다고 한다. 수상 경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감독 이름에 의존할 수도 없을 만큼 정보가 많이 없기 때문에 관객들이 제 발로 잘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 위원장은 이런 고정관념을 바꿔보고 싶었고, 그 어느 때보다 작품 선택에 신경 썼다.
김 위원장은 "우선, 전 세계 작품을 지역별로 안배했다. 아프리카 작품이 애석하게 빠졌지만, 전 세계에서 지금 떠오르고 있는 스타들의 작품을 모아봐야겠다는 마음으로 우리 영화제 정체성에 맞게 굉장히 다양한 여덟 작품을 모았다. (작품 선정은) 성공적이었다고 본다. 국제장편경쟁을 눈여겨봐야겠다는 호응도 있었고"라고 말했다.
제2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부터 국제장편경쟁과 한국장편경쟁이 신설됐다. 위쪽은 국제장편경쟁 작품상을 받은 카타리나 뮉스타인 감독의 '애니멀', 아래쪽은 한국장편경쟁 작품상을 받은 박소현 감독의 '구르는 돌처럼' (사진=서울국제여성영화제 제공)
한국장편경쟁은 작품을 모으기가 쉽지 않았다. 애초 극영화만 받으려 했던 것을 다큐멘터리까지 포함한 이유다. 김 위원장은 "(극영화는) 여성 감독 영화가 워낙 없다. (있더라도) 다른 영화제에서 상영하고. 수급 상황이 한국 영화의 현실 그 자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더라"라고 전했다.
이어, "관객 호응도 좋고 토론도 많이 된다는 이야기가 나오면 한국 여성 감독들도 더 그런 영화를 만들지 않겠나. 그러면 생산량이 늘 것이고, 몇 년 정도 지나 장편경쟁의 명성을 갖고 가면 해결될 문제라고 본다. 장편경쟁 둘 다 첫 번째 시도였다는 것 치고는 가능성을 봤다"고 부연했다.
이번에 가능성을 본 만큼, 앞으로도 장편경쟁에 힘을 더 실어줄 예정이다. 김 위원장은 "여성 감독들이 장편 극영화를 많이 만들도록 독려하는 것, 젊은 여성 감독을 지원하는 목적 2가지가 있다. 그 자체의 가능성은 굉장히 밝고,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내리라고 본다. 꼭대기로 올라갈수록 남녀 비율이 9:1로 되는 불균등하고 불평등한 영화 산업 구조 자체를 깨기 위해 만들었기 때문에, 앞으로도 훨씬 더 푸시(push)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 관객들과 만난 147편, 올해 상영작 경향은어떤 영화제를 규정하는 핵심은 결국 어느 영화가 걸리느냐다. '여성영화제'도 마찬가지다. '좋은 영화'를 관객에게 소개하기 위해 부단히 애쓴다. 좋은 의도로 만들어진 영화니까 작품성이 좀 떨어져도 선정한다는 어설픈 접근은 하지 않는다는 게 김 위원장의 설명이다.
"섹션마다 좀 다르게 접근하는 것 같아요. 쟁점들 프로그램은 이 영화가 얼마나 강하게 이슈파이팅을 하느냐를 먼저 봐요. 이 영화를 보고 난 후에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하면서 아젠다 설정 생각을 많이 하죠.
국제장편과 뉴 커런츠(새로운 물결)는 정말 집중적으로 미학적인 관점으로 봅니다. 페미니즘 관련 영화니까 봐야 한다는 일종의 도덕적 정당성을 가질 필요가 없어요. 완성도 떨어져도 (의도가 좋으니까) 봐야 한다는 접근은 완전히 잘못됐어요. 주류 판에서는 보기 힘든, 전형적인 영화와 되게 다른 즐거움과 관점을 주는 정말 뛰어난 영화를 볼 수 있어요. 철저하게 미적인 즐거움과 성찰을 중시해요. 우리가 이 영화를 보면서 어떤 종류의 쾌락을 말할 수 있을까? 미학과 윤리에 대한 질문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영화들이죠. 윤리라는 건 페미니즘을 떠날 수 없으니까요. 미학과 윤리 사이의 긴장에서 나온, 정말 뛰어난 작품이 많아요. 그 자체로 미적 경험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작품들이니, 거기에 무슨 의의나 명분을 집어넣고 싶지 않아요.
아시아 단편경쟁선에선 2가지를 항상 고려하는 것 같아요. 페미니스트적인 콘텐츠와 영화의 미학적 폼 사이의 밸런스. 이건 (영화제에 나오는) 모든 영화에 통용되지만, 특히 이 부문에서 얼마나 '미적인 균형'을 맞추고 있는지를 봐요."
영화제 기간 매일 발행됐던 SIWFF OFFICIAL DAILY (사진=서울국제여성영화제 제공)
여성 감독들이 남성 감독보다 훨씬 수가 적고 한 작품을 만들고 다음 작품을 만들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비슷한 흐름이다. 하지만 전 세계로 범위를 넓히면 감독 수도, 작품 수도 적지 않다. 여성 감독들은 꽤 많고, 그들이 각자 펼쳐내는 세계도 제각각이다. '여성영화'라는 아주 큰 틀만 공유할 뿐, 매 작품 개성이 살아있다는 의미다.
김 위원장은 "(여성영화는) 상업영화가 지닌 기존의 문법을 절대 따르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각자의 독창성과 고유성이 있다. 저는 그걸 되게 중요하게 여긴다. 감독이 하고 싶은 이야기와 그걸 표현하고 싶은 방식이 스타일이지 않나. 그게 굉장히 고유해서 (작품 경향이 어떻다고) 분류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여성이 주인공이고, 여성의 이야기고, 포커스가 여성에게 가 있고, 여성이 플롯을 주도한다는 구분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각 작품이) 확실히 달라요. 여성영화라는 장르는 50억 미만의 중규모 영화를 포함해 아트버스터(예술성을 갖춘 블록버스터, 예술성 짙은 영화가 히트작 반열에 드는 것을 의미함)를 지향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 영역에서 가장 발군의 실력을 보이니까요. '원더우먼' 같은 영화도 있지만, 허리가 취약해요. 여성은 저 밑에 저예산 독립영화만 만드는 식이니 양극화도 심각하고요. 이걸 끌어올려서 생태계를 좀 더 다양하게 하는 데에 여성영화가 한몫을 할 수 있었으면 해요. 전반적인 추세를 보면 그 시장의 가능성을 봤고, '여성영화제'도 그 부분을 확장하기 위해 애써야겠다는 생각입니다."
(노컷 인터뷰 ② 여성이 공간을 장악하는 '해방감' 가득했던 여성영화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