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4일 개봉한 영화 '오목소녀' (사진=㈜인디스토리 제공)
지난 2016년 제작된 영화 '걷기왕'(감독 백승화)은 촬영에 들어가기 전 성희롱 예방 교육을 실시했다. 당시 SNS에서는 각종 문화계 내 성폭력 및 위계폭력 사례를 고발하는 'OO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자연히 '걷기왕'의 시도는 높은 관심을 받았다.
그로부터 2년이 흘렀다. 지난달 24일 개봉한 '오목소녀'(감독 백승화)에서는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됐다. 콘티북 마지막에 실려있던 성희롱 예방을 위한 10가지 수칙이 '오목소녀'에서는 첫 장에 담겼다. 한국독립영화협회 성평등위원회 소속인 백승화 감독, 남순아 감독을 비롯해 '평등한 현장 만들기'에 의지가 있는 스태프들이 모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걷기왕'에서 본격적으로 시작한 이 시도는 다른 영화 현장에도 영향을 줬다.
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인디스페이스에서 영화 '오목소녀 관객과의 대화-더 평등한 영화/현장 제작기'가 열렸다. 이 영화의 연출부였던 남순아 감독이 진행한 관객과의 대화에는 백승화 감독, 김진아 PD, 이지민 촬영감독이 참석했다.
백 감독은 우선 '걷기왕'에서 선도적으로 성희롱 예방 교육을 하기로 정한 배경을 밝혔다. 그는 "남순아 감독이 처음 제안해줘서 하게 됐다. 영화 일을 하면서 그런 걸 받아야 한다는 걸 들어본 적도, 경험한 적도 없는데 찾아보니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고 명시돼 있더라. 그런데 영화계에서 아무도 하지 않아 영화 개봉하고 나서 이슈가 많이 됐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백 감독은 "현장에서 성폭력, 위계폭력에 대해 우리 나름의 방어를 해 놓자는 의미로 처음 교육을 했고, 그 내용을 콘티북에 실어서 스태프들이 볼 수 있게 했다"며 "당시만 해도 성희롱 예방 교육이 (일반적인) 직장 내 교육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영화계 스태프들에게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 아쉬웠다"고 기억했다.
남순아 감독은 "한국독립영화협회 성평등위원회에서 1년마다 회원 대상으로 성평등 교육을 했다"며 "이미 2007년에 임금협상에서 정해져 노동권의 의미로 들어가 있던 건데, 그동안은 주요 스태프 몇 명만 교육을 들었다. 제작진 전체에게 공지하고 적용한 현장이 저희('걷기왕')가 처음이었다"고 말했다.
남 감독은 "교육 날에는 막상 많이 오지는 못했다. 스태프들의 2/3 정도가 왔다. '걷기왕' 콘티북에는 피해자를 위한 매뉴얼, 행위자를 위한 매뉴얼, 동료를 위한 매뉴얼 등을 실었다"면서 "(교육 때) 스태프가 적게 왔는데도 당시 강사님이 '촬영감독이 온 건 처음 본다'고 하셨던 게 기억난다"고 전했다.
백 감독은 "'걷기왕' 때와 '오목소녀' 때를 비교하자면, 남 감독이 '걷기왕' 때는 스태프로서 교육을 들었다가 1년이 지나서 '오목소녀' 때는 실제 강의를 한 게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어, "영진위에서 지원금을 받기 위해서는 성희롱 예방 교육을 필수로 들어야 한다. 그런 걸 보면서 좀 바뀌어 가는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고 덧붙였다.
백 감독은 "성폭력에 대해 강의만 하기보다는, 왜 그런 것이 발생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한다고 본다"며 "단순히 성폭력이 나쁘다는 얘기를 하는 게 아니라 왜 그런 게 발생하는지 같이 고민하니까 스태프들도 조직 내에서 그런 건 조심해야겠다는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게 좋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 2016년 10월 개봉한 영화 '걷기왕'에서는 전 스태프를 대상으로 성희롱 예방 교육을 해 높은 관심을 받았다. (사진=CGV아트하우스 제공)
김진아 PD는 한 차례 2시간여 진행된 성희롱 예방 교육보다는 백 감독이 관련 내용을 모든 스태프에게 다시 한번 주지시킨 것이 더 인상적이었다고 밝혔다.
김 PD는 "크랭크인하던 날, 첫 슛 들어갈 때 감독이 직접 나와서 어떻게 영화를 찍고 싶다며 조직문화에 대해 사람들 얼굴 맞대고 얘기한 게 더 효과적이었던 것 같다"고 강조했다.
백 감독은 "교육이 만병통치약이라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며 "강압적인 문화가 우리 현장에서는 없었으면 좋겠고 저부터 잘하겠다는 얘기를 했던 것 같다. 그게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이라고 말했다.
이에 이지민 촬영감독은 "효과가 분명히 있었다. 감독이 '우리 현장은 이런 걸 허용하지 않겠다', '이런 부분을 조심하겠다'고 얘기해주는 게 스태프들이 주지하고 안심하는 데 도움이 됐다"며 "첫 슛 찍기 바로 직전에 모든 스태프들에게 말한 게 실질적으로 각인됐으리라 본다"고 전했다.
김 PD는 "현장에서는 감독의 OK 사인만 기다리지 않나. 그만큼 감독의 태도가 중요하다고 본다. 한 스태프에게 얘기를 들었는데 그동안 소리 지르고 위계적으로 일했던 자신도 ('오목소녀' 때) 바뀌었다고 하더라"라고 부연했다.
성희롱 예방 교육 강사 양성 과정을 이수하고 교육에 직접 나서고 있는 남 감독은 팀장급 이상(퍼스트) 헤드 스태프들이 교육에 참석했던 것에 고무됐던 경험을 전했다. 그러면서 더 많은 권한을 가진, 높은 위치에 있는 헤드 스태프들의 의지와 태도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남 감독은 "현장에서 권력을 가진 조직의 리더가 어떤 의지를 가졌는지가 다른 스태프들에게도 굉장한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백 감독은 '특히 헤드 스태프들에게 당부 말씀드립니다'라고 해서, 누가 더 조심해야 하는지 지목했는데 그 점이 더 인상 깊었다"고 밝혔다.
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인디스페이스에서 영화 '오목소녀 관객과의 대화-더 평등한 영화/현장 제작기'가 열렸다. 왼쪽부터 남순아 감독(연출부), 이지민 촬영감독, 백승화 감독, 김진아 PD (사진=김수정 기자)
백 감독은 영화 현장에서 위계폭력과 성폭력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제작사, 투자사 등 더 많은 권한을 가진 쪽에서도 관심을 두고 책임감 있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백 감독은 "(문제가 발생했을 때) 책임져야 하는 사람들이 방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사건을) 가해자-피해자 개인의 문제로 떠넘겨 피해자들이 현장을 떠나는 것을 스태프들이 목격해 왔기 때문"이라며 "계약관계에 있고, 힘이 있는 제작사와 투자사에서 이걸(관련 조처를) 더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이 촬영감독은 "제작사에 책임이 있다는 것까지는 동의가 돼 있지만, 어떤 방식으로 핸들링할 것인가에 대한 매뉴얼이 없다. 어떻게 책임지도록 할 것인지를 만들어 가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고 제언했다.
남 감독은 성희롱 예방 교육에 배우들도 함께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그는 "'걷기왕', '오목소녀' 때 스태프들은 강의를 들었는데 배우들을 한 번도 듣지 않았다. 배우들도 듣게 하고 싶다"고 전했다.